병오년(丙午年) 1월 1일에 손의암(孫義菴)어른이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구암선생님께서 듣고 말씀하시기를, “범범(凡凡)한 친구라도 외국에 있다가 오면 앉아서 보는 것과 가서 보는 것이 매우 다르다. 더욱이 해월대신사(海月大神師)의 슬하에서 몇십년 동안 함께 있었는데, 앉아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중도에 가서 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시었다. 나와 권정암(權貞庵) 및 원신암(元愼庵)이 선생님을 모시고 1월 1일에 차를 타고 대구부(大邱府)에 가서 의암 손병희씨를 만나 같이 일을 진행할 때에 이용구(李容九)가 불복(不服)하자, 이용구 등 교령(敎領) 60여명을 의암어른께서 교단에서 쫓아내셨다.
병오년(丙午年) 어느 달에 각 처의 교도(敎徒)들이 사문(師門)의 적통(嫡統)이 구암선생에게 있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 의암어른이 교무(敎務)를 총괄하여 모든 일이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사람들의 마음이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그때 천도교(天道敎) 고문(顧問)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금융관장(金融觀長) 윤귀영(尹龜榮)등이 우리 형제 및 권정암(權貞菴)과 협의하고, 사문(師門)의 종통(宗統)에 있어 적통인 구암선생을 대도주(大道主)로 모시지 아니하고 의암어른이 도주(道主)를 자처하기 때문에 교무(敎務)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하여 의암어른에게 사퇴를 권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