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년(戊申年) 1월 15일에 의암이 와서 사과하기를, “의롭지 않은 일은 지금 이후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선생님께서는 전혀 듣지 않으셨다. 그 뒤에 의암어른이 다시 홍병기(洪秉箕)와 이종숙(李鍾淑)으로 하여금 서간(書簡) 2통과 몇 사람의 증약서(證約書)를 함께 보냈는데, 그 내용은, “지금 이후로는 교단 안의 크고 작은 일과 암호(菴號)에 관한 모든 권한을 대도주에게 위임한다”고 하였다. 또한 증약서를 보냈는데, 김낙철·박인호·이종구·홍병기·권병덕의 이름을 연이어 적고 우리 교단 전체가 평화롭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왼쪽에 여러 조항을 열거하여 약속을 증거한다고 하였다.
하나. 질서를 바로잡는다.
하나.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규칙을 준수한다.
하나. 서로를 막론하고 마음을 합해 이치를 분별하며 혹시라도 갈라지는 일이 없게 한다.
하나. 오늘 이전의 일은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
포덕(布德) 49년 15일
대도주(大道主) 각하(閣下)
다시 지방의 천주(薦主)와 증약서(證約書)에는 차례로 인장(印章)을 찍음.
구암선생이 영영 나오지 않으시고, 대도주의 직임에서 물러나셨기 때문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대도주는 박인호가 되었으나 교단의 일은 여전히 의암어른이 전적으로 처리하였다. 의암은 성사(聖師)를 자칭하였다.
이때 이용구가 천도교에서 출교(黜敎)를 당하여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교도를 모아 교우동지구락부(敎友同志俱樂部)를 조직하고 있다가 종통계승(宗統繼承)이 구암선생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처지에서 구암선생께서 천도교에서 물러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동생 연암과 권정암의 소개로 여러 차례 선생님에게 나아와 아뢰기를, “우리 교(敎)의 종통은 해월선생님이 구암선생에게 전수하신 것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교단의 정무가 병립하지 않으면 매우 어려우니 교(敎)는 선생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회(會, 동학교단의 일)는 제가 주관해서 교단의 일을 함께 세우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조직하였다.
정미년(丁未年) 6월 2일은 구한국(舊韓國, 대한제국) 광무(光武) 11년 양력으로 7월 12일이었다. 이용구와 송병준(宋秉畯)이 두 분 선사(先師)를 신원(伸寃)하는 일을 법부(法部)에 호소하니 대신 조중응(趙重應)이 그 안건을 각의(閣議)를 거쳐 상주(上奏)해서 재가를 받아 신원하는 일을 해결하였다.
이 해 12월 16일에 나는 일반 교우와 함께 협의하고 각 포(包)의 교령(敎領)과 의결해서 구암어른을 시천교(侍天敎)의 대예사(大禮師)로 모셨다.
이 해 12월 18일에 선생께서 이용구에게 봉암(鳳菴)이라는 호를 내렸다.
무신년(戊申年, 1908) 1월에 두 분 선사(先師)의 진상(眞像, 초상화)을 그려서 봉안하려고 제세주(濟世主, 최제우)의 수양딸 사위인 정울산(鄭蔚山)[이름은 잊어버림]을 경주부(慶州府) 가정리(柯亭里)에서 초청해서 맞아들여 선생님의 모습을 듣고, 서울에서 화사(畵師, 화가) 안중식(安中植)을 불러와서 모사하였다.
이 해 6월에 서울의 대사동(大寺洞)과 청석동(靑石洞)에 본 교당(敎堂)을 건축할 때 일반교인이 성심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3년 안에 준공할 것을 보고하고, 교인에게서 구리조각과 쇠붙이를 모아서 법종(法鍾)을 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