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해 갑오년(甲午年, 1894) 봄에 고부군(古阜郡)의 전봉준(全琫準)이 자신의 아버지가 해당 군수 조병갑(趙丙甲, 丙은 秉의 오식)의 손에 죽은 일을 보복하기 위하여 민란을 일으켰다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무장군(茂長郡)에 사는 손화중(孫化中)을 움직여서 큰 난리를 일으키려는 기미를 보고 마음과 정신이 두려웠다. 그래서 형(김낙철)의 편지를 가지고 하루가 안걸리게 말을 타고 올라가서 대신사를 청산(靑山)의 문암리(文岩里, 현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서 찾아 뵙고 그 사유를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대신사께서 분부하시기를, “이것도 시운(時運)이어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는 형과 상의하여 접(接)의 내부를 정중히 단속하고 숨어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라”고 하시며, 형에게 답장을 내려주시고, 6임의 첩지(牒紙) 4,000여 장을 내어 주셨다.
말에 짐을 가득 싣고 떠나려고 할 때에 마침 서장옥이 관할하는 곳에서 진산군(珍山郡)의 방축점(坊築店)에 회소(會所)를 마련하고 전봉준과 아래위에서 서로 호응하는 모양새로 수 천 명이 회동하였다. 이 사실을 대신사께서 들으시고 크게 화를 내며 하교(下敎)하시기를, “날이 저물기 전에 해산을 안하면 큰 재앙이 대두할 것이다. 건장한 심부름꾼을 시켜 빨리 전하라”고 하였다.
나도 그곳으로 지나가는 길이 되기 때문에 방축점에 당도하였더니, 정말로 5리(里)에 걸쳐 길고 넓게 성찰(省察)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위의가 매우 엄숙하였다. 그래서 바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진중(陣中)에 들어가 도소(都所)가 있는 곳에 당도하니, 말의 고삐를 잡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황공스럽게 도소에 가니, 얼굴을 아는 사람은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 왔다”고 하였다. “선생님의 분부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기세를 잠시 살펴보았더니, 그만두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고 몸을 뺄 방책도 없었다. 그러므로 계책 하나를 내어 대답하기를, “선생님의 분부에 ‘시운이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너도 빨리 내려가서 뒤에서 호응하라’고 하시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려간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곳에 남아 글을 보내 기포(起包)를 하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나는 당초 허다한 일 때문에 접의 내부를 교육하지 않아 직접 대면하여 타일러도 움직이게 하기 어려운데 글로는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빨리 내려가라”고 하기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바로 길을 떠났는데, 다음날 아침에 금산군(金山郡, 金은 錦의 오식)의 포군(砲軍)에게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곳에서 몸을 벗어나 고산군(高山郡) 갱금점(更金店)에 당도하였다. 점(店)의 주인이 말하기를, “그 양반 신수(身數)가 좋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으니, 점의 주인이 말하기를, “하도(下道, 호남)에 큰 난리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점에서 행상(行商)과 부상(負商) 수백명을 모집하여 근처에 말과 포를 거두어 지금 이 산의 모퉁이로 떠났는데, 일분만 먼저 왔어도 큰 재난을 만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하는가”라고 묻기에, “전주(全州)의 삼례(三禮, 三은 參의 오식)로 가려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점의 주인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전주의 삼례에는 행상과 부상 수만명으로 가득찼으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갈 곳이 없어 말머리를 서쪽 산골짜기로 향하여 정처없이 가서 날이 저물어 어스름해 질 때에 여산(礪山)의 숙현점(宿峴店)에 당도하였다. 그랬더니 이 점의 주인도 역시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손님의 신수가 좋다. 지금 하도에 큰 난리가 일어나서 여산의 영장(營長, 長은 將의 오식)이 선봉장으로 오늘 오후에 출발했고, 후군(後軍)이 조금 전에 내려갔는데, 경내의 말과 포를 거두고 나그네의 말까지 모두 빼앗았다”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이 사방 막히고 피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점의 주인에게 내일 새벽녘에 밥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다음날 해가 밝기 전에 길을 떠나 20여 리를 가서 익산군(益山郡)의 입석점(立石店)을 바라보고 장등(長嶝, 산마루)에 올라 주저하고 있었는데, 익산군으로부터 1진(一陣)의 병마가 와서 입석점을 지나가고 있었다. 1시간 정도를 지체하여 서로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기에 가는 길을 버리고 남쪽 하늘을 향해 전답을 지나가다가 큰 길에 당도하여 돌아보니 다시 한 무리의 병마가 50보(步) 정도에 다가오고 있었다. 경황이 없어 말에서 내려 길가 50보쯤에 말을 세우고 생사의 기로에서 천사(天師, 최제우)만 생각하고 있었더니, 2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모두 길가에 내려 지나갔다.
그래서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산야와 방향도 없이 갔다가 어느덧 전주 이리시(裡里市, 솜리장터)의 1마장(馬場, 5리나 10리가 못되는 거리) 쯤에 당도하여 바라보았더니, 이리시로부터 몇 백명의 행상과 부상들이 계속 올라와 20보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마침 그 때에 하늘이 우령(雨鈴)을 내어 모립(冒笠)에 쏟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볼 겨를이 없음을 알고 바로 말머리를 돌려 소나무 숲 사이로 피신한 뒤에 동자포(東者浦)나루를 건너 만경(萬頃) 산목산리(山木山里)의 교인(敎人) 집에 저물어서 도착하였다. 그 교인이 말하기를, “부안(扶安)의 동진(東津)에 배가 끊어져서 지나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니, 며칠동안 사지(死地)를 모면한 것도 천사와 성령께서 간섭한 이치가 분명한데, 오늘 고향에 와서 어찌 걱정을 하겠는가? 다음날에 길을 떠나 동진 나루터에 도착해보니, 형이 위험한 때를 만나 방외인(方外人)을 기피했기 때문에 뱃길을 거절하고 교인으로 하여금 파수를 보게 하여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바로 배를 끌고와서 건너게 하였다. 그래서 무사히 집에 돌아왔는데, 이 때가 4월 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