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군수(扶安郡守) 이철화(李哲和)씨가 이방(吏房)·호장(戶長)과 상의하고, 형을 청하여 성안을 보전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城)에 들어가 머물렀다. 4월 3일에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포병 4,000여 명을 인솔하여 부안성안으로 들이닥쳐 군수 이철화씨를 잡아 꿇어앉히고 칼을 빼어 목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형이 진(陣)을 치고 들이닥쳐서 손화중에게 말하기를, “네 선산이 이 성 밖에 있으니 나의 성주(城主)가 바로 너의 성주이다. 성주는 부모와 마찬가지인데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라고 하니, 손화중도 역시 감화가 되어 이철화씨가 참혹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사방에서 몰려들어와 포성이 진동하였는데, 형이 손화중에게 말하기를, “부안은 한쪽 귀퉁이 땅에 사방이 막힌 곳이고, 너의 선산이 싸움터가 되니 넓은 곳으로 진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손화중이 말하기를, “부안에서도 호응하여 따른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나도 갈 터이니 진을 옮기라”고 하고, 걸어서 뒤를 따라갔다. 나는 두려워서 그 날 밤에 산위에서 보냈으나 형은 어쩔 수 없이 진중(陣中)에 있었다. 고부군의 황토현(黃土峴)에 이르렀는데, 날은 저물고 3면으로 관군이 급하게 추격하였다. 그래서 산위에 진을 친 것을 보고 동지 2~3명과 함께 그 날 밤에 몸을 피해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니 형제가 새로운 얼굴로 서로 마주보는 것 같았다.
그 후에 난리가 더욱 심하여 녹림(綠林)의 무리가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보통의 생령들이 죽을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경내를 보전하기 위하여 군수가 이방·호장·유림 등과 함께 형에게 성 안에 회소를 설치하도록 권면하니, 형이 말하기를, “예산이 없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매 호(戶)마다 쌀 1말씩 거두어 그 비용을 담당한다는 향촌의 공론이 있어 형이 어쩔 수 없이 성 밖의 서두리(西頭里)에 회소를 설치하고, 각처의 탁란을 금지하였다. 남면(南面)의 줄포(茁浦)는 유명한 포구로 인물과 재산이 풍부하고 고부(古阜)·흥덕(興德)·고창(高敞)·무장(茂長)의 4개 군이 서로 접하여 사방에서 적을 맞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