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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에 군수 윤시영(尹始榮)씨가 새로 부임해서 형에게 말하기를, “이 곳에 와서 탐문해보니, ‘온 경내의 인민이 그대의 덕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위로부터 있는 일은 내가 맡을 것이니 탁란배의 금지는 그대가 담당하라”고 하여 서로간에 의리가 자연히 특별하였다. 그러나 경군(京軍)이 내려온 뒤에 뜻밖에 밀지(密旨)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 형제를 잡아 가두라고 하니, 윤시영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의 일과 같으면 가두는 것을 없게 하겠으나 외국인의 정치와 제도를 아직 알 수가 없어 어찌 할 수가 없다”고 하고, 형제를 ▣청(廳)과 장방청(長房廳)에 각각 가두었다. 성안의 친구들은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요와 안석을 주거나 요강과 타기(唾器,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를 늘어놓고 주안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읍군(井邑郡)의 ▣학표(▣學表)이 영문(營門, 전라감영)에 소장(訴狀)을 내러 밤을 가리지 않고 갔으나 아직 해결이 없었다.
그 때에 나주(羅州)의 오권선(吳權善)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씨와 다투다가 시국이 불리한 것을 보고 몸을 피했는데, 나주 진영(鎭營)의 포교(捕校)가 오권선의 뒤를 밟아 올라와서 형의 집에 들이닥쳐 문부(文簿)를 수색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내 두령(頭領) 40여 명이, “전봉준과 손화중이 하는 일이 교리(敎理) 밖의 일이니 상관하지 말자”라고 하는 책자가 있었다. 포교들이 이 책자를 찾아가지고 말하기를, “오권선의 두목이 김아무개 형제인데 벌써 잡혀 갇혀 있으니 오권선은 찾을 것이 없다”고 하고, 바로 성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윤시영씨와 말을 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일본군 대대장(大隊長)이 나주에 자리를 잡고 각 군의 죄인을 데려오라는 명령이 지엄하므로 김아무개 형제를 내어달라”고 하니, 군수도 어쩔 수가 없어 허락하였다. 포교들이 장방청에 와서 내가 거처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비록 죄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호강이다”라고 하고, 우리 형제에게 행차칼(죄인에게 씌우는 칼)을 씌웠다. 길을 떠나려고 할 때에 군수도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모두 싫어하였다. 군내(郡內)에 사는 친구 신(申)아무개가 포교에게 말하기를, “이 양반이 이번에 가면 생사를 알 수가 없으니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그렇게 할 모양으로 1리쯤 나갔다가 포교들이 무슨 생각인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을 더 머물자고 하고 다시 장방청에 가두었다.
저물녘이 되어 일본군 40여 명이 각 군의 죄인 30명을 데리고 도착해서 죄인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 때에 죄인의 인도는 홍만풍(洪萬豊)으로 장교(將校)를 정했는데, 홍아무개가 와서 말하기를, “김생원 형제분이 이번 가는 길에 회생하는 것을 바라기가 어렵다. 며칠간이라도 더 살게 된 것은 김생원이 선(善)을 쌓은 덕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저번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잡혔을 때에는 기대할 희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외국사람에게 체포되어 희망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홍장교(洪將校)가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모르는 말이다. 평소 김생원과 정의(情誼)가 아무리 두텁다고 해도 지금은 막다른 자리이다. 이제 10리를 못가서 김생원이 입은 옷도 모두 벗길 것이고, 김생원이 아직 부자라는 소문이 있어 기둥뿌리도 남지 않도록 묶어놓고 구타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나주까지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 심장이 서늘하고 뼈가 차가워질 때에 나주의 포교가 창문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돈 400냥만 주면 너를 살려주겠다”고 하니, 형이 대답하기를, “돈 400냥으로 나를 살려주겠다는 것도 아니 될 말이고, 내가 이런 지경의 이런 경우에 이르러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장에는 어찌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사촌동생 낙정(洛貞)에게 기별을 해서 몇 십 냥의 노잣돈이나 보태주라”고 하였다. 다음날 해가 뜰 무렵에 낙정이 돈 20냥을 구하여 사방으로 수소문을 했으나 간곳을 알지 못하고 그만둔 일이 있었다.
하루를 더 머물렀다가 일본군이 전주로 데리고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군내의 친구들이 와서 위로하기를, “이제는 김생원이 살아서 전주로 가면 우리들의 연갈(連葛)과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 설마 이만한 일도 도모하여 이루지 못하겠는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에,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하였다. 길을 떠나려고 할 때에 처자 및 친구들과 영영 이별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김제군(金堤郡)에 도착하니 군내 친구들이 알고 모르는 것을 막론하고 위문하러 왔는데, 그 때에 주안상 2개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김생원의 덕화(德化)는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오늘 이런 지경에 이르니 하늘의 도가 없다고 할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술 1동이를 가지고 와서 좌우의 죄인들에게 권하며 말하기를, “김생원만 특별히 대접하고 좌우의 여러분들을 그냥 두기가 어려우니 1잔 술로 요기를 하라”고 하였다. 나중에 홍가(洪哥)라는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김생원처럼 덕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김생원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김생원 휘하의 포군으로 몇 달동안 가까이에서 모셨습니다. 두루마기가 아까우니 나에게 벗어주십시오”라고 하기에, 형제가 두루마기를 모두 벗어주고 차가운 구들에서 죽기만을 바랐다.
다음날 갑자기 나주의 대대소(大隊所)에서 죄인을 데려오라는 급보가 있었기 때문에 나주로 향해 가다가 고부군에 머물렀다. 그 때에 사촌동생 낙정이 고부군 천리(川里)의 김진안(金鎭安) 요협(堯莢)씨에게 가서 그 사유를 아뢰었더니, 김진안이 말을 타고 고부군에 도착해서 군수 윤병(尹炳)씨를 보고 말하기를, “부안의 김아무개 형제가 죄수로 잡혀가는 중인데, 돈으로 속죄한다면 몇 천금이라도 내가 담당할 것이니 죄를 모면하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윤병씨가 말하기를, “돈으로 말하다가는 죄가 없어도 죄를 사게 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라고 하기에, 할 수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다음날 정읍군에서 묵었는데, 그곳 군수 최대철(崔大哲)은 척분(戚分)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촌동생 낙정이 군수를 찾아가서 사유를 말했더니, 군수가 말하기를, “누가 동학을 하라고 했는가”라고 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길을 떠날 때에 나에게 한 마을에 사는 최군명(崔君明)과 은상렬(殷相烈) 2명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이별을 하였다.
장성(長城)에 머물 때에 사촌동생 낙정이 원정장(寃情狀)을 가지고 병사와 마부를 가리지 않고 사촌형제를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광경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나주로 내려가다가 북창점(北窓店, 窓은 倉의 오식)에 이르러 중론을 들어보니, 나주에선 죄인을 따라온 사람도 살아서 돌아온 자가 한명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형이 사촌동생 낙정에게 말하기를, “너라도 살아남아야 집안이 보존될 것이니 어서 집에 돌아가라”고 하니, 낙정이 말하기를, “형님이 죽으면 이같은 것이 살아서 쓸 데가 없으니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너는 내가 죽는 것을 보고서야 갈 사람이니 이 곳에서 자진(自盡, 자살)할 것이다”라고 하니, 낙정이 놀라서 물러나며, “그렇다면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큰소리로 울며 돌아가니 나무와 돌도 모두 서러워하였다.
저물녘에 나주에 도착하여 군문(郡門) 앞에 32명의 죄인을 늘어앉히고 진영(鎭營)에 맡겼는데, 지난번 부안에 왔던 포교 2~3명이 입의책(立義冊)을 가지고 춤을 추며 말하기를, “김아무개 형제를 다시 보겠구나! 너희를 다시 못보는가 했는데, 다시 보니 드문 일이다”라고 하며, 유독 우리 형제만 뒤로 수갑을 채운 손을 두발로 구르며 머리너머 턱에다 걸고 상투를 돌려서 잔뜩 동여매어 육모방망이로 좌우에서 셀 수 없이 구타하여 5리정(五里町)의 진영으로 몰아갔다. 그 때에 고개가 뒤로 젖혀져서 하늘과 땅도 구분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서 갔다. 영문(營門) 앞에 죄인을 늘어앉히고 포졸 30여명이 각자 육모방망이를 가지고 한바탕 풍파를 일으킬 때에 죄인들은 대부분 50~60대를 때리는 데에 불과했으나 우리 형제는 두 시간 동안 때렸다. 그래서 수갑은 끊어져서 떨어지고 머리카락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형제가 서로 돌아보니, 한 사람이라도 살기를 바랐으나 지금 생각은 그만 놓아 주워도 살아남을 희망이 없었다. 1칸 정도 되는 토굴에 30여 명을 몰아넣었는데, 먼저 갇혀있던 사람이 12명이었다.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긴나무를 넣어 첩첩이 쌓인 몸이 토굴 천장에 닿아 호흡이 통하지 아니하였다. 차차 정신을 차려 삼대처럼 같이 끼어서니 몸을 굽히고 펼 수가 없을 때에 먼저 갇혀있던 자들의 사매(私枚)가 더욱 무서웠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팔이나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가 흘러 방안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픈 곳도 없고 정신만 새벽처럼 맑았다. 형에게 상처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더니, 상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사의 덕을 마음으로 송축하였다.
다음날 포졸이 와서 나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 집에서 돈 400냥만 가져오면 살려줄 것이니, 편지를 쓰라”고 하며 종이·붓·먹을 주기에 피할 수가 없어 편지를 써서 주었다.

주석
경군(京軍)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끌고 온 장위영의 군사를 말한다.
김진안(金鎭安) 진안군수를 지낸 김요협씨를 말한다.
입의책(立義冊) 의연금을 낸 명부로서 수성군은 의연금을 빙자해 토색질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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