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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또한 다음날은 을미년(乙未年) 1월 6일이었다. 오후 4시에 죄인 32명을 순서대로 결박해서 대대장이 있는 대(臺)아래에 늘어앉혔다. 3명은 명령에 어긋나서 왔기 때문에 바로 풀어주고, 우리 형제를 불러내어 한쪽으로 옮겨 앉힌 뒤에 나머지 27명은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쏘아 죽였다. 병사 몇 명이 우리 형제를 데리고 가서 군대청에 가두었는데, 보성군수 유규원(柳奎源)·흥덕군수 권직상(權直相)·운봉(雲峰)의 백락서(白樂書)·장흥(長興)의 이방언(李房彦, 房은 邦의 오식)·보성의 이태로(李太老) 등 몇 십명이 먼저 잡혀와서 갇혀있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어제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사촌동생 낙정이 나의 편지를 보고, 갑자기 돈 400냥을 마련할 길이 없어 나의 9촌(九寸) 숙부인 문삼(文三)씨를 찾아가서 연유를 아뢰었다. 그랬더니 문삼씨가 말하기를, “어떻게 살아오기를 바라겠는가? 돈 20냥을 줄 터이니 그것으로 장례를 치루라”고 했다. 그 때문에 낙정이 분노하여 돌아와서 농우를 팔아 400냥을 채워가지고 한마을에 사는 은상렬과 함께 내려왔다. 그런데 나주의 성문안에 들어오니 돈짐은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모르겠고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다. 그 가운데에 가서 이 시신과 저 시신을 보며 통곡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부안의 김아무개 형제는 죽지않고 군대청에 있으니 그 곳으로 가보라”고 하기에, 군대의 문앞에 와서 군인에게 애걸하였더니 그 정상이 불쌍하여 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바로 만난 뒤에 한편으로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방안의 사람들도 요기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시초(柴草, 땔감)을 사가지고 와서 차가운 방을 따뜻하게 하니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고마워하였다.
지난번에 27명을 쏘아죽이는 와중에 다행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마침 그때에 제주사람 수십명이 해당군의 영산포(永山浦, 永은 營의 오식)에 장사를 하러 왔다가 우리 형제가 잡혀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해당 군수 민종렬씨에게 등장(等狀)하기를, “지난해와 같은 세상에 돈을 가지고도 어디가서 쌀을 살 수가 없고 쌀을 사서 포구를 나올 가망이 없었는데, 부안의 김아무개 형제가 아니었으면 제주 뿐만이 아니라 각 섬의 인민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죽는 경우에는 하늘의 도가 없다고 말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하고, 오게 된 연유를 자세히 아뢰었다. 민종렬씨가 그 등장을 가지고 대대장에게 직접 가서 연유를 말하였더니, 대대장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번에는 죽이는 것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민종렬씨가 이 일을 탑전(榻前, 임금 앞)에 바로 장계(狀啓)하였더니, 비답(批答)하기를, “바로 풀어주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대장에게 말로 요청을 했더니, 대대장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권한이 나에게 있어 이러한 대두목에게 죽음을 모면하게 해 줄 수 있더라도 풀어주지는 못하겠다. 나도 공(功)을 이루어야겠다”고 하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로 매일 신시(申時)에 한 사람씩 쏘아죽였는데, 사령(使令)이 성명을 장대에 걸어서 앞에 들어오고 병사 수십 명이 뒤를 따라 들어오며 이름을 부를 때에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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