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에 큰 비가 내렸다. 이관수의 가솔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하여 우리 집에 들이닥쳐 밑고 끝도 없이 말하기를, “남의 집에 그만있고 어서 나가라”고 하고, 나의 솥단지와 가산 등의 물건을 섬돌아래로 던져버리고 자기 집의 물건을 모두 배치하였다. 그 마을과 이웃마을의 사람들이 욕하는 얘기가 비처럼 쏟아졌으나 원래 염치가 없는 사람이고 나는 성명이 없는 사람이어서 고소를 할 곳이 없어 100짐이 넘는 가산이 물속에 부침(浮沈)하게 되었다. 그 때에 이관수의 외숙이 되는 김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관수란 놈은 천벌을 받을 놈이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고, 내 아내에게 말하기를, “나중 일은 어떻게 조치하던간에 당장 누추해도 계실 수가 없으니 내 집 곁방이 매우 좁으나 잠시 피신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 아내가 마음에 고마워서 그 노인의 곁방으로 옮겨가니, 한마을의 사람들이 가산을 옮겨주었으나 협소한 집에 100짐이 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어 시장터와 길가에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이 마을사람에게 말하기를, “값은 비싸든 싸든간에 판다”고 하여 모두 없애고, 옷만 7짐을 가지고 다음날 형이 사는 외갈촌(外葛村)으로 오니 농사를 짓던 것도 허사가 되고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내가 이 말을 처음에 듣고 기가 막혀서 1시간동안 자세히 보아도 보이지 않고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분해도 죽은 죄인이 어떤 수가 없었고, 내 아내는 홧병으로 눈병이 크게 일어나 3달 동안 눈을 뜨지 못하였다. 몇 달동안 갇혀있는 가운데 곤란을 겪었으나 별다른 상처나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저절로 배고픔과 추위 및 여독으로 배가 차가워지고 계속 홧병이 쌓였기 때문에 기력이 모자랐는데, 고부군의 용구(龍邱)에 사는 전재현(全在賢)이 복약(服藥) 1제(劑)를 주어 완쾌되었다.
이때부터 처자를 안정시킬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9월에 얼굴을 모르는 순창군 등지로 돌아다니며 가진 재주로 5~6개월 만에 엽전 700여 냥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