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해 정유년(丁酉年, 1897) 2월에 할머니의 산을 화순군(和順郡) 의암(義菴)어른에게 주고, “너는 사치를 좋아 하니 가져다가 입으라”고 하시고 포목 등의 물건은 대교주에게 주시며 “너는 사치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이보다 먼저 장수군의 김숙여가 예를 나타내는 체지(帖紙)를 낼 때에 4,000명이 넘는 명단을 가져와서 대신사가 계신 곳의 40리 밖에 머물렀다. 그래서 대신사께서 대교주와 손의암에게 명하시기를, “너희 두 사람이 가서 사람의 숫자가 어떻든 간에 반만 내어주고 나머지는 나중에 내어주라”고 하셨다. 대교주께서 마침 그 때에 돌아볼 곳이 있어 10리가량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송암(松菴) 어른을 먼저 보내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체지를 내어주라”고 하였다. 대교주께서 볼 일을 보고 돌아오셨는데, 자연히 몇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송암어른은 침석에 누워있고, 숙여가 도장을 찍은 것이 이미 4,000장이 넘었다. 대교주께서 송암을 질책하며 말씀하시기를, “우리 두 사람이 선생님의 명을 받들어 왔는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인장을 직접 찍는게 도리에 당연하고, 또한 반만 내어주라고 하신 명령을 전부 내어주니 명을 받드는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숙여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그 후에 의암어른에게 왕래를 하고 대교주에게는 찾아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대신사께서 화를 내어 미워하셔서 10여 차례 왔으나 한번도 뵙지 못하고 따라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 뒤에 이봉춘(李逢春)은 지금까지 의암어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8월에 대신사와 대교주께서 원주(元州, 元은 原의 오식) 전거리(全巨里)로 몰래 옮겨가시고 분부하시기를, “두령은 누구를 막론하고 100리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