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에 집에 돌아가서 설을 쇠려고 형제가 짐을 싸는데, 대신사께서 분부하기를, “형제가 모두 갈 것 없이 너만 내려가고 네 형은 나와 함께 설을 쇠자”고 하시어 나만 내려가기로 하였다. 형이 보평리(洑坪里) 권성좌의 집까지 함께 가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돌아가셨다.
마침 그 때에 만경(萬頃)에 사는 김철수(金哲秀)와 임학준(任學準) 2명이 김제군(金提郡) 박산리(博山里)의 박아무개라고 하는 사람과 함께 올라와서 앵선동(鶯仙洞) 신선경(申善敬)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밤중에 나를 찾아와서 함께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이천군(伊川郡, 利川의 오식)으로 향하였는데, 실제로는 도두령(都頭領) 김교중(金敎重)이 박아무개로 하여금 김과 임 2명을 유인해서 정탐하는 중이었다. 나는 전혀 모르고 걱정없이 내려갔는데, 다음해 무술년(戊戌年, 1898) 1월에 접을 돌아보려고 각처로 옮겨 다니다가 그믐날에 함평군(咸平郡) 우치리(牛峙里) 전장섭(全章燮)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와서 바로 길을 떠나 나의 본가에 갔더니, 사촌동생 낙정은 이미 그 일을 알고 돈 120냥을 마련해서 오권선씨와 함께 이천군 보평리 권성좌의 집에 가서 소식을 알아보았다. 성좌의 동생이 말하기를, “염려할 일이 아니다. 아무나 가서는 뒤를 알아보지 못하니 돈이나 이 곳에 두고 가면 내가 착실하게 일을 보아 주겠다”고 하기에, 본래 믿을만한 성질이어서 걱정하지 않고 돈만 주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그 사실을 듣고, 지난번에 김제군 박산에 사는 박아무개가 김과 임 두 명을 유인해서 권성좌의 집에 묵고 이천군으로 들어갈 때에 김교중과 약속한 일이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