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에 나는 정읍사람 김일서(金一瑞)를 데리고 바로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2월 5일이었다. 날이 매우 추워 강시(僵尸, 시신)가 많이 나올 만하였다. 먼저 생사를 몰라서 몇 글자를 몰래 봉(封)하여 감옥서(監獄署)의 문앞에 이르렀는데, 청사(廳使)가 대부분 아는 얼굴이었다. 마음이 두려웠으나 청사 한 명을 청하여 약간의 돈을 주고 몇 글자의 편지를 주었더니 몇 시간 뒤에 형의 답장이 왔다. 그 답장에서 말하기를, “네가 올라 올 때에 대신사와 대교주의 안부를 알고 왔고, 집안에 별고가 없느냐”고 하였다. 그 답장을 보니 저절로 슬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고 탕국 한 그릇을 들여보냈다.
다음날 정오에도 탕국을 가지고 감옥 문앞에 가니, 청사가 말하기를, “오늘 아침 일찍 죄인을 모두 수원으로 옮겨 가두었다”고 해서 바로 김일서와 길을 떠나 빨리 걸었으나 서로 만나지 못하여 매우 통탄스러웠다. 그 때에 죄인은 신택우·이상옥·김정업·권성좌·형까지 5명이었다. 수원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죄인을 따라온 사람이 없으면 간식이 나온다고 하기에 요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루 밤낮을 관망해 보았으나, 전혀 그런 기미가 없어 죄인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날 저녁에 형의 음식값을 낼 때에 아무리 생각해도 형의 음식값만 내면 분명히 혼자 드시지 아니하고 나눠 드실 것이어서 그렇게는 못하고 밥을 4그릇을 들여보냈더니, 형이 말하기를, “밥 4그릇을 가지고 5명이 나눠 먹었다. 서로 간에 그럴 수가 없으니 이후로는 5그릇씩 들여보내라”고 해서 그 후로는 5그릇씩 들여보냈다. 최영구(崔榮九)씨가 한 차례 찾아왔을 뿐이었다. 함경도의 김학수(金學水)씨가 은화(銀貨) 12환을 가지고 왔다.
형이 체포되던 날에 대신사께서 인장과 각종의 문부를 대주교에게 맡기시고, 그 날 밤에 다른 곳으로 피신하시며 분부하시기를, “김낙철의 의리가 이와 같으니 물과 불속이라도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조경중(趙敬中)과 장경화(張敬化)에게 글을 써서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낙철의 일은 바로 우리의 일로 알고 힘을 다해 주선을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때에 시기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어 글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그 뒤에 수원 남문 밖에 여관을 정하고 김일서와 함께 죄수 5명의 식사를 제공했는데, 신광우(申光雨)가 돈 2환을 가지고 1차례 찾아왔다. 하루는 수원관찰사 김영덕(金永悳)의 처(妻)의 4촌이라고 하는 사람이 왔는데, 같은 여관에 묵어서 저절로 안면이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이 묻기를, “그대는 무슨 연유로 객지에서 여러 날들을 묵고 죄수는 어떤 죄수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형은 죄가 없이 잡혀서 몇 달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관찰사에게 부탁을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죄인 김아무개를 풀어주면 가져오는 것도 어느 정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관찰사가 화를 내며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