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壬辰, 1892년) 4월 서울 저동(苧洞)의 이근호(李根澔)가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의 일로 견책 받아 고금진(古今鎭)의 손몽여로 유배되었다. 가을에 여산(礪山)의 조령으로 옮겨져 갇혔는데, 길을 떠날 때 나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여 사양하였으나 기어이 요청하여 어쩔 수 없이 수행하여 동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 이근호가≫ 내게 말하길, “그대의 용모나 자격으로 보아서는 귀하고 현달하고도 남겠는데 누차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굴복하였으나 이것은 주어진 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국가의 과정(科程, 과거를 통해 벼슬길로 나아가는 길)은 근래 이름난 조상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부자가 아니면 청환(淸宦)을 얻지 못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현달한 조상마저도 없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향촌의 후예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빨리 판임(判任, 낮은 벼슬)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기회를 보아서 승직(陞職)하는 것이 도리어 편리할 것이다. 내가 조정에 돌아가 출사하는 날, 이것을 꼭 도모해 볼 테니 잠시 기다리면서 나와 같이 머물러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영감(令監)의 가르침과 아껴 주는 뜻에 대하여 참으로 감격스럽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의 사정이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르기가 어려운 것은, 팔십 난 모친의 숨결이 문득문득 막히고, 갚아야 할 빚이 능과 같이 많았으며, 집이 서울과 천 리나 떨어져 있기에 늘 주저하여 마지않았던 것이다.
계사년(癸巳, 1893년) 정월, ≪ 이근호가≫ 나에게 상경(上京)하라 이르고, 그의 아우 근형(根瀅)에게 가서 기회를 보아 조정의 논의[朝議]를 살펴보게 하고 오라고 하였다. 나는 서울에 들어가 먼저 신의(申醫) 김소사(金召史)를 방문하여 치료비조[病費零條]로 계산하여 갚아 주고[計報], 도성으로 들어가 근형(根瀅)을 보고 그 형의 글을 전하였다. 그렇게 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남북촌(南北村)의 친구들과 서로 어울려 잘 지냈다.
2월 초8일, 세자의 회갑(回甲)을 맞이하여 여산(礪山)에 갇혀 있던 이근호(李根澔)를 사면하여 방면하라는 처분이 내렸다. 나 상철(相轍)은 국자등(國字燈) 이호준(李鎬俊)의 과등(科燈): 명호이다)에게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나아감)하여 관광을 하고 나서 낙제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이태(李台, 이근호의 높임말)의 밝은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과거를 단념하였는데, 전날 쏟은 허다한 노력이 헛되었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막심하였다. 나르던 새가 이미 권태로워 옛 고개를 바라보고 깃들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걸 지워 버리고 돌아가려고 숭계(崇階)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때 남쪽에서 온 소식을 들었다. 동학(東學)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하니,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등에 짐을 지고 돌아왔다. 때는 이미 매미가 우는 철이었다. 고향에 이르러 본즉 동도(東徒) 수십 명이 청동댁(淸洞宅)을 뒤져 쌓아 둔 구실[儲租] 30석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서울사람[京人]에게 바칠 도조(賭租)인지라, 설혹 있다고 하여도 주인이 있는 곡식이니 스스로 내어주기가 어렵고, 또한 지난 겨울에 냈는데도 지금까지 있는 것은 집안의 양식으로 삼고자 바꾸어 놓은 것이어서 이러한 청을 들어주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어긋나서 서로 대치하기를 여러 날 하였다. 그런데 그 중 서로 친한 자가 있어서 보호해 주었으므로 다행히 빼앗기지는 않았다.
가을에 참판 이범진(李範晉)이 시국을 반대하는 자라 지목되어 혐의를 피하고자 영국영사관(英國營査官, 領事館의 오식)으로 떠날 것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그 댁의 바깥일을 차유도(車有度)라는 자에게 위임하였는데, 처종형(妻從兄) 박영헌(朴永憲)이 차유도를 정부인(貞夫人) 조씨(趙氏)에게 소개하여, 나 상철(相轍)이 관계했던 마름(舍音, 서기)을 맡아서 내려오게 했다. 이 사람은 어질지 못하고 덕이 없었다.[已所領略▣苽葛-一字 탈락으로 의미 불통] 짐짓 형제와 같은 사람을 버리게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이 의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서로 따지지 않고 좋은 뜻을 가지고 전해 주었는데 무자(戊子)에서 계사(癸巳)에 이르는 6년간의 추기를 청산하니 축낸 돈이 4천2백 냥이었다. 달리 청산해 줄 도리가 없어서 거주하고 있는 집터[家垈]와 논[水畓] 17마지기, 밭[田土] 35마지기를 모조리 내어주고 계산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니 늙은 모친과 처자식들은 의탁할 곳이 없었다. 동학(東學)은 곳곳에서 창궐하여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한스러운 후회가 막심하였다. 마음속으로 자진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노모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