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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김상철이력행장
일러두기

갑오년(甲午, 1894년) 2월 20일. 위로는 노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거느리며, 완도(莞島) 불목리(佛目里)의 선산(先山) 곁 아래로 들어갔다. 흉년이 든 뒤 동란(東亂)에 휩쓸려 토지와 가옥이 아주 쌌다. 초가 네 칸과 밭 30마지기에 대금 40원을 주고 매수하여 들어가 살았다. 그리고 논농사는 영불(永佛) 양평(兩坪)의 초시 박영희(朴永憙)가 소유한 50여 두락을 소작과 마찬가지로 힘에 따라 갈아 먹기로 하였다. 처음 새로 싹이 나온 것은 제대로 모양을 이루었다.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논밭 두둑 사이에서 늦게까지 살았다. 그러나 6월 들어 몹시 가물었다. 우물을 파고 바가지로 물을 퍼 대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애써 일하였다. 대야리(大也里)에 일이 있어 걸어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데, 남정네와 부녀자들이 문학서(文學西)의 야점(野店) 안에 둘러서 있었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처량하게 애걸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쏠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동도(東徒) 50여 명이 각자 긴 말갈기의 말을 타고 황대익(黃大翊)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조총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유혈이 낭자하였고, 곧 기가 끊어질 듯하였다. 그런데 황대익은 나의 죽마고우였다.

≪ 나 상철은≫ 사람들을 밀치고 속으로 달려들어 그 수좌(首座)에게 말하길, “인명은 소중한 것인데, 이 무슨 악형(惡刑)이오? 죄가 있다면 반드시 도소(都所)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지, 사사로이 악형을 가하는 것은 반드시 의리가 아닌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을 대어 결박을 풀었다. 이때 흉악한 저들 적도(賊徒)들이 나는 듯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를 결박하여 악형을 가하는데, 의관(衣冠)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지 못하겠고, 혼은 몸에 붙어 있지 않는 듯했다. 황대익이 당한 고초는 나에 비하면 오히려 덜하였다.

악독한 형벌[毒刑]은 황대익의 집[黃家]에서 뇌물을 바치고 애걸하는 바람에 더욱 극심해졌다. 이때 건장한 한 장정이 우뚝 성처럼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질러 말하길, “뒷일은 내가 감당하겠소. 그대들 여러 사람은 힘을 합쳐 이 무리들을 때려 몰아내 이 급한 지경을 풀어 줍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리석은 저들 벌레 같은 놈들이 모두 도망쳐 피신하였다.
날이 이미 어슴푸레해졌을 때 비로소 결박에서 풀려났다. 스스로 몰골을 살펴보니 분통함이 치밀었다. 저들한테 달려 들어가, 그 중 심했던 놈 두세 사람을 차고 때린 후 도주하였다. 저들이 쏘는 총의 탄환 소리가 머리 위로 슉슉 하였다. 이러다가는 반드시 화를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친 풀 속에 엎드려 있었더니 저들 무리가 달려들어 붙잡아서는 더욱 결박을 단단히 하면서 말하길, “이 사람은 도소(都所)에서 처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이 깊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는데 횃불이 하늘에 걸쳤다. ≪ 저들이≫ 나의 머리털을 풀어 말꼬리에 묶고, 채찍은 말안장에 걸쳐 두었다. ≪ 나는≫ 손이 묶인 것을 스스로 풀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잘 드는 칼을 꺼내 말꼬리를 잘랐다. 돌을 들어 말을 타고 있는 놈을 쳤다. 떨어진 놈을 걷어차고,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쳤다.

먼저 달려서 집에 도착한 뒤 소와 기물들을 이웃집에 감추었다. 불후의 선산에 올라 바라보니, 횃불은 별빛처럼 빛났고 포성은 하늘을 뒤흔들었다. 동네로 향해 들어가니, 살던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일대 난리를 겪는 중이었다. 저들은 내가 이 마을에 산다는 것을 모르고 곧바로 원동리(院洞里)로 향하여 갔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장 배와 노를 갖추고, 급히 본진(本鎭)으로 갔다.
이때 진장(鎭長, 진의 우두머리)은 강진병영(康津兵營)의 명선욱(明瑄昱)였다. 아침이 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가 들어가 어제 봉변을 당한 연유를 고하고, 상처 입은 곳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진장이] 불쌍히 여겨 곧바로 보고문을 써서 전주병영(全州兵營)으로 발송하였다.
3일째 되는 날, 병영(兵營)의 지령(指令)이 있었는데, “완도(莞島) 지방에 몰려 있는 동학(東學)들을 모조리 결박하여 병영의 뜰로 끌고 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鎭)에서 힘 있는 장정 50명을 모집하여 각자 기계(機械)를 들고, 배를 타고 노화도(蘆花島)로 갔다. 옥석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결박하였다. 그들을 싣고 진포(鎭浦)에 이르렀는데, 60여 무리였다. 그들 중 반쯤 죽은 상태에 빠진 자들이 태반이었다.
한꺼번에 형틀을 씌워 엮어서 군문(軍門)의 좌우에 꿇렸다. 나에게 심하게 해를 가한 놈을 지목하여, 그 주둥이를 두드리면서 말하길, “너의 성이 무엇이냐?” 하였다. [그놈은] 말이 분명치 않게 “아아” 하면서 “황(黃)”이라 하였다. 나머지 무리들이 나를 보고는 어깨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낭자하였다. [내가] 꾸짖어 말하길, “너희 무리들이 다시 몰려서 양민들을 괴롭힐 것이냐?” 하였다. 그중 한 놈이 애걸하면서, “다행히 살려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개과천선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일이 취조하여 죄가 가벼운 놈은 석방하고, 무거운 놈은 병영의 뜰[營庭]로 압송하였다.

사람은 반드시 안회(顔回)와 민손(閔損)의 착한 행위를 본받을 것이요, 계목(季牧)의 호방함과 어그러짐[豪悖]을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 나≫ 상철(相轍)은 [季牧을] 본받아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화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어리석고도 어리석음이 이와 같이 극심하단 말인가? 오늘에 이르러 생각하니, 후회함이 막심하다. 본심이 들뜨고 거친 천성을 타고났으니 어찌하리오? 그런데도 이 동학(東學)들은 종종 출몰하여 진(鎭)과 촌(村)의 우환거리가 되고 있다.

주석
전주병영(全州兵營) 전라도 지역 방어를 맡은 무남영.
안회(顔回)와 민손(閔損) 안회(顔回)와 민손(閔損)은 공자(孔子)의 제자들로 덕행이 뛰어났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 子游·子夏.“라는 내용이 있다.
계목(季牧) 계(季)는 공자(孔子)의 제자 중 씩씩하였던 계로(季路, 子路)를 가리키는 듯하다. 계로는 벼슬을 해서 목(牧)이라 표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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