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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김상철이력행장
일러두기

을미년(乙未, 1895년) 가을, 감사(監司) 이도재(李道宰)가 서신을 보내어 ≪ 나≫ 상철(相轍)을 초청하였다. 곧 일어나 나가 알현하니 일러 말하길, “내가 고금도(古今島)에 귀양 온 지 10년, 풍토가 아름다우나 거주민들은 의뢰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읍속(邑屬)이 출몰하여 섬에서 끼친 폐해가 막심하였다. 참으로 절통하고 가증스러웠다. 그래서 하늘이 개어 맑은 날[天霽日朗, 간신들이 물러난 날]을 기다려, 각의(閣議, 내각의 회의)에 계달(啓達, 의견을 아룀)하여, 진(鎭)을 폐하고 군(郡)을 설치하여, 이런 병폐를 제거함으로써 거주민들을 편안케 할 것인 바, 내가 먼저 맹서하노라. 지금 이렇듯 고달픈 남쪽 변방의 사정을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시행하라는 영이[▣▣依施之令] 내려지면, 새로 군무(郡務)와 군수(郡守)를 설치하여 뜻이 있는 인사들을 모아 잘 조직하여 나의 본뜻을 이루고자 하노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분부에 따라 힘써 행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인사를 고하고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강진(康津)에서 집강(執綱)의 소임을 맡긴다는 체지(帖紙)가 나왔다. 즉시 가서 돌려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황학래(黃鶴來)를 시켜 집행(執行)하라 천거하였다.

병신년(丙申, 1896년) 봄, 감사(監司)가 학부대신(學部大臣)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갔다.

4월, 군수(郡守) 이규승(李圭昇)이 수레에서 내려 먼저 찾아 주셨다. 그래서 나아가 뵙고 교제하였다. 연세는 이순(耳順)이었다. ≪ 이규승은≫ 자질과 성품이 일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편안하고 고요히 지내는 것에 힘을 쏟았다. 얼마 있다가 부근의 황학래(黃鶴來)·민영묵(閔泳默) 등 여러 사람이 동의하여 이방(吏房)을 이귀하(李貴夏)에게 주고[稟差], 통문(通文)을 소속된 섬에 돌렸다.

5월 15일, 객사(客舍)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10개의 조목을 제출하였다.
 첫째, 관사(官舍)는 합당한 곳에 지어야 한다.
 둘째, 정원(定員)을 각 섬에 보내어 답사한 후, 결호(結戶)를 바로 잡아야 한다.
 셋째, 향교(鄕校)는 좋은 터에 건축한다.
 넷째, 공해(公廨)와 향교(鄕校)를 건축하는 데 드는 재목과 기와 등의 비용은 경거정원(京去定員)에게 청구한다.
 다섯째, 강진(康津)·해남(海南)에서 먼저 거두어 간 결호(結戶) 대금(代金)은 환수 추징하여 상납한다.
 여섯째, 각 섬의 고기잡이와 미역의 세금(稅金)은 전례(前例)에 따라 거두어들여 폐단을 구제한다. 이는 이청(吏廳)이 이때 거듭해서 관청에 보고하고, 이웃 읍의 이방에게 청하여 대리한 까닭이다.
 일곱째, 효렬(孝烈)·은일(隱逸)·학행(學行)으로 탁발한 행적이 있는 자들을 포창(襃彰)해 드러낸다.
 여덟째, 각처에 있는 지방도로를 수리하여 표석을 세운다.
 아홉째,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고 어린이들을 품어 주며, 토호(土豪)의 무단(武斷) 행위 등을 금한다.
 열째, 면장(面長)과 이서(吏胥)는 물의(物議, 뭇사람의 평판)에 따라 임용한다. 고을의 도유사(都有司)는 우선 김상철(金相轍)을 망정(望定)하고 경거정원을 겸임하게 한다.

주석
체지(帖紙) 관아에서 구실아치와 노비를 고용할 때 쓰던 사령장(辭令狀).
경거정원(京去定員) 경거(京去)는 경거(京居)의 오식으로 보인다. 곧 경주인(京主人)처럼 서울에 거주하면서 고을의 일을 보는 사람을 말함.
도유사(都有司) 향촌의 사무를 관장하는 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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