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군전주서 박봉양경력서 [雲峰郡前注書 朴鳳陽經歷書]
봉양(鳳陽)은 보잘것 없는 시골사람으로 상(喪)을 당하여 여막에 거처하며 외부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 지난해 비류(匪類)들의 소요로 몹시 혼란하여 일도(一道)가 분탕되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습니다. 저들 무리들의 정황을 들으니 적괴(賊魁) 김개남(金介男)·이사명(李士明)·유복만(劉福萬)·남응삼(南應三) 등이 남원(南原) 토비(土匪) 김홍기(金洪基)·김우칙(金禹則)·이춘종(李春宗)·박정래(朴定來)·박중래(朴仲來)·김원석(金元錫) 등과 협동하여 성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서로 연결하고 또 떠들썩하게 세를 과시하며 급히 운봉장영(雲峰將營)을 빼앗아서 영남(嶺南)을 유린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공허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황이 확연히 드러났으니 참으로 애통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성(彛性)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격분이 되어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해 7월 26일에 궤연(几筵)에 곡을 하여 아뢰고 뜻을 같이 하는 족당(族黨) 30여 명과 가동(家憧) 수십 명을 불러 모아 도적을 막자는 단순한 계책을 언급하자 모두들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초기의 엉성한 모습이 갖추어졌습니다. 경내의 사민(士民)들에게 두루 알리자 며칠이 되지 않아 즐거이 달려온 자가 도합 1,200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나누어 보내어 남원 경계의 요충인 여원치(女院峙)·입망치(笠望峙)·유치(柳峙)의 세 길목을 굳게 지켰습니다. 뒤이어 증가된 인원까지 합치니 총 5,011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100리의 협로에 적도(賊徒)들이 노리는 곳이 모두 37군데였습니다. 그래서 지형의 중요도를 헤아려서 민정(民丁)을 뽑아 보내고 방어 장비를 고루 배치하였습니다.
이즈음에 본 군(郡)의 군수(郡守) 이의경(李義絅)은 길을 재촉하여 8월 22일에 부임하였습니다. 부임하는 당일에 먼저 각처의 방비에 대하여 묻고는 수성(守城)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반 사무를 충분히 토의하여 조치하고 엄격하게 신칙하고 위무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몸소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술과 고기를 나누어주고 날마다 식량을 지급하여 그들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바칠 생각을 가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를 정탐하니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 근심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남의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서 와서 도와주기를 요청하였으며, 또 본 관(官)에서 영영(嶺營), 경상감영과 촉영(矗營), 경상우병영에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먼저 인접한 함양군(咸陽郡)에서 창포군(砲軍) 150명을 뽑아서 보내왔기에 본 읍의 수성군(守城軍)에 합세시켜 군사훈련을 하였습니다.
9월 17일 한밤중에 군의 서쪽 10리 떨어진 남원 경계 방아치(方峨峙) 위에 수십 명의 적도들이 경계를 침범하였다는 경보가 갑자기 날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수하 100여 명의 포창군(砲鎗軍)을 데리고 힘차게 돌격하여 우선 마주친 거괴(巨魁) 임창순(林昌順)을 베고 교전을 하고 있을 때 본관 이의경이 수성군과 함양의 원병을 거느리고 급하게 달려와 합세하여 총을 쏘고 화살을 날려 적도를 10여리 밖으로 몰아내었습니다. 이때 총탄과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17명이었으며 부상을 입고 달아난 자는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 가운데 총탄에 맞아 죽은 자는 1명이었고 부상자는 20명이었습니다. 가파르고 험한 길에서 궁지에 몰린 적을 추격하지 말라는 교훈이 갑자기 떠올라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서 본군을 지켰습니다. 이때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저를 참모관(參謀官)으로 차출하였으며, 이어서 기복(起復)하여 전쟁터로 나가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에 마음이 놀라고 움츠러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단지 놀랍고 두려워하며 힘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보답할 생각만 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20일 경에 이르러 남원에 거주하는 전 군수 양한규(梁漢奎), 선비 장안택(張安澤), 정태주(鄭泰柱)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府), 남원부의 성은 적괴 김개남의 근거지가 되어 머물고 있었습니다. 저놈들이 지금 이미 전주(全州)로 출발하였으니 이때에 귀 읍의 의사(義士)들이 부대를 나누어 성에 와서 수비하면서 새 수령이 부임하기를 기다리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접한 지역을 서로 구원하는 도리에서 차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하기로 허락하고 24일로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창포군 2,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그 부의 성에 도착하니 김개남의 대부대가 과연 이미 철수한 뒤였습니다. 성에 남아 있던 무리들의 숫자가 얼마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성에 있던 관리와 백성들 남녀노소가 울부짖으며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운봉의 의병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성의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을 보전할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진영을 두고서 약간의 토비를 잡아서 다스리고 적도들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곡식의 수효를 맞추어서 본부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에게 맡겼으며, 염려하지 말고 성을 지키라고 이르는 곳마다 효유한 뒤에 군사를 지휘하여 돌아왔습니다.
그 후 며칠이 되지 않아 적괴 유복만·김경률(金京律)·남응삼·김홍규(金洪奎)·김우칙·이춘종·김원석 등이 적당을 거느리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각 방(坊)의 곡물과 짚신·목면·담배·피물(皮物)·죽물(竹物) 등을 많이 빼앗아서 각 청(廳)에 쌓아두었습니다. 또한 상인들의 포백(布帛)을 강제로 빼앗아 새로 깃발과 군복을 만들어 다시 기세를 떨치며 장차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향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누가 간담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송연해지지 않겠습니까. 이에 적의 상황에 대한 정탐꾼의 보고에 따라 방어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11월 13일에 군의 서쪽에 있는 관음치(觀音峙)의 방수장(防守將)인 전 주부(前主簿) 정두회(鄭斗會)가 와서 말하기를, 고개 아래 남원 산동방(山東坊) 부동촌(釜洞村) 앞에 성에서 나온 적들이 많이 모여서 장차 우리 경계를 넘어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원부사에게 알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수성군과 방어군 2,000명을 뽑아서 데리고 14일 축시(丑時, 오전 1시~오후 3시) 쯤에 관음치 정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인 후에 높은 곳에 올라 정찰을 하니, 부동촌 앞에 모인 적도 중에 담양(潭陽)의 남응삼과 남원의 관노(官奴) 김원석 등이 그들 무리의 각 포(包)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저들의 이른바 접주(接主) 무리들이 전대(前隊)와 후대(後隊)를 조직하여 노비와 사령 및 무부(巫夫)들과 함께 깃발을 펼치고 크게 나팔을 불고 음악을 연주하며 태연히 산으로 올라와서 본 고을의 경계를 침범하니 그 세력이 대단하였습니다.
만약 아군이 산을 내려가서 적을 상대한다면 길이 험하고 비탈이 가팔라 돌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나누어 반은 산 위에 머무르면서 뒤에서 응원하도록 하고 반만 통솔하여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먼저 교전을 펼치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천천히 군사를 이동시켜 점차 산으로 올라가며 몰래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본 경내의 요해처에 다다른 뒤에 급히 아군의 발걸음을 돌려서 탄환을 쏘면서 교전하였습니다. 또 뒤에서 호응하는 군사로 하여금 남쪽과 북쪽의 꼭대기를 에워싸고 돌과 화살을 퍼붓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좌우에 잠복한 병사들이 임시로 만든 목대완구(木大碗口)를 발사하여 저들 무리들을 많이 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끝내 저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더욱 날뛰었습니다.
그래서 11월 14일 인시(寅時, 오전 3~5시)부터 15일 진시(辰時, 오전 7~9시)까지 교전하는 동안 곧바로 평정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같이 싸우는 사졸들과 하늘을 가리키며 맹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단검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며 전진하여 눈앞에 닥친 저들의 괴수인 이용우(李用右)·박중래·고한상(高漢相)·조한승(曺漢承)·황경문(黃京文) 등 다섯 놈을 죽이자 적의 기세가 마침내 꺾였으며 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승세를 타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할 때, 구덩이에 빠지고 좁은 길에서 넘어지고 총탄과 화살 및 칼날과 창끝에 목숨을 잃은 자의 숫자를 나중에 계산하였더니 2,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다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개선할 때 적도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수습하니 그 숫자가 상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읍과 마을의 사녀(士女)들이 술과 밥을 가져와서 길을 막고 먹여주었으며 더 이상 후환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가벼운 걸음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 중에서 목숨을 잃은 자가 8명이었으며 부상을 당한 자는 25명이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무리 수천 명을 죽였으나 죽고 부상당한 아군 30여명을 생각하면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를 장사지내고 부상당한 자를 구원할 때 진주(晉州) 전 만호(前萬戶) 윤순백(尹順伯)이 촉영(矗營)의 지시에 따라 원병 2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본군의 수성군에 합류시키고 따로 적의 형세를 살폈습니다.
11월 24일에 남원 송내촌(松內村)의 김원집(金元執)과 양상렬(梁相烈)이 그 부중(府中)의 적의 형세를 살피고 와서 말하기를, “지금 성 안에 모여 있는 적 이사명·유복만·김경률·김홍기·김우칙·이춘종·이춘흥(李春興)·권일선(權一先)·김원석·최진악(崔鎭岳)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장(大將)을 자칭하는 중놈 등의 무리들은 4,000명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 유복만은 운봉의 군세(軍勢)가 매우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일전에 그 무리 300여 명을 데리고 곡성(谷城) 길로 출발하였습니다. 그 밖의 근 1,000명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러 각 마을로 흩어졌으며 성에 남아있는 자는 3,000명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틈을 타서 토벌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적들이 반드시 날마다 모여들어 그 세력이 점차 커져서 끝내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본군의 군수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군의 서쪽 불선치(佛仙峙)로 출발하였다가 다시 남원으로 길을 돌려 부동촌 뒤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남원 동쪽 10리 떨어진 남평촌(藍坪村) 앞에 이르러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식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때 본군 유치(柳峙)의 방수장 오재언(吳在彦)의 급보를 받아보니, 장수(長水)의 비괴(匪魁) 황내문(黃乃文)이 무리를 이끌고 유치 아래의 반암(磻巖)가는 길에 와서 관음치 전투에서 패배한 잔당과 합세하여 길가의 시골마을과 원근의 산록에 불을 지르고 바야흐로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 군수는 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임지로 돌아가고 봉양은 군사를 재촉하여 길을 되돌아가 곧바로 번암방(蟠巖坊) 원촌(院村)에 이르렀으며,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의 무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창졸간에 교전하여 저들의 무리 21놈을 때려죽이고 36놈을 사로잡자 나머지 무리들은 산과 들로 달아나서 장수 경계의 두메산골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수습하여 호궤하였습니다.
28일에 군사를 통솔하여 바로 남원부 동문 밖 5리 떨어진 빈 들판에 도착하여 군인들에게 새벽밥을 먹도록 한 후에 방천 뒤의 울창한 숲속에 잠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일을 함께 도모하는 여러 명과 더불어 산 위에 올라가서 성내 및 원근의 적의 형세를 관찰하니, 그 부(府)의 남쪽 3리 떨어진 애현(艾峴) 위에 흉도 수백 명이 모여 있으면서 성 안의 적과 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군(砲軍) 100여 명을 나누어 배치하여 총을 쏘면서 몰아내니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갔습니다.
군사를 지휘하여 네 갈래로 나누어서 세 갈래는 동·서·북쪽의 세 문의 바깥에 매복하게 하고 한 갈래는 바로 남문 밖으로 들이닥쳐 적의 무리들을 자극하여 나와서 싸우도록 하였습니다. 적은 감히 나오지 못하고 성 위에 늘어서서 돌을 날리고 총을 쏘니 아군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남문 밖의 민가에 몸을 숨기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총을 쏘자 저들 무리들은 상황이 다급함을 보고는 횃불을 아래로 던져 불길이 인가로 번졌으니 그들의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신시(申時)에 이르러 그의 아들 양준(良俊)과 흥준(興俊) 및 포군들과 함께 장작을 안고 불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성문 아래로 돌진하여 한편으로 불을 놓고 한편으로 민가에서 나무사다리를 찾아내어 가져가서 성에 기대어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군사들이 개미떼처럼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쏘자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또 동문과 서문의 두 문에서 불길이 치솟자 저들 무리들은 급히 북문을 열고 도주하거나 혹은 성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당시 날이 이미 캄캄해져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힘들어서 즉시 군사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들 무리들이 성 안에서 흩어져 달아날 때 칼날과 총탄에 쓰러진 자가 30여 명이었으며 사로잡힌 자가 100여 명이었습니다. 사실을 조사하여 괴수 표자경(表子景)·최진철(崔鎭哲)·고량신(高良信) 등 8놈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라온 자들이었기 때문에 곤장을 쳐서 풀어주어 귀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아군을 점검하니 총탄에 맞아 사망한 자가 5명이고 부상자가 84명이었습니다. 사망자는 시신을 메고 와서 장사지냈으며 부상자는 약으로 치료하였습니다. 그대로 며칠을 머물면서 부민(府民)들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군사를 철수할 생각이었습니다.
읍과 시골의 백성들이 밥과 술을 가져와서 다투어 군사들을 먹이면서 성을 되찾아준 노고에 감사하고 도망간 적들을 잡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궁리하고 탐색하였는데 그 부(府)의 사인(士人) 김택주(金澤柱)·오주영(吳柱永)이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적을 잡을 계책을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12월 3일에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전주(全州)에서 와서 소인배들의 참언을 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니 서로 용인하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부의 모든 일을 경군(京軍)과 일본군에게 맡기고 부의 남쪽 40리 지점의 산동원(山洞院)으로 군사를 이동시켜 구례(求禮)와 하동(河東)에 있는 동태를 탐색하고자 하였습니다. 같은 달 5일에 일본군 대대장(大隊長)이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군무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나주(羅州)로 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달 7일에 출발하여 11일에 나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서로 만나서 묻고 대답하는 도중에 갑자기 화를 내면서 결박하여 구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원통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수감되었습니다. 섣달 그믐날에 경사(京司)로 압송되었으며 서울에서도 석 달 동안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재판을 거쳐 을미년 3월 29일에 비로소 풀려났습니다. 이어 내부(內部)의 부름을 받아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공무를 보고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의 경력은 이상과 같습니다. 전후에 전투를 하며 함께 공로를 세운 자들과 사상자들 및 획득한 기물 등은 아래에 열거하였으니 참고하십시오. 격식에 따라 증인을 세워 품고(稟告)합니다.
개국(開國) 504년 9월 2일
전 주서이며 양호도순무영 참모관을 역임한 박봉양
입증인 전 군사마(軍司馬) 김응진(金應鎭)
전 군수(郡守) 김정수(金鋥洙)
초비군공조사위원총대군부협판(剿匪軍功調査委員總代軍部協辦) 권재형(權在衡) 각하
함께 공을 세운 사람
전 군사마 김응진, 전 군수 김정수, 전 찰방(察訪) 박봉규(朴奉奎), 전 오위장(五衛將) 박형철(朴烱喆), 유학(幼學) 박량준(朴良俊), 김영춘(金永春), 박흥준(朴興俊), 박봉주(朴奉珠), 전 주부(主簿) 정두회(鄭斗會). 이상은 4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전 영장(營將) 박귀진(朴貴鎭), 유학 박홍조(朴洪祚), 호장(戶長) 박일화(朴日華), 유학 오재언(吳在彦), 한량(閑良) 윤승렬(尹承烈), 최대룡(崔大龍), 이봉권(李鳳權), 이방(吏房) 박광식(朴光植). 이상은 군량을 공급하고 3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전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 1차례 적을 토벌하였음. 남원부에서 포창군(砲鎗軍) 60 명을 뽑아서 일본군과 함께 장흥(長興) 땅으로 갔음.
4차례 적을 토벌할 때 사망한 사람
김무안(金務安), 최암회(崔巖回), 박정민(朴正民), 김영호(金永浩), 박동이(朴童伊), 윤원근(尹元根), 김수용(金水用), 강영문(姜永文), 황권일(黃權日), 김이성(金伊成), 김건지(金乾之), 정종완(鄭宗完), 홍소영석(洪小永石), 이윤용(李允用)
부상당한 군인: 129명
4차례 적을 토벌할 때 획득한 기물
불란구(佛蘭口) 3문 - 본읍의 군기(軍器)에 소속시킴.
양총(洋銃) 4자루 ≪3자루는 본도 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완부(完府), 전라부로 보내고 1자루는 일본군 이등소랑(伊藤小朗)이 가져감≫
천보조총(千步鳥銃) 15자루
조총(鳥銃) 473자루
- 합계 488자루를 본읍의 수성청(守城廳)에 소속시켰는데, 그 중 300자루는 일본군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남원부로 보내고 남은 188자루는 대부분 망가져서 군기(軍器)에 포함시켰으며, 일본 순사가 부수어 매각함.
삼혈포(三穴砲) 3자루 ≪본도 전주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완부로 보냄≫
장전(長箭) 1,300개 ≪수성청에 소속시킴≫
환도(環刀) 31자루
철편(鐵鞭) 22자루
철창(鐵鎗) 55자루
- 이상 3가지는 전투에 참가한 군인에게 나누어줌.
화약 305근
연환(鉛丸) 10말
철환(鐵丸) 3말
- 이상 3가지는 포군(砲軍)에게 나누어줌.
백본차일(白本遮日) 5개
백포장(白布帳) 7개
- 이상 2가지는 옷이 없는 군정(軍丁)에게 나누어줌.
- 이상 8가지는 본군의 군기(軍器)에 소속시켰으며, 일본군과 일본순사가 부수어 매각하였음.
기치(旗幟) 83면
피갑(皮甲) 33벌
피주(皮冑) 39개
- 이상 3가지는 수성청에 소속시켰으며 모두 망가져서 소각함.
방패 55개
- 민가의 풀과 짚, 죽비(竹扇), 사립문 문짝은 모두 소각함.
묘로구(卯爐口) 3개
- 2개는 망가졌고 1개는 온전함. 수성청에 소속시킴
쌀(米), 평말 37석
- 15석은 본 군대의 군량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2석은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두 번째로 남원성을 수복할 때 성에다 내줌.
소 18마리
- 7마리는 경군(京軍)과 일본군에게 내줌.
- 9마리는 본 군대를 먹임.
- 나머지 2마리는 사상자를 위한 위령제와 치료를 위하여 본군에 남겨둠. 남원에서 공문을 보내어 가져감.
말 27필
- 12필은 경군(京軍)이 가져감.
- 5필은 병으로 죽음.
- 7필은 각읍에서 공문에 의거하여 내줌.
- 나머지 3필은 각읍의 공마(公馬)로 파발마로 사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