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재가 전라도를 안렴할 때의 포계 [李道宰全羅道按廉時褒啓]
지난 갑오년에 흉악한 기운이 창궐하여 여러 군이 바람 앞의 초목처럼 쓰러졌으나 유독 운봉의 전 주서 박봉양은 비분강개하여 종중의 재산을 출연하고 문중을 모아 제단을 쌓아 출정의 제사를 지내고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내와 영남에 격문을 돌려 의병 5,000명을 모집하고 이들을 나누어서 38곳의 요로를 방어하였습니다. 최초로 방아치에서 전투를 하여 거괴(巨魁)를 크게 섬멸하였는데 당시 선무사(宣務使)가 그 공을 임금에게 아뢰어 참모관(參謀官)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관음치에서 전투를 하였고 세 번째는 유치의 번암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매번 군졸들보다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을 베고 수많은 무기들을 획득하였습니다.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적을 쫓아 남원 성 아래에 이르러 적의 예봉을 무릅쓰고 먼저 성에 올라 마침내 성을 되찾았습니다. 대개 비적을 토벌한 이래로 이처럼 여러 차례 승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밖에 영남과 호남의 요충을 장악하였으니 적들이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운봉을 지켜낸 덕분이었습니다. 비단 본도에서만 그 업적을 보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백(嶺伯)도 그 공을 아뢰어서 내부 주사에 임명하였으나 시기를 틈 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집에 있으면서 공을 말하지 않지만 영남과 호남에서는 그 공이 알려지지 않고 인멸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은 해당 군을 순시하여 그 전적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창의의 전말을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공적은 우등으로 벼슬과 상을 내려 격려하고 권장하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1900년 경자(庚子) 3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