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甲午年, 개국 503년)
(10월) 완동(莞洞)에서 어떤 사람이 서간(書柬, 편지)을 가지고 왔는데, 시절이 요란하여 뜻하지 않게 신행(新行, 婚行)을 보낸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급한 기별이라 몸소 가서 통기(通奇)[한 내용]을 살펴보고,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5일. 새벽에 비가 내렸다.
아침밥을 먹은 후 두암댁(斗岩宅)에 가서, 신부와 요객(邀客)을 상면했다.
26일. 맑음.
광주(光州) 완동(莞洞)에서 신행(新行)이 도보(徒步)로 왔는데, 이때부터 장정을 내고 가마를 갖추어 점심을 먹여 보냈다. 오후에 어떤 도인(道人) 4~5명이 말을 타고 와서, 군수전(軍需錢) 백량의 표지(標紙)를 가지고 백씨집[白家]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씨가] 사람을 도소(都所)로 보내어, 침범하지 말라는 영지[勿侵令旨]를 받아 모면하였다.
27일. 맑음.
큰집[大宅]에서 양례(襄禮, 장례)를 읍 동쪽[邑東] 구산(九山)의 선산(先山) 금양내(禁養內)에서 올리고, 안조(安厝, 安葬)한 후에 돌아왔다. 듣자니, 고창(高敞)의 접주(接主) 신정옥(申正玉)이 기포(起包)한 이래로 진을 개천시(介川市)에 치고 있다 하고, 한편으로는 진을 단암(丹岩)에 치고 있다고 하였다.
28일. 맑음.
고창접(高敞接)이 본부(本府)로 왔는데, 본촌(本村)에서 점심 4백 개의 밥상을 보내어 바쳤다. 봉연(鳳淵) 선비 송성위(宋聖爲)가 와서 말하길, ‘군수전(軍需錢)을 토색(討索)하는 일을 피하여 왔다’고 하였다. 각 면(面)이나 리(里)마다 소위 량미(粮米)와 군수전(軍需錢)이란 것을 임의대로 내놓으라고 명령하고, 혹은 사사로운 혐의[私嫌]로 침략하는 폐단으로 인해 사람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석양에 고창접(高敞接) 천진명(千陣名)이 진영을 황룡시(黃龍市)로 옮겼다. 오정(梧亭)의 벗 김희서(金希瑞)와 그 아내의 오라버니 정생원(鄭生員)이 같이 와서 유숙(留宿)하였다.
29일. 흐림.
송성위(宋聖爲)와 두 손님이 인사하고 떠났다. 월평(月坪)의 도소(都所)에서 짚신[草履]과 기죽(幾竹)을 본리(本里)에 압류하였다 한다. 어제 신평(新坪)의 김주환(金注煥)과 이이로(李以老)가 쫓겨나 광주(光州)의 대치(大峙)로 갔다고 한다. 이날 오후에 고창(高敞)의 신정옥(申正玉)이 손화중(孫化中)의 급한 기별[急奇]을 듣고 월평에서 돌아갔다고 한다. 어떤 왜선(倭船) 여러 척이 법포(法浦, 법성포)에 와서 정박하였기 때문이었다. 듣자니, 일전에 경군(京軍)과 왜병(倭兵)이 법헌(法軒, 포소)에 방화하여, 거처하고 있던 도인(道人) 중에서 부상자가 무수히 나왔다고 한다. 또한 듣자니, 대장(大將) 홍재우(洪在祐)가 경군(京軍)과 왜병(倭兵)을 거느리고, 전명숙(全明叔)과 더불어 공주(公州)에서 접전을 벌여 도인 여럿이 다쳤다고 한다. 지난 20일, 남원(南原)의 신관(新官)이 전주(全州)에 도착하였다가 도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도인 김개남(金盖南, 盖는 開의 오식)은 남원에서 기포(起包)하여 올라갔다고 한다. 인심의 소요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