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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대(十一月大) 계유삭(癸酉朔)

쌀 1냥은 시장의 되[市升]로 8시식(八尸式)이고, 소금 1말에는 7돈 5푼이었고, 무명[綿] 1필에는 1냥 5돈이었고, 짚풀 값[草價]은 아주 헐하였고[至歇], 온갖 물건 값도 많이 헐하였다.

초1일. 흐리다가 저물어서 비가 내림.

제주(濟州)의 종인(宗人, 같은 족속 가운데서 촌수가 아주 먼 사람) 시언(始彦)이 광주(光州)에서 왔다.

초2일. 맑음.

시언 보(始彦)와 그 같은 종인[同宗人] ▣▣ 보(▣▣甫)가 찾아왔다.

초3일. 흐리다가 저물녘에 비와 눈이 섞여서 내렸다.

시언 보(始彦甫)가 인사하고 광주(光州)로 떠나갔다.

초4일. 맑음.

초5일. 흐림.

오후에 내곽(內郭)에 가서 벗 김성희(金聖希)를 방문하고, 평촌(平村)으로 옮겨갔다가 보지 않고 왔다.

초6일. 맑음.

나주(羅州)로 가려는데, 중간에 가랑비가 내려서 옷이 젖었다. 박산(博山)의 누이 집에 갔는데, 별일 없었다. 점심을 먹고난 후 내동(內洞)으로 돌아가 저물어서야 들어갔는데, 역시 무고하였다. 방곡(防谷)의 역와 어르신(櫟窩丈)이 먼저 와 있었는데, 수일째 머무르고 있다 하였다. 본도(本道)의 신백(新伯, 신임감사) 이도재(李道宰)가 선무사(宣撫使)를 겸하라는 관문(關文)을 이날 나주목사에게 와서 받았는데, 경군(京軍) 5천 병사가 이미 본도(本道)에 다다른즉, 나주(羅州) 역시 군대를 내어 적들을 섬멸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귀화(歸化)하는 자들은 죄를 면해주라는 뜻[贖罪之意]의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도순무사(都巡撫使)는 신정희(申貞熙)이고, 우초토사(右招討使)는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 鍾은 鐘의 오식)이고, 12읍의 군사를 거느리는[統十二邑軍] 좌초토사(左招討使)는 순창(淳昌)군수 이성렬(李成烈, 成은 聖의 오식)이고, 소모사(召募使)는 장성군수 이병훈(李秉勳)이라 하였다.

초7일. 맑음.

해당 읍과 근처의 읍에서 피접(避接, 비접)한 사람들이 내동(內洞)으로 왔는데, 모두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풀고 유숙하였다. 나주목사의 성책(成冊)에 속인(俗人)으로서 또한 귀화(歸化)한 경우는 차례대로 새로 온 대로 [기록]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성군(守城軍) 4~5천 명을 지휘하여 성루(城壘)를 고쳐 쌓고, 장막을 진에다 치며, 포를 성가퀴에 묻어 굳게 지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일전에 지도(池島)에서 대환포(大丸砲) 10자루를 얻고, 또한 천보포(千步砲) 49자루를 군기고(軍器庫) 밑바닥에서 얻었는데,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거듭 나주목사에게 현몽(現夢)하였다 한다.

초8일. 맑음.

인사를 하고 박산(博山)으로 돌아가 유숙하였다. 벗 양경진(梁敬珍)이 와서 밤새도록 다시 횡액을 만난 사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9일.

인사를 하고 떠나 광주(光州) 완동(莞洞)에 이르러 누이 집에 들어가본즉, 적막하게 아무도 없었다. 다른 마을로 피접(避接)하여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이다. 점심을 그 큰집[大家]에서 먹고 곧 돌아왔다. 듣자니, 어제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이 황룡시(黃龍市)에 와서 잔 다음 광주(光州)로 갔다고 하였다.

초10일. 맑음.

죽남(竹南)의 족인(族人) 이경(而景)이 찾아와서 유숙하였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둑을 두어 한가함을 달랬다. 이날 밤 봉연(鳳淵)에서 급한 기별이 왔는데, 당숙(堂叔) 댁에 어떤 도인(道人)들이 와서 토색(討索)하는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일으켜 가서 구해주었다.

11일. 맑음.

이경(而景)이 인사를 하고 떠나갔는데, 『육도(六鞱), 병서』를 빌려서 갔다.

12일. 비.

안평(鞍坪) 웅치(熊峙)의 당숙모(堂叔母)의 양봉(襄奉, 장례를 모심)을 위하여 비를 맞고 갔다. 저물녘에 개어서 안조(安厝, 安葬)하고 돌아왔다. 봉연(鳳淵)의 성위(聖爲)가 와서 유숙하였다.

13일. 비가 가늘게 내렸다.

듣자니, 나주(羅州)의 수성군(守城軍)이 어제부터 북창(北倉)을 진압하였는데, 근처의 접주(接主) 집에 불을 지르고, 새벽에 오중문(吳重文)을 용진산(聳珍山, 광주 나주 사이에 있는 산) 아래에서 쫓아 포성(砲聲)이 우레처럼 크게 울려 그치질 않았고, 오중문은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14일. 맑음.

아버님께서 독감으로 며칠째 자리에 누워 계시니 근심스럽고 답답하였다. 황룡시(黃龍市)에 나가 살펴보니 인심이 소란하였고, 광주 · 나주 접경에는 연기가 구름처럼 깔려 있었는데, 듣자니 이것은 집을 태우는 연기라고 하였다. 그곳의 남녀들은 산으로 오르고 들로 도망쳐서 마치 터진 내가 흐르듯 하였다. 광주(光州) 벽파정(碧波亭)에 거주하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 역시 집이 타버리고 본리(本里)의 용대(用大) 집으로 피접하였다. 방곡(防谷)의 나서방(羅書房)은 대댁(大宅)의 빈집에 와서 살았다. 본읍(本邑)의 도인(道人)이 성을 지키자는 뜻으로 도회(都會)를 열어 잠시 황룡시(黃龍市)에 갔다가 돌아서서 부내(府內)로 들어갔다.

15일.

듣자니, 나주목사가 영장(營將)을 내보내어 수성군(守城軍)이 불을 지른 죄를 몹시 다스리고, 군사를 돌려 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읍(井邑)의 등내접(嶝內接)이 본읍(本邑)의 북면(北面)에 도착하여 앞으로 탈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본읍의 도인(道人)들이 일제히 부내(府內)에서 도회(都會)를 열고, 밤이 이르도록 경비를 서고, 부(府) 인근의 촌(村)에서 호궤(糊饋, 糊는 犒의 오식)하느라 분주하였다. 이날 밤 영광(靈光)의 족형(族兄)이 뿔난 소 1마리[一角者]를 끌고 와서 나에게 먹여 달라고 권하여서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매어두었다.

16일.

원근의 마을에서 대포소리와 함성이 서로 응하며 끊이질 않았다. 듣자니, 어제 새벽에 봉연(鳳淵)의 척제(戚弟) 이생원(李生員)이 도인(道人)들에게 액을 당하여 스스로 목을 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니 심히 놀라웠다. 이날 고창(高敞) 칠암(七岩)의 도인이 본읍(本邑) 제암(霽岩)의 접(接) 수백 명과 더불어 봉연(鳳淵)에서 도회(都會)를 열었다고 하였다. 영신(永申)의 도인(道人) 수십 명이 저녁밥을 먹은 후 도착하여 새로 밥을 해서 보내었다. 새벽닭이 울 때쯤이 되어서 어떤 한 사람이 제각등(祭閣嶝)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주(羅州) 수성군(守城軍)이 방금 광주(光州) 비아산(蜚雅山, 蜚雅는 飛鴉의 오식)에 도착하여 [저들을] 도륙내었다고 한다. 영신(永申)의 도인들은 일시에 일어나 갔다.

17일. 맑음.

부친의 환후로 인해 약을 지으려고 구산(九山)에 가서 감당 어르신(甘棠丈氏)을 찾은즉, 지난 달 고부(古阜)로 이사했다고 한다. 잠시 고모님 댁에 들러 감정을 풀고, 돌아서서 소산(小山)의 박약방(朴藥房)으로 가서 삼소음(蔘蘇飮) 1첩을 지어 왔다. 이것을 쓰고는 효과를 보았다. 인근 읍의 도인들이 황룡시(黃龍市)에서 도회(都會)를 열었는데, 만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본리(本里)에서 아침저녁으로 4백 개의 밥상을 올렸다.

18일. 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가웠다.

본면(本面)의 면임(面任)이 도소(都所)의 명령서[令旨]를 가지고, 경내(境內)의 매 호마다 쌀 1말, 콩 1되, 짚신 2짝씩을 거두어 바치라고 통지하였다. 본리(本里)의 도인들 역시 감히 대접(大接)의 령(令)을 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황룡회소(黃龍會所)에 나아갔다고 한다. 밤에 내린 눈이 온 땅을 덮었다.

19일.

제주(濟州)의 종인(宗人) 시언(始彦)이 어제 저물녘에 왔다가 오늘 인사하고 북면(北面)으로 갔다.

20일. 맑음.

봉연(鳳淵)에 가서 요즘의 안부를 탐문하고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나주(羅州)에서 와서 말하길, “담양(潭陽)의 도인(道人) 이시(李塒)가 선진(先陣)이 되어 읍(邑) 근처에 진을 치고, 최경선(崔卿先, 卿先은 慶善의 오식)이 후진(後陣)이 되어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쳤다. 광주(光州)의 백반석(白班石)이 북창(北窓, 窓은 倉의 오식)에 진을 치고 머물러 있다가, 다음 날 접솔(接率)을 보내어 근처의 마을을 침략하여, 소를 도살하고 돼지를 훔치었으며 닭을 잡아가서 세 종류의 가축이 씨가 말랐고, 베나 옷가지나 그릇 같은 것까지 몽땅 쓸어갔으며, 속인(俗人)에게 형벌을 가하고, 돈과 재물을 독하게 징수하였으며, 부녀자들을 겁박하여 밤낮으로 밥을 해대라 하고, 혹 밧줄과 포대[絆囊]를 만들라고도 하는 등, 멋대로 악행을 저질렀다.”라고 하니, 나주 백성들이 무슨 허물이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런데 도인(道人)들은 호어치(蒿於治, 쑥으로 만든 음식)를 만들어 먹고, 또한 연[紙鳶]을 만들었으며, 각자 고춧가루[苦草屑]를 간직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광(靈光) 사창시(社倉市), 광주(光州) 아산시(鵝山市), 본읍(本邑) 황룡시(黃龍市) 세 곳에서 모인 자들이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눈이 온 데다 누런 안개까지 끼어 사방 산야가 막혔다.

21일.

어떤 사람이 고창(高敞)에서 와서 말하길, 무수한 왜선이 법포(法浦, 법성포)에 정박하여 이미 육지로 올랐다고 한다. 그곳의 남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란하는데, 그 행렬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창시(社倉市)와 황룡시(黃龍市)의 도인(道人)들 역시 이 때문에 일시에 철거하였다고 한다. 부친의 우환으로 인해 개를 잡아 썼고, 벌통에서 꿀을 땄는데 몇 되나 되었다. 이날 밤 큰 눈이 내려 궁도(弓刀)에 가득했다.

22일.

듣자니, 고창(高敞)의 임천서(林天瑞)가 기포(起包)하여 함평(咸平)으로 갔다고 한다. 읍시(邑市)를 둘러보니, 시는 시장이 아니었고, 상점[商旅]은 별처럼 드문드문 하였다[希星]. 도인(道人)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데, 모두 창(槍)과 포수(砲手)뿐이었다. 흥덕(興德) · 고창(高敞)의 도인(道人) 천여 명이 음악을 베풀며 행군하여 나주(羅州)로 갔다. 흥덕(興德)의 대접(大接)은 교동(橋洞)의 고영숙(高永叔)이고, 고창(高敞)의 접수(接首)는 대성(大成)의 홍락관(洪樂寬)이라고 한다. 앞 가게에서 읍인(邑人) 총각[椎角]을 보았는데 듣자니, 전명숙(全明叔)이 다시 패진(敗陣)하여 전주부중(全州府中)으로 퇴각하여 둔을 치고, 경군(京軍)과 왜병(倭兵)이 여산(礪山)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23일.

연일 큰 눈이 내려서 산과 들을 하얗게 덮었다. 식전에 도인(道人) 6~7명이 갑자기 사랑(舍廊)으로 들어와서 요기를 시킨 뒤에 보냈다. 듣자니 전명숙(全明叔)이 4차례 패진(敗陣)했다고 한다.

24일. 맑음.

석양에 고부(古阜)의 도인(道人) 3백여 명이 깃발과 장대를 본리(本里)에 세웠는데, 그들을 먹이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정읍(井邑)의 슬내접(膝內接)과 고창(高敞)의 대성접(大成接) 수천 명이 본읍(本邑) 읍내(邑內)와 유탕리(流蕩里)에 진을 치고, 며칠이 지나도 가지를 않아 호궤(糊饋, 犒饋)하는 데 갈등이 생겼다. 고부(古阜) 사람에게 들으니, 혹자는 전명숙(全明叔)이 6차례 패진(敗陣)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9차례 패진하였다고 하는데, 접솔(接率)이 거의 몰살되고[闔沒], [전명숙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도 패진하여 남산촌(南山村)에서 거의 몰살되었다고 한다.

25일. 맑음.

날씨가 다소 풀렸다. 도인(道人)들이 나주(羅州)에서 패전하여 인근 읍으로 흩어져 도망친 자들이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는데, 마치 내가 터진 듯하였다. 고창(高敞)의 신정옥(申正玉)은 이달 15일부터 도소(都所)를 황룡시(黃龍市)에 설치하고, 군량미를 각 면(各面)과 각 리(各里)에서 징집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26일.

동짓날이다. 날씨는 맑고 따뜻하였다. 고부(古阜)의 도인(道人)들이 이틀이나 머무르다가 오늘 비로소 떠났다. 저녁에 콩죽 다례(茶禮)를 가묘(家廟)에 올렸는데, 아침에 허다한 도인들을 지공(支供)하느라 분주하고 바빠서 [다례를 올리는 데는] 형편에 따라 할 뿐이었다. 외연(外硯)의 심서방(沈書房) 자중(自重)이 서울에서 내려와 유숙하면서 말하길, “민영준(閔永俊)이 왜인(倭人)들을 불러들여 6월 21일 궁궐을 범하는 변란[犯闕之變]이 있었고, 이로 인해 왜인들과는 형제(兄弟)의 관계를 약속하였으며, 드디어 청나라 조정[淸朝]과는 틈이 생기게 되어 원대인(袁大人, 袁世凱)이 차츰차츰 군사를 거두어 갔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나가는 자들은 모두가 개화 쪽 사람들로서, 오직 재능만 있으면 등용되어 지역이나 문벌에 구애받지 않았다. 삼태(三台, 삼정승) · 육경(六卿, 육판서)제도를 혁파하고 새로 10아문(十衙門)을 설치하여, 국정(國政)의 대소사는 모두 여기에서 처리하였다. 과거(科擧)는 시행하지 않고, 장보(章甫, 儒者들이 쓰던 冠)를 바꾸어 좁은 소매의 두루마기[狹袖周衣]만 남기고, 단지 제사를 거행할 때만 도포(道袍)를 입게 하였는데, 그나마도 저녁때[暮夜中] 잠시 입었다가 곧 벗게 하였다.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경군(京軍)의 진중(陣中)에 들어가 보았는데, 논산(論山)의 접전에서 도인(道人) 중 죽은 자들이 과연 수천 명이었고, 통사(通使) 이두홍(李斗弘)에게 침탈하지 못하게 하여, 군중에서 위험을 벗어나 빠져나왔는데 왜인(倭人)이 선봉(先鋒)이 되고 경군(京軍)이 후진(後陣)이 되어 도인 군진과 붙어서, 그들을 도륙내었다. 그 외 행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지나는 읍마다 령을 내려 깨우치고, 백성들을 안정시킬 뿐이었다. 22일에는 경군(京軍)이 전주(全州)의 삼리(三里)로 들어갔다. 24일에는 전명숙(全明叔)이 진을 원평(院坪)에 머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의 백씨(伯氏) 덕행(德行) 형님이 밤이 깊어서 찾아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27일. 맑음.

두 손님이 인사하고 무장(茂長)으로 떠나갔다. 듣자니, 그저께 경군(京軍)이 원평(院坪)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광주(光州)에서 와서 말하길, 손화중(孫化中)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덕산(德山)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경선(崔卿先, 卿先은 景善의 오식)과 이시(李塒)는 다 나주(羅州)에서 혼비백산하여 다른 읍으로 도주하였으며, 오중문(吳重文)은 패전하여 달아나면서 본읍(本邑) 남사면(南四面)에 폐를 끼쳤다고 하였다. 석양에 구산(九山)의 고모부를 찾아뵙고, 몇 마디 나누다가 돌아왔다. 삼덕이 나주에서 와서 말하길, 박산(博山)은 온 마을의 남녀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였다. 형군(荊君, 아내)이 덕조(德操)를 데리고, 친당(親堂, 친정집)을 찾아뵈었다.

28일. 맑음.

부내(府內)에 들어가서 오위장 손학여(孫鶴汝)를 뵈었는데, 이야기가 읍촌(邑村)을 안존(安存)시킬 계책에 이르자 세 공형(公兄, 고을의 아전인 이방, 호장, 수행리)은 다 관청을 비우고 피하려고 하였다. 만약 과연 그와 같이 한다면 읍내나 바깥의 고을들은 부지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29일. 맑음.

그저께 이웃 고을 정의(旌義)에 거주하던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랑(舍廊)에 머무르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그는] 나이 마흔 둘인데, 처자식과 그 종형부자를 거느리고 흘러왔다고 하였다. 오후에 부내(府內)의 강순화(姜順化)를 찾아보았는데, 순화가 술을 시켜 대접하였다. 태인(泰仁)에서 패전한 도인(道人)의 말을 듣자니, “27일 새벽에 경군과 왜군이 전주부중에서 소토령(蘇土嶺)을 넘지 않고 금구(金龜, 龜는 溝의 오식) 경계를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을 때, 원평(院坪) 도인들의 진[道陣]을 덮쳐 불의에 도륙을 내니, 도인들 중 부상을 입은 자들이 수백 명이었고, 살아남은 자들 수만 명은 일시에 내가 터지듯 흩어져 도망쳐서 진을 태인읍(泰仁邑) 뒤 선앙현(仙央峴)으로 물렸다. 그런데 그날 경군(京軍)이 추격해와 접전을 벌였는데, 도인들 진영이 또 패하여 부상을 입은 자들이 무수하였고, 목숨을 건져 도망친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전명숙(全明叔)은 겨우 몸만 빠져 나갔다. 경군(京軍)은 4~5백 명에 불과하였는데, 지나는 읍마다 전연 폐를 끼치지 않았고, 놋화로[銅爐器]를 싣고 다니면서 스스로 불을 때어 밥을 해먹었다. 전주성(全州城) 밖, 주 접주(朱接主)의 집을 태우고, 원평(院坪) 도소(都所)를 태웠으며, 태인(泰仁) 동동(東洞)을 도륙내었으나, 그 외에는 한 사람도 살해하지 않았다. 패전한 도인(道人) 수백 명 중 본읍(本邑)을 지난 자들은 거의 모두가 경기(京畿) · 호중(湖中) · 전주(全州) 사람들이었고, 탄환을 맞고 상처를 입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들은 광주(光州) 덕산(德山)의 손화중(孫化中) 진영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30일. 맑음.

듣자니, 그저께 28일에는 경군(京軍)을 태인읍(泰仁邑)에서 호궤(糊饋, 犒饋)하였고, 29일에는 정읍(井邑)으로 행군하였다고 한다. 부내(府內)의 동산(東山) 손오위장(孫五衛將) 집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이방(吏房) 손경숙(孫敬叔), 호장(戶長) 손구홍(孫九弘)이 마침 왔다. 이야기가 경군(京軍)을 맞이할 절차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나왔다. 듣자니, 어제 전명숙(全明叔)은 노령(蘆嶺, 갈재)을 넘어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들어가 왼쪽 산기슭으로 도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경군(京軍)은 정읍(井邑) 등내촌(滕內村)을 태우고, 을치(乙峙)를 지나 용두시(龍頭市)에 이르러 유숙하고, 후군(後軍)은 천원역(天院驛, 天院은 川原의 오식)에 유숙하였다고 한다.

주석
평교간이나 손아랫사람을 부를 때에 성이나 이름 밑에 붙여서 쓰는 말.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 나주에는 수성군의 저지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못했는데 이곳 접주 오권선(吳勸善)은 손화중 최경선과 연합해 여러 차례 나주관아 공격에 나섰으나 끝내 실패했다. 중문은 오권선의 자임.
접솔(接率) 접에 딸린 사람들. 농민군 집강소나 대도소에서 심부름하는 사람. 본디 과거볼 선비를 시중하는 사람들을 일컬었음.
민영준(閔永俊)이 왜인(倭人)들을 불러들여 민영준(閔永俊)은 민영준(閔泳駿)의 오식. 민씨세도의 중심인물인 민영준은 농민군이 민씨 축출을 내걸자 그 대비책으로 청국에 구원병을 요청해서 청군이 출병하게 되었다. 이를 민간에서는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했다고 잘못 이해하였다.
궁궐을 범하는 변란[犯闕之變]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점하고 고종과 왕비를 유폐시키고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개화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를 경복궁 강점 또는 경복궁 쿠데타라 한다.
10아문(十衙門) 1894년 6월부터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했는데 여러 관제를 개편하고 과거제 철폐, 의복제 개정 등에 중점을 두었다.
통사(通使) 이두홍(李斗弘) 장위영 영관인 이두황(李斗璜)을 잘못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두황이 이끄는 군사들은 공주 패전 후 논산에서 전봉준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관군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자 순무영에서 약탈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경군(京軍)이 전주(全州)의 삼리(三里)로 삼리는 전주 입구에 있는 삼례(參禮)의 오류.
전명숙(全明叔)이 진을 원평(院坪)에 전봉준 농민군은 전주에 집결해 있다가 원평으로 진을 옮겨 주둔했는데 이규태 좌선봉진과 일본군에 의해 11월 26일 패전하고 태인으로 이동했다.
태인읍(泰仁邑) 뒤 선앙현(仙央峴) 선앙현은 성황산의 오류인 듯함. 11월 26일 원평에서 태인으로 후퇴한 농민군은 다시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태인 관아 앞 성황산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지막 패전을 하고 분산했다.
원평(院坪) 도소(都所) 금구 원평은 교통의 요지였고 김덕명 · 김인배의 출생지이다. 전봉준이 어렸을 때 살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웃 고을인 태인에 김개남 · 최경선이 살았다. 그런 연고로 1893년 원평집회가 열렸고 집강소 기간에는 이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집강소 대도소를 설치했다고 알려졌다.
전명숙(全明叔)은 노령(蘆嶺, 갈재)을 넘어 입암산성(笠岩山城) 전봉준은 태인전투를 치른 뒤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정읍 입암면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피신했다가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로 갔는데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등내촌(滕內村) 膝內의 오식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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