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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2월 계묘삭(癸卯朔)

쌀은 1냥에 구승(舊升)으로 7푼씩이다.

초1일. 맑음.

식후에 생질녀(甥侄女)를 대면하였다. 그리고 치일(致一)과 더불어 안평(鞍坪)으로 같이 왔다. 듣자니, 나주(羅州)에서 해가 바뀐 후에 비도(匪徒)들이 법에 따라 처형된 자[伏法者]가 백여 명이라 한다.

초2일. 맑음.

초3일. 맑고 따뜻하였다.

죽남(竹南)에 가서 여러 족인(族人)들을 방문하여 과세 후 안부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북창(北倉)의 최서방(崔書房)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뒷목이 뻣뻣한 증상[項症]을 앓고 있었는데, 자리에 누워 초하루를 넘겼다고 한다. 점심을 먹은 후 인사하고 나왔다. 본 수령을 보려 하였으나 북일(北一)의 세미(稅米)를 감봉(監捧)하려고 교촌(校村)으로 가려다가 박산(博山)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은 후 감봉(監捧)할 곳으로 행하였다고 한다. 지나는 길에 잠시 구해(九海)에 들어가서 자동(紫洞)의 족형(族兄)과 내호(乃鎬)를 보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초4일. 비.

면임(面任)이 전령(傳令)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는데, 공답(公畓)이든 사답(私畓)이든 가릴 것 없이 작년에 먼저 잰 것보다 삼분의 일을 감하여 준다는 뜻의 감영의 감칙[營甘]이 준엄하였다.

초5일. 비가 깨끗하게 개이지를 않았다.

염초군(焰硝軍) 7명이 염초(焰硝)를 가루로 빻으려고 와서 묵었다. 오후에 행정(杏亭)의 족인(族人) 문경(文卿)이 교중(校中)에서 찾아와 말하길, 대향(大享, 큰 제례) 때에 예를 설하고 거두는 것을 맡은 집사[設禮及散執事]가 다만 소매가 좁은 주의[狹袖周衣]만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실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어야 할 일이었다. 개탄스럽고 개탄스럽다. 밤에 눈이 내렸다.

초6일. 눈이 대지에 뿌렸다.

문경(文卿)이 인사하고 금평(錦坪)으로 간다고 하였다. 종일 눈보라가 날리는 것이 보통 때와는 달랐다.

초7일. 맑음.

구암(九岩)의 생원 이등림(李嶝林) 어르신이 교중(校中)에서 찾아오시고, 덕산(德山)의 벗 김덕원(金德元)이 찾아왔다가 점심을 먹은 후에 다 인사하고 떠났다.

초8일. 맑음.

경칩(驚蟄)이다. 오후에 진눈깨비가 가늘게 내렸다. 해시(亥時)에 선동(仙洞)이 당고(當故, 부모의 상사를 당함)하였다.

초9일. 맑음.

구산(九山)의 상제 김문백(金文伯)이 내방하여 잠시 있다가 인사하고 갔다. 구산(九山)의 생원 이성숙(李聖淑)이 찾아와서 유숙하였다. 이틀간 자리를 짰는데[織席], 밤낮으로 골몰하여 마쳤다.

초10일. 맑음.

[次錦坪諸友吟 ; 금평 여러 벗들에 이어서 읊음].
亂後相逢誼益深 난리를 겪은 후에 이렇듯 다시 만나니 우의는 더욱 깊어지고,
東風塵垢更無侵 동학도의 바람 불어 일으킨 먼지 다시는 침범치 말아야 하리.
最喜新年生對面 가장 기쁜 일은 신년을 맞이하여 서로 살아서 대면한 것이나,
從知濁世死同心 혼탁한 세상에 죽음으로써 함께한 이들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일세.
佳賓滿座應謀醉 아름다운 손님들 자리를 가득 채웠으니 응당 취하기를 바라고,
明月窺簾愛有吟 밝은 달빛, 드리워진 발 속으로 들어오니 그 달빛 사랑스러워 노래를 읊네.
顧吾行樂伊誰賜 나의 이 즐거움 돌아보니, 어느 분이 내려주심인고?
頌祝黎情自不禁. 임금님을 기리고 축수하는 머리 검은 백성의 마음 금할 길 없어라.
오후에 가랑비가 잠시 뿌렸다.

11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저물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되면서 점차로 빗줄기가 세어졌다.

12일. 흐림.

시장의 소식을 들어본즉 물가는 많이 내렸고, 짚신[草履] · 완골자리[莞席] · 포목(布木)은 매우 쌌다고 한다. 오후에 본면(本面)의 향약(鄕約)을 입약(立約)하는 일로 기산(岐山)에 가서 상의하고 돌아왔다. 내연(內硯)의 진사 반낙중(潘洛中)이 기산(岐山)에서 작고하였다.

13일. 맑음.

순영(巡營)에서 향약장정(鄕約章程) 1권을 내려 보내어 베껴 적었다. 술시(戌時)에 선동(仙洞) 용강댁(龍岡宅)이 변을 당하였다.

14일. 맑음.

해가 바뀌기 전에 경군(京軍)이 끌고 갔던 고창댁(高敞宅)의 소 값 120냥을 관(官)에서 내어주었다.

15일. 맑음.

듣자니, 향교(鄕校)의 서재(西齋, 기숙사)를 교체하는 사단이 있어 물들지 않은 사람에게 새로 붙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일은 은연중에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16일. 맑음.

면임(面任)이 전령(傳令)과 회문(回文)을 들고 와서 보여주는데, 전령은 수성군(守城軍)이 폐단을 저지르는 것을 금한다는 명령이었고, 회문은 유생성책(儒生成冊)에 관한 글이었다. 밤에 비가 내렸다.

17일. 흐림.

상촌(上村)의 벗 공준삼(孔俊三)이 아이가 죽는 근심을 당했다고 한다. 봉연(鳳淵)의 재종(再從) 화삼(華三)이 와서 말하길, 수일 전부터 짓기 시작하여 내일 상량식[上樑]을 갖는다고 하였다. 수탉 한 마리를 사서 갔는데, 값은 1냥 2돈에 불과할 뿐으로 크지는 않은 것이었다. 듣자니, 나주(羅州) 지경에서는 닭 한 마리에 2냥이라고 하였다. 구산(九山)의 산지기 김여중(金汝中)이 들어왔다.

18일. 비.

온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19일. 흐리고 바람이 부는 데다 몹시 추웠다.

본리(本里)의 향약(鄕約)에 입약한 사람들을 성책(成冊)하였는데, 양반이나 상민이나 같이 기재[同案]하고, 다만 분류하여 쓰되, 각자의 나이에 따랐다. 수(袖, 예복)를 내기 약정소(內岐約正所)에 주었고, 본면(本面)의 약정(約正)은 곧 내기(內岐)의 생원 이승환(李升煥)이고, 직월(直月)은 가마(加馬)의 석사 송우룡(宋佑龍)이라고 하였다.

20일. 흐리고 추웠다.

내동(內洞) 위토계(位土契)향교나 서원에서 일정한 토지를 확보하고 그 수확을 제향 등 경비로 사용했는데 이를 관리하는 모임. 의 강신전(講信錢)은 도합 49냥 2돈이었다. 약간의 술과 안주를 마련하였다.

21일. 눈이 대지에 뿌렸다.

22일.

새벽에 봉연(鳳淵)에서 급한 기별을 보내왔는데, 당숙님(堂叔主)의 환후가 몹시 급하다고 하였다.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가서 병문안을 한즉 다소 차도를 보여 염려를 놓았다. 그리고 상촌(上村)으로 가서 빙장(氷丈) 어른의 환후를 여쭈니, 방금 의원을 불러 뜸치료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니 매우 답답하고 애석하였다. 점심을 먹은 후 덕산(德山)으로 가서 광주(光州) 어르신의 환후를 여쭈니, 아직도 차도가 없다고 하였다. 얼마 후 돌아왔다. 광주 검정(檢亭)의 족인(族人) 경심(卿心)이 찾아와서 유숙하였다.

23일. 서리가 두껍게 깔려서 눈이 내린 듯하였다.

경심(卿心)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방을 빌려 살던 사람 제주(濟州) 한영학(韓永學)이 떠나겠다고 고하는데, 영상(嶺上)으로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일전에 향교(鄕校)의 고한(庫汗)이 구걸단자(求乞單子)를 가지고 왔기에 조(租) 1말[斗]을 주었다. 듣자니, 율곡(栗谷) 김청풍(金淸風)이 돈과 재물을 추심(推尋)하려고 동헌(東軒)에서 발언하다가 말을 심하게 하여 노기를 건드리고, 심지어 관가가 공정함을 폐하였다고 하는 일까지 저질러 청풍(淸風)이 관문(官門)에서 죄를 기다린 지 지금 3일째라고 하였다.

24일. 서리가 어제처럼 두껍게 깔렸다.

25일. 흐림.

춘분(春分)이다.

26일. 맑음.

본촌(本村)의 송계(松契)가 이날 강신(講信)하였다.

27일. 맑음.

이날 묘시(卯時)에 봉연(鳳淵)의 지곡 당숙님(芝谷堂叔主)이 세상을 버리셨다. 아침 일찍 가서 곡을 하였다. 큰집은 지금 남의 집을 빌려 사는 중인데, 집을 짓는 일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큰일을 당하였으니, 마지막 보내는 절차에 있어 유감스러운 점이 아주 많았다. 관재(棺材, 관을 만드는 재료)는 수일 전에 땔감을 파는 장에서 새로 사온 것을 잘라 쓰기로 하였다. 이웃 마을의 지친(至親)과 마을 안의 벗들이 모두 와서 곡을 하였다.

28일. 맑음.

신시 무렵에 대렴(大歛)을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돈 1민(緡)과 술 반 동이를 부의조로 바쳤다.

29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가랑비가 개지 않았다.

이날 성복(成服)하고, 영위(靈位)는 짓고 있는 새 터[成造新基]에 세웠고, 빈궁(殯宮)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내갔다. 돌아와서 영위(靈位)에 곡을 하고 절을 한 후, 여러 형님 · 아우, 여러 아재들과 밤이 되어 돌아왔다. 외연(外硯)의 선비 심자중(沈子中)이 어제 와서 유숙하고 갔다 한다. 당숙(堂叔)이 임종 시에 그 장자 화삼(華三)이 손가락을 끊어 목숨을 연장시켜 보려 하였다 하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도끼로 그 왼손 무명지 한 마디를 잘랐다.

주석
향교(鄕校)의 서재(西齋, 기숙사)를 교체하는 사단 향교에는 여러 직임이 있었는데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는 수직(守直)이 있었다. 농민전쟁 당시 향교의 직임들이 동학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가려내 물갈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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