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光陽) 동도 박학목(朴鶴目) 등 49명을 갑오년(甲午年, 1894년) 12월 22일에 잡아서 뒤늦게 보고함.
무장(茂長) 동도 양상집(梁相集)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6일에 잡아서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부안(扶安) 거괴(巨魁) 손순서(孫順西), 손량숙(孫良淑), 배홍렬(裵洪烈)은 갑오년(甲午年, 1894년) 12월 25일에 잡았는데, 일본군이 압송하여 갔고 늦게 보고하였다.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은 29일에 경군(京軍)이 쏘아 죽이고 늦게 보고하였다. 이기범(李基凡) 등 3명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0일에 경군이 압송하여 갔다. 곽덕언(郭德彦)은 소모소(召募所)의 관문(關文, 관아의 문서)으로 인해 고부(古阜)에 압송하여 갔다. 송성구(宋成九) 9명은 해당 현에 잡아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금구(金溝) 비류(匪類) 김제국(金濟局) 등 5명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0일에 순영(巡營)의 감결(甘結)로 결박하였음.
장성(長城) 동도 차석만(車石萬)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1일에 잡아서 진영에 압송하여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능주(綾州) 비괴(匪魁) 조종순(趙宗木筍)은 을미년(乙未年, 1895년) 1월 11일에 잡을 때 쏘아 죽였는데, 순포장(巡砲將) 최주화(崔周華) 등이 잡았다. 정□문(鄭□文)은 1월 17일에 잡아 가두고 조치하도록 했다. 권익득(權益得)과 손영기(孫永己)는 1월 22일에 잡혀 죽었는데, 장흥(長興) 김영집(金永集)이 체포를 했다. 오병채(吳秉采)와 이중백(李仲伯)은 22일에 잡혀 죽었는데, 방수장(防守將) 이지무(李枝茂)가 체포를 하였다. 장강다구(張江多九)는 전 우후(前 虞候) 박종규(朴鐘奎)가, 서민수(徐民洙)는 방수장(防守將) 윤자경(尹滋慶)이 체포하였고, 이득수(李得洙)는 남평(南平)에서 잡아왔으며, 정치구(鄭致九)와 김기홍(金基弘)은 전 현감(前 縣監) 이득수(李得秀)가 체포하여 우선 단단히 가두었다. 이학서(李學西)는 방수장 윤자경이, 이춘서(李春西)·이도춘(李道春)·박채중(朴采仲)은 방수장 이지무가, 김학준(金學俊)은 방수장 양주묵(梁周黙)이 체포하여 읍에서 징계하고 풀어주었음.
남평(南平) 동도 이학순(李學淳)과 박천수(朴千洙)는 1월 16일에 잡아서 가두고 영(令)을 내려 경중을 가려서 조치하도록 했다. 거괴(巨魁) 백정(白丁, 짐승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인 치성(致成)은 20일에 잡아 진영에 압송하여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만경(萬頃) 동도 유원숙(柳元淑)은 1월 17일에 체포하고 압송해서 선봉진(先鋒陣, 이규태 좌선봉)에 넘겼음.
동복(同福) 거괴 박문주(朴文周)와 엄내영(嚴乃英)은 1월 20일에 체포하여 압송해서 진영에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함평(咸平) 동도 서우순(徐右順) 등 10명은 1월 19일에 경군소(京軍所)에서 체포하여 압송해서 진영(鎭營)에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홍곤삼(洪坤三) 등 11명은 1월 19일에 체포하고, 압송하여 엄중히 조사하도록 하였음.
보성(寶城) 동도 임원화(任元化)와 임찬선(林贊善) 및 지만일(池萬日)은 1월 22일에 체포하여 가두고 압송하여 겸읍(兼邑)인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넘겨 엄중히 조사해서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무주(茂朱) 동도 송석준(宋石俊)과 박덕윤(朴德允) 및 김성진(金成辰)은 1월 8일에 잡아 압송하여 금산군(錦山郡)에 넘기고 결박하였다. 문성술(文成述)과 문영술(文永述)은 같은 날[1월 8일]에 잡아서 읍에서 결박하였음.
법성진(法聖鎭) 동도 남궁달(南宮達)과 박복암(朴卜巖)은 1월 20일에 압송하여 진영에 넘겨 엄중히 조사하여 실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거괴(巨魁) 오홍순(吳弘順)과 이만순(李萬順) 및 김풍종(金豊宗)은 같은 날[1월 20일]에 잡아서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벽사역(碧沙驛) 동도 김화삼(金化三)등 14명은 우선봉(右先鋒)의 지시에 따라 쏘아 죽였고, 문광현(文光玄) 등 10명은 징계하고 풀어주었는데, 이들은 1월 13일에 잡은 자들이었다. 박수동(朴水東) 등 25명은 우선봉(右先鋒)의 지시에 따라 쏘아 죽였고, 노양옥(盧良玉) 등 12명은 징계하고 풀어주었는데, 이들은 1월 17일에 체포한 자들이었다. 거괴 이사환(李仕煥)은 1월 21일에 잡아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정을 파악한 후에 바로 압송하게 하였음.
경양역(景陽驛) 동도 김성보(金成甫)는 1월 20일에 체포하여 압송하는 길에 병으로 죽었음.
임자진(荏子鎭) 동도 장찬빈(張贊彬) 등 5명은 1월 3일에 잡아 엄중히 조사하여 실정을 파악한 후에 압송하게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