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 국포공 실록[舍伯菊圃公實錄]
공(公)의 이름은 장현(章鉉)이고 자(字)는 이현(而顯)이며 호(號)는 국포(菊圃)이다. 선친(先親)은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이름은 재빈(載彬)이며 어머니는 공인(恭人) 청주(淸州) 김씨로 쾌갑(快甲)의 여식인데 철종(哲宗) 갑인년(甲寅年, 1854) 9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다. 어려서 어떤 종형(從兄)과 마을의 서당에서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 종형이 회초리를 맞으면 공은 곧 발을 구르며 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종형이 회초리를 맞는 것을 알았다. 서당에 갈 때에 하루에 3번, 1달에 90번을 반드시 교관공(敎官公, 아버지)과 어머니에게 아뢰고 갔다. 교관공이 혹시 다른 일 때문에 그가 고(告)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심지어 두 번, 세 번 고하였다. 비록 밥을 급히 먹고 가야할 때도 반드시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 서당으로 갔다. 교관공은 자식과 조카의 허물에 대해 대개 좋은 말로 타일렀으나, 유독 방심하여 잘못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얼굴빛을 바로하고 꾸짖으며,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으로 훼손하면 이것은 부모의 몸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공은 이 훈계를 들은 뒤로 조심하였다. 몸을 훼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길을 가다가 험한 곳을 만나면 반드시 돌아서 피하였다. 평생 동안 배를 타지 않고 깊은 못과 위험한 골짜기를 감히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았다.
19살 때에 교관공이 그 어머니인 숙부인(淑夫人)의 상(喪) 때문에 집안의 모든 일을 조금도 간여하지 않고 모두 공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공이 선친의 명을 받은 뒤에 몸과 마음을 다했으나 선친의 명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집에 들어와서 한 일과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과 한 일을 비록 매우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부모에게 말씀을 드려 알게 하였다. 부모에게 들어 알지 못한 일은 애초에 감히 하지 않았다. 생업을 처리할 때에 하늘이 준 산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교관공의 훈계를 잘 지켜 벼 1알·조 1알도 마당에 남기지 않았다. 하던 일은 반드시 끝낸 뒤에 밥을 먹었고, 끝낸 뒤에 잠을 잤다. 그 일을 마치지 않고 밥을 먹거나 잠을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쓰던 물건은 심지어 종이·붓·정·숫돌·칼 등의 작은 것도 모두 제자리에 두었다. 일정함을 고집하는 성품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어려서 마을의 서당에서 배울 때에 책을 읽던 자리를 몇 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았으니 본래 성품이 일정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재물을 쓰는 방도는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절약을 법도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써야 할 일에는 애초에 그 비용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않고 반드시 사용했으며, 쓰지 않아야 할 일에도 그 비용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않고 하지 않았다. 믿음을 잃고 속인 사람이 찾아와서 그 실수를 말하면 곧 지나간 허물을 잊어버리고 처음처럼 대우하였다. 심지어 두세 번 속인 자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혹시 그에게 곧고 바른 말을 조금 바꾸고 세속을 조금 따라 세상에서 속는 것을 막자고 권면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 책선(責善)하는 말인가? 그대의 말은 집에서 먼저 바르지 않은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의 속임을 막자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가능한 이치이겠는가?” 속인 자에 대해 한결같이 성심으로 대하여 끝내 남도 공을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친척 간에 잘못 전해진 소문이나 말은 들려도 듣지 않았고, 내버려두고 나무라지 않으니 소문이 저절로 없어졌다.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고 술집과 시장을 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교관공의 행실을 보고 그것을 따랐다. 교관공이 아끼는 서책(書冊)·경서(經書)·자서(子書)·사서(史書) 등을 주위에서 구해다가 드렸다. 어머니께서 힘쓰던 길쌈은 일꾼을 사서 일을 나누어 처리해서 힘들지 않게 하였다. 아우와 여동생을 아끼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며, 종갓집을 높이고 친척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것도 부모의 뜻을 따랐다. 그래서 양친이 그 효성스런 봉양에 편안해 한 지가 30년이 되었다.
갑오년 동학난에 장흥(長興)과 강진(康津)이 무너졌을 때에 교관공은 병환중이었다. 공이 몸에 약재와 요를 메고 양친을 부축하여 피신을 하다가 적을 만났다. 위협하여 끌고 가서 총을 들어 가슴을 겨누는 자가 3명이었는데, 공의 얼굴을 알고 있던 자가 놀라 그 무리를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효자이니 해쳐서는 안된다”라고 하고, 절을 하며 보내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에 흉악한 적도 감동했다고 하였다. 교관공이 난리를 겪은 뒤에 마음이 놀라 증세가 더해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하여 한나절 사이에 문을 출입하는 것이 수십 차례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은 부축하여 출입하는 것을 잠시도 쉬지 않고 몇 년 동안을 매일 한결같이 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서는 옷과 이불을 매일 갈고 빨아서 늘 깨끗하게 하였고, 의원을 맞아 약을 짓고 갖은 방법으로 치료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매일 깊은 밤에 북극성에 머리를 숙이고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나 교관공의 타고난 수명을 어찌하겠는가? 4년 뒤 무술년(戊戌年, 1898)에 교관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새벽과 저녁에 상식(上食)을 올릴 때에 눈물이 대자리에 그득했다. 수척함이 날로 심해져서 친척들이 많이 위로하고 타일렀으나 공은 절제할 수가 없었다. 염빈(殮殯)·장례(葬禮)·상(祥)·제사 등의 의례는 모두 교관공이 숙부인(淑夫人, 공의 할머니)의 상에 행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3년 동안에 쵀복(衰服, 조부모와 부모의 상에 입는 상복)의 무릎 쪽은 꿰매는 대로 해졌고, 대자리는 여러 번 망가졌다.
교관공이 죽은 다음해에 공의 큰누님이 죽어 부고가 갑자기 오니 공은 실성하여 통곡하고 눈과 코에서는 피눈물이 나와 땅을 적셔 보는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공의 자매는 3명인데 큰누님은 유민혁(柳玟爀)에게 시집을 갔으나 민혁은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다. 공은 가산을 버려두고 유씨(柳氏)네 친척을 두루 찾아가 반년이 지나서야 그 후사를 얻어서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10년을 가르치고 키워서 누님이 혼인시키고 싶어 하는 집안을 골라 결혼을 시켰다. 누님이 죽은 뒤에는 다시 생질녀(甥姪女)를 거두어 결혼비용을 넉넉히 들여 시집을 보냈다. 둘째 매부(妹夫) 오강원(吳綱源)이 죽었을 때에는 공이 묘지를 사서 장례를 치렀다. 기현(冀鉉)의 나이가 37살이 되었으나 가산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비용을 넉넉하게 준 것은 공부에 힘써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잇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보잘것없어서 만에 하나도 부응할 수가 없었다. 공은 크게 질책하지 않고 아낄 뿐이었다. 산업(産業)을 알지 못해 공이 보내주는 것만 바라는 자가 기현 한 명에 그치지 않았고, 그의 사촌동생 삼현(三鉉)도 30년 동안 기현처럼 하였다.
서실(書室)에 자제를 보내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시(詩)와 부(賦)를 붓을 한번 들어 써서 한 고을의 큰 선비로 불려도 관혼상제 등의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예(禮)와 의(義)를 말하고 이(理)와 기(氣)를 변론해서 입으로는 거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근접한듯하나 몸으로 하는 행실은 도리어 야인(野人, 촌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자질이 뛰어난 것도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나는 본래 자질이 노둔(魯鈍)하고 생업에 얽매여 의리의 정수를 듣지 못하였다. 학문을 하는 대략은 선친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성인의 학문은 본래 성정(誠正)·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기약할 수 있고, 성정과 치국평천하는 반드시 천리(天理)로써 해야 하기 때문에 격물(格物)로서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독서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배우는 자는 반드시 독서를 먼저 해야 한다. 그렇다면 독서는 본래 성(誠)으로 몸을 바로잡고, 수신·제가해서 멀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는 것이다. 어찌 단지 책을 잘 읽고 글을 잘 지으며 담론을 잘 말하는 것뿐이겠는가? 나는 늘 아는 것이 비록 어렵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공경스러우며 남을 대할 때는 충실하라는 이 3구절을 가슴에 간직한 지가 20년이 되었다. 마음에 유감스러운 것은 늘 뜻은 있으나 행동은 미진한 것이었는데, 이것으로 실천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람을 대할 때에 말은 반드시 부드럽고 기운은 온화하였다. 윗사람을 공경으로 받들어 감히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친구에 대해서 신의로 사귀어 우정이 형제와 같았다. 어린사람에 대해서 사랑으로 권면하고 자식과 조카를 가르치던 것으로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예절은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여 감히 먼 친척이라고 태만하거나 나이가 어리다고 소홀히 하지 않고, 모두 문밖 10보쯤에서 전송(餞送)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여 그 행동이 비록 공만 못한 자더라도 공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즐겁게 그를 따르면서 말하기를, “설령 볼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국포(菊圃, 공의 호)와 1달을 함께 거처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이 친척과 족인을 대할 때에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내하여 비록 편하지 않은 말을 듣더라도 바로 성난 빛을 내지 않고 바로 말을 하지 않으며, 침묵하고 깊이 생각하여 편안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한 뒤에 내버려둘만한 것은 묻지 않고 질책할만한 것은 타일렀다. 친척 중에 공에게 할 말이 있는 자도 반드시 신중히 생각한 뒤에 말을 하였다.
중년에 또한 공의 효행을 들어 벼슬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제수받았으나 공은 그 실정과 그 뜻이 맞지 않다고 여겨 세상에 관리로 나가지 않았다. 경자년(庚子年, 1900) 1월 26일에 죽으니 향년 47세이었다. 비통해하는 친척 중에 공보다 항렬이 높은 자는 자식이 죽은 듯이 통곡했고 공보다 항렬이 낮은 자는 그 아버지를 여읜 듯이 하였다. 부고가 이르는 곳마다 안면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공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던 자들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구들도 그를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자가 있었다. 장흥군(長興郡) 유치면(有治面) 덕리(德里) 마을 앞 건좌(乾坐)의 언덕에 묻었다.[그 뒤에 갑인년(甲寅年, 1914) 3월 5일에 해남(海南) 옥천면(玉泉面) 거오리(巨五里) 마을 뒤편 경좌(庚坐), 남서쪽을 등진 방향의 묘자리의 언덕에 이장(移葬)을 하였고, 부인인 숙인(淑人) 김씨는 공의 왼쪽에 함께 묻었다.] 숙인 김해 김씨는 김명선(金命善)의 여식으로 매우 훌륭한 아내의 모범을 지니고 있었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원(潤瑗)·윤통(潤統)·윤성(潤成)·윤옥(潤玉)이고, 딸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복래(李福來)에게 시집을 갔다.
아! 우리 백씨(伯氏, 큰형)의 덕과 행실은 실로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나 기현이 글을 잘 쓰지 못하여 모두 기술할 수 없어서 위와 같이 간략하게 그 대강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