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공의 이름은 기현이고 자는 세현(世顯)이며 강재(剛齋)는 그의 호이다. 박씨(朴氏) 계통은 신라왕의 후예이다. 고려 때의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부(彦孚)가 중조(中祖)이다. 휘 의신(義臣)은 학문에 힘써 문장이 있었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휘 기보(奇輔)는 중군녹사(中軍錄事)로 나라의 일로 죽어 절의가 드러났다. 휘 화(華)는 밀직부사(密直副使)까지 벼슬을 하였고 나중에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봉해졌다. 모두 이름이 드러난 선조들이었다. 휘 사정(師正)과 휘 웅준(雄俊)은 가선대부(嘉善大夫)였고, 휘 천익(千益)은 맏손자가 높은 지위에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휘 재빈(載彬)은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호는 비당(朏堂)이었고, 문학과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모두 공의 고조(高祖)·증조(曾祖)·조부(祖父) 및 부친이었다. 어머니 공인(恭人) 청주(淸州) 김씨는 쾌갑(快甲)의 여식으로 재색을 갖추고 정숙해서 여사(女士)의 행실을 갖추었다. 숭정(崇禎) 5번째 갑자년(甲子年, 1864) 4월 22일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소박하고 견실하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7살 때 병으로 몇 달을 누워 앓았는데, 갈수록 병세가 위중해져가니 친척이 공의 어머니에게 문복(問卜)과 독경(讀經)을 권유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고 간절히 어머니에게 말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그 뒤에 누님의 혼례날에 반주(斑紬)를 지어 주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따르지 않으며 말하기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8살 때에 배우러가서 과정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더욱 돈독히 하니 사장(師長)들 중에 아끼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가 성취하기를 바랬다.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말이 신중하고 경박한 기운이 없었으며 발걸음이 찬찬하고 구차한 경우가 없었다. 천성이 순박하여 부모와 형에게 허튼말로 속인 적이 없었고, 경솔한 행동으로 책망을 받은 적도 없었다. 비록 문밖으로 한걸음을 나가더라도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간 적이 없었고, 비록 사소한 일이더라도 말씀을 드리지 않고 제멋대로 한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거처에는 편리함을 구하지 않았다. 혹시 밖에 나갔다가 맛난 과일 한 개라도 얻으면 먹지 않고 반드시 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보면 반드시 기억했다가 돌아와서 말씀을 올리고, 남의 과실을 보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마치 자신이 가진 것처럼 하였다. 동료들에게 농지거리를 하지 않았고 오만스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스승에게 공경스런 예절을 다하였고, 항상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였다. 입에서 항간의 성색(聲色)과 비루한 얘기, 시장의 재물과 이해에 관한 말이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독서에서는 많이 얻기를 탐하지 않고 반드시 이치를 탐구하였는데,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 )이 5가지 중에 하나라도 그만두면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자질이 비록 뛰어나더라도 십행(十行)으로 법도를 삼았고, 혹시 바쁘더라도 반드시 수백 번을 읽은 뒤에 책을 바꾸었으며 하루라도 공부를 그만둔 적이 없었다.
독서하는 틈틈이 관을 쓰고 부모의 곁에서 모시며 의리를 질문하였다. 어버이가 밥을 먹는 자리에서 반드시 손을 맞잡고 서서 차갑고 따뜻하며 맛있는 지를 살펴보았고, 식사를 끝낸 뒤에야 밥을 먹었는데, 심한 병이 아니면 거른 적이 없었다. 부모가 그 효를 편안하게 여겼고, 형제가 그 우애를 미더워하였다. 집에서는 남을 나무라거나 질책하는 일이 없었고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일찌기 부모를 영예롭게 하려는 생각으로 비록 과거공부를 끝내지 않았지만, 화려한 문장에 힘쓰지 않고 반드시 이(理)를 우선하였다. 주역(周易)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 서전(書傳, 서경)의 기삼백(朞三百, 일년의 날짜수), 천문(天文)의 도수(度數)·별이 운행하는 궤도·해와 달의 운행 등 모든 산수(算數)의 학문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터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체로 집안에서 보고 들은 것이고 스승을 통해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궁구하고 터득해서 유래한 것이었다. 부모가 연로하여 멀리 여행을 할 수 없었을 때는 가까운 곳의 김오남(金吾南)·정일신(鄭日新)·문귀암(文龜巖) 등을 따라 교유하여 서로 의심나는 것을 물어 이로운 점이 있었다. 그 득실에 명(命)이 있음을 알고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반드시 성현의 가르침을 실제 해야 할 일로 삼아 한마디 말과 행실도 지나쳐버린 적이 없었다.
비당공(朏堂公)[부친의 호]이 노환(老患)으로 몇 년 동안 자리에 누워있어 앉거나 눕는 데에 사람을 필요로 하였다. 백씨(伯氏, 큰형)인 국포공(菊圃公)과 탕제(湯劑)를 올리고 약을 맛보며 안마하고 부축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남과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거나 쫒아 다닌 적이 없었고 다만 의원을 찾아 약을 문의하는 것을 일삼았다. 하늘이 애써 남겨두지 않아 마침내 돌아가시니 모든 의례와 절차는 모두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기준으로 삼았다. 3년 동안 소식(素食, 고기반찬이 없는 밥)을 하고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조금도 억지로 하거나 꾸미려는 의도가 없었다. 어머니의 상에도 그대로 하였다. 불행하게도 백씨가 갑자기 죽고 큰조카가 아직 어렸는데, 돈독한 공의 효제로는 조카들이 어려서 부모를 여읜 데 대한 탄식이 어떠했겠는가? 공은 이전에 10여 리가 되는 곳에 분가하여 살았으나 갑자기 자신의 집안일을 내버려두고 큰집에 머무르며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였고 모두 부형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였다. 조카들을 가르쳐서 법도를 따르게 하였는데, 혹시 잘못을 하면 회초리로 때리지 않고 마음을 평탄하게 하고 모습을 장중하게 하며 자리를 단정하게 한 뒤에 불러서 온화한 음성과 부드러운 말로 반복하여 타일러 뉘우쳐서 자신을 새롭게 하도록 하였다.
한해가 지난 뒤에 큰조카에게 일을 주관하여 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수응(酬應)은 복잡하니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농사는 게을러서는 안되고 학문은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 형세는 서로 어우러져야지 치우쳐서 폐해서는 안된다. 힘쓰고 또 힘쓰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큰조카가 비록 일을 맡아 처리하더라도 매사에 반드시 공에게 아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남은 힘으로 글을 익혀서 마침내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
공은 비록 거처하는 곳이 조금 멀고 몸에 병이 많았으나 심각한 병과 큰 비나 눈이 아니면 하루도 큰집에 가는 길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매달 초하루에 반드시 사당에 참례(參禮)를 하였고, 보름에는 향을 피우고 절을 하였으며 새벽에는 반드시 찾아뵙고 인사를 하였다. 새로 나온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올렸고, 비록 채소 하나 과일 한 개라도 올리지 않으면 먼저 입에 들이지 않았다. 기일(忌日)에 앞서 3일 동안 소식(素食)을 하며 그 정성과 공경을 다했는데, 마침내 집안의 예법이 되었다. 늘 자식과 조카에게 훈계하기를, “상례와 제례는 익혀야 하지만 슬퍼함과 정성이 알맹이고 예는 부차적인 일이다”라고 하였다. 16세인 동생이 있었는데, 뜻이 고상하고 평범하지 않았으며 공부가 일찍 성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장가를 들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의 요절을 슬퍼하고 그 공부를 애석하게 여겨 글을 모아 없어지지 않게 하고, 죽은 날을 기억하여 제사를 지내어 자식에게 이르도록 하였다. 말년에 대나무 숲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방의 벽에 책을 두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집사경(執事敬, 일을 집행할 때에 공경스럽게 한다)·여인충(與人忠, 남과 대할 때에는 마음을 다한다)·태타황녕위구(怠惰荒寧爲懼, 게으르고 안일한 것은 두려움이 된다)·근려불식자강(勤勵不息自强, 애써 노력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것을 쉬지 않는다) 등의 말을 자리의 오른쪽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아 바로잡는 방도로 삼았다. 책을 보는 틈틈이 언덕의 숲과 천석(泉石, 山水)아래에 가서 멱을 감고 노닐며 고반(考槃)과 형비(衡泌)를 본받아 가난을 즐겼다.
당시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명리를 추구하는 것을 고질병으로 여겨 덕의로 자식과 조카들을 권면하였고 당시의 세태가 변하여 어긋남을 괴롭게 여겨 예법으로 선비를 인도하여 참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많이 교화되었다. 이웃에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방랑하는 기질이 있어 주색에 빠져있었다. 공이 불러 타이르고 대학(大學)을 가르쳤는데, 3동(三冬, 3년)이 지나 그 사람이 감화되어 마침내 근실한 사람이 되었다. 어떤 젊은이가 제법 영특했으나 그 아버지가 장사를 하게 하였다. 공이 자식을 가르치는 방도로 말을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고 잘못을 깨우쳐서 공을 따라 배워서 끝내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 또한 동지 10여 명과 이택계(麗澤契)를 만들어 봄과 가을에 회원을 모아 조약을 정하고 강규(講規)를 시행하니 성대하여 볼만하였다. 평소에 지낸 때는 항상 몸을 경(敬)으로 단속하여 근엄함이 마치 생각하는 듯하였고, 사람을 온화함으로 대하여 봄처럼 따스해서 교활한 자가 정성을 다했고 거만한 자가 공경을 다했다. 소문을 들은 자가 일어나고 덕을 살펴본 자가 기뻐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에 만약 먼저 화를 내고 갑자기 매를 가한다면 내가 먼저 바름에서 나오지 않아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았는데, 형도 이런 일이 있습니까? 소리와 낯빛은 사람을 교화하는 가장 하위의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정말로 이런 병이 있었고,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잘못을 깨달아 바로 고쳤다. 나라가 망해갈 무렵, 저들도 공이 문학과 바른 행실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천거하여 보답을 하려고 했는데, 관아에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크게 놀라고 더욱이 은사금이라는 얘기를 싫어하여 큰조카에게 급히 성의 관아에 가서 강력히 고사하게 하여 공의 이름이 저들의 문부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자신을 바르게 하며 교유를 끊고서 자식과 조카를 가르치고 후학을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계축년(癸丑年, 1913) 6월 1일에 죽으니 향년 50이었다. 강진군(康津郡) 암천면(唵川面) 두곡(杜谷) 마을의 뒷산 주봉(周峯)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매장하였다. 친구 중에 삼베를 입고 제문을 지어 와서 곡을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청주 김씨 학규(學圭)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나 일찍 죽고 자식이 없었다. 이어서 부안(扶安) 김씨 량(樑)의 여식을 맞아들였는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 4명을 낳았는데, 장남이 윤량(潤亮)이고 차자(次子)는 윤평(潤平)·윤간(潤侃)·윤안(潤安)이다. 손자 덕근(德根)·영근(永根)·희근(熙根)이 장방(長房)에서, 준권(俊權)과 득권(得權)이 차방(次房)에서, 원권(元權)이 계방(季房, 막내집)에서 나왔다.
아! 공은 자질이 질박하고 후덕하며 온화하였다. 몸을 엄중함으로 단속하고 일에 대면해서는 과감하여 내실 있는 실천과 깊은 조예는 천박한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행실은 사람들의 이목에서 끝내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큰아들 윤량이 약간의 유고(遺稿)를 모아 지금 간행하려고 하는데, 내가 공에게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가장 친밀하고 공을 아는 것이 깊어서 내게 공의 덕을 글로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못난 사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다만 정의(情誼)가 두터워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붓을 적셔 두 집안의 우호를 표현할 뿐이다.
임신년(壬申年, 1932) 8월 상순 광산(光山) 김기경(金箕璟)이 삼가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