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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난파유고 권3 부록[蘭坡遺稿 卷之三附錄]

초토사가 군공을 보고하는 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지난 갑오년에 동도(東徒)가 창궐(猖獗)하여 여러 고을을 남김없이 분탕질했을 때 나주의 정태완(鄭台完)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재물과 의기(義氣)를 내어 아전 및 백성과 협력해서 성지(城池)를 사수하였다. 7월 5일에 적도(賊徒) 수만명이 바로 서문(西門)을 침범하여 성세(聲勢)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정태완은 아전과 백성을 엄중히 단속하여 항오(行伍, 대오)를 나누고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으며 한바탕 크게 싸움을 하여 적도 100여 명을 사로잡았고 노획한 군기는 셀 수가 없었다. 10월 21일에 광주(光州) 침산(砧山)의 적도가 거괴(巨魁) 손화중(孫化中)과 연계하여 10,000여 명을 이끌고 곧 나주를 도륙(屠戮)할 것이라고 하였다. 날마다 위급한 소식을 보내와서 사람들의 마음이 놀라서 위태로웠고, 성안이 크게 동요하였으나, 태완은 도통장(都統將)의 직임으로 장령(將領)을 격려하고 군민(軍民)의 전군(前軍)과 후군(後軍)을 인솔하여 침산아래에 당도하였다. 적도 수천 명이 침산 뒤의 봉우리에 진(陣)을 치고 있었고, 그 뒤에 무수히 많은 무리들이 넓은 들판에 포진해 있었다. 태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직접 포군(砲軍) 100여 명을 인솔하여 병사보다 앞장서서 먼저 침산을 격파하였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어지럽게 포를 쏘며 습격하니 뒤에 주둔하고 있던 적도들은 손쓸 방도가 없이 기세에 눌려 도주하였다. 이 때에 관군은 용기를 발휘하여 일당백(一當百)이 아닌 자가 없었다. 추격하여 적의 소굴인 사창(社倉)에 들어가서 기계를 빼앗고 소굴을 불태웠으며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11월 11일에 동괴(東魁)가 창궐하여 수만 명을 인솔해서 나주 북쪽 40리 북창(北倉) 등지에 집결하여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니 5∼6개 면(面)의 마을에서 인적이 끊겼다. 도통장 정태완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군장(軍將)을 인솔하여 우영(右營)과 합세해서 출군하여 신속하게 일제히 토벌을 하니 적도들이 패배하여 용진산(聳珍山)위로 돌아갔다. 산길이 험악하고 적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산허리의 4면을 포위하고 한걸음씩 전진하며 총을 난사하여 적들을 죽였다. 적들이 산의 험악함을 사수하며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태완도 각 부(部)의 장졸(將卒)들과 적들의 양식과 식수의 보급로를 끊고 3개 방면은 지키되 1개 방면의 작은 길을 열어놓고 요충지에 병사를 매복시키기로 약속하였다. 날이 저물자 도적이 정말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이듯이 산을 내려왔는데, 매복한 병사들이 일시에 총을 쏘았고, 적의 우두머리 수십 명을 추격하여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무기도 매우 많았다.
11월 16일에 무안(務安)의 거괴(巨魁)가 나주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고막포(古幕浦)에 집결하니 연달아 급보가 왔다. 태완이 다시 군장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의 거리가 10리쯤 되는 초동시(草洞市)에 가서 진을 쳤다. 적의 형세를 탐문해보니 적의 숫자가 숲처럼 많아서 단번에 격퇴하기가 어려웠다. 적의 수효가 많아 상대하지 못하고 힘으로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먼저 포를 잘 쏘는 포군(砲軍) 100여 명을 장등(長嶝, 산등성이)의 요충지에 매복시키고 의병을 지휘하여 멀리서 호응하는 형세를 만들었고, 병사를 3개 진영으로 나누어 또한 기각지세(掎角之勢, 앞뒤에서 적을 몰아치는 태세)를 이루었으며 깃발을 내리고 북을 멈추어서 잠시 겁을 먹어 위축된 형세를 보였다.
11월 17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저 적들이 정말로 가볍게 보고 2길로 나누어 불을 지르고 포를 쏘며 서로 바라보는 곳에서 삼대처럼 모여 있었다. 관군은 한편으로 대완포(大碗砲)를 쏘고, 앞뒤로 매복한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면서 바람처럼 내달아 번개처럼 공격하였다. 적들은 본래 오합지졸(烏合之卒)인데, 어찌 수백명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를 감당하겠는가? 일시에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는데, 태완이 병사보다 앞장을 서서 10리를 추격하니 시체가 뒤엉켜 쌓여있었고 노획한 기계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또 밤에 전투하여 죽인 자는 셀 수가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공격하기로 하였다. 뜻밖에 북쪽에서 위급한 소식이 다시 왔는데, 성을 수비하는 것이 소홀하다고 하여 바로 군사를 돌렸다. 북쪽의 변고는 용진산에서 패배한 적이 아직도 화심(禍心,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다시 10여 개 읍의 동류(同類)를 불러 모아 수만 명이 3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있는데, 떠드는 말에 성의 수령을 죽이고 농우를 잡아먹으며 사람을 살해한다는 참화가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형세가 매우 놀랍고, 광경이 위태롭고 두려웠으나 견고하게 성을 지키며 그들의 동정을 잠시 관망하였다.
11월 24일에 태완이 그들이 조금 나태해진 것을 보고 총을 잘 쏘는 포군(砲軍) 수백 명을 세 갈래의 기병(奇兵)으로 나누고 갑절이나 빨리 추격하게 하여 금안면(金安面) 남산(南山)마을 뒤편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일제히 쏘아 죽이니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쏘아죽인 자가 350여 명이었고, 노획한 무기와 말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다시는 광주·나주·함평·무안 땅에서 난리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태완이 다시 남쪽으로 영암(靈巖)·동보(東保)·남평(南平)을 구원하여 6차례 출전해서 크게 이겼다. 이것은 모두 도통장 정태완이 충의를 격려하고 재물을 내어 성을 지키며 임기응변하고 병사보다 솔선하며 백성과 아전을 화합시킨 힘 때문이었다.

주석
대완포(大碗砲) 지름이 30cm쯤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던 큰 화포를 말한다.
기병(奇兵) 적이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전술로 기습하는 부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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