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군 토평일기의 서문[鄭將軍討平日記序]
유자(儒者)의 행실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하는 것과 무인(武人)의 방략으로 포학(暴虐)을 막고 반란자를 죽이는 것은 각기 그 한가지 일도 오히려 이루기가 어려운데, 더욱이 한사람의 몸으로 모두를 온전하게 갖춘 자를 예전으로 돌아간들 찾을 수 있겠는가? 천하의 예전 간책(簡策)에서 널리 찾아보아도 쉽게 보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우리 주(州)에서 근래에 죽은 정장군(鄭將軍)이 비도(匪徒)를 토벌한 공만이 거의 그것에 해당할 것이다.
아! 갑오년 동비(東匪)의 난리는 실제로 천고에 처음 있는 요사스런 적도이다. 부수(符水)와 병을 치료하는 방술은 없으나 행적은 황건적(黃巾賊)에 가깝고, 임금과 부모의 인륜에 관한 떳떳한 도리는 없으나 재앙은 불교보다 심하여 염주를 걸고 주문(呪文)을 외어 이단(異端) 하나를 늘렸다. 도인(道人)이라 하고, 접주(接主)라고 하는 그 명칭은 나올수록 새로웠다. 많이 모인 것이 도깨비와 같았고 넓고 아득한 것이 홍수와 같았다. 산과 바다의 백성들이 빠져 물들었는데, 크게 물든 자는 주(州)의 성을 함락시키고 관리를 죽였으며, 적게 물든 자는 마을을 위협하여 재산을 빼앗았다. 그래서 풍패(豊沛)가 함락되고 왕사(王師 )가 패배하여 위축되었으며 여러 군(郡)들이 소란스럽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오늘과 같은 큰 재앙[堅氷]이 된 것인가? 이때에 지담(芝潭, 호) 민공(閔公, 민종렬)이 마침 나주의 수령으로 있어서 장군(將軍)과 함께 의기를 떨치고 방책을 세웠다. 나주는 한조각의 고립된 성으로 외부로부터 자그마한 원조도 없었으나 수십만의 무리들을 막아낸 것은 거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성(睢陽城)에 있으며 오히려 한줄기 양맥(陽脈)에 의지하여 한기가 몰아치는 구야(九野)에서 어렵게 버틴 것과 같다. 8개월 동안 굳게 지키며 7번 싸워 7번을 이겼고, 얼마 후에 민공(閔公)이 초토사(招討使)로 승진하여 마침내 요사스런 기운을 숙청하고 적의 우두머리를 차례로 죽였다. 이것은 이단을 배척하고 포학한 자를 죽였다고 할 만하고, 장차 천하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다. 만약에 장군이 임금의 조정에 등용되어 지휘가 정해졌다면 그가 이루는 것은 반드시 헤아릴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포상하는 전례(典禮)가 겨우 1개 현(縣)을 제수하는 데에 그쳤다. 또한 역적 진회(秦檜)가 권세를 부려 무목(武穆)이 금패(金牌)에서 죽임을 당했으니 하늘이 어찌 송나라 조정에 복을 주려 하지 않아서 그랬겠는가?
아! 슬프다. 지금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육혼(陸渾)이 이강(伊江) 가의 낙양으로 옮겨 갔도다. 장군의 눈은 횃불로 변하여 영원히 지하에서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니, 기꺼이 신령을 드러내어 적을 소탕할 때가 없겠는가. 뒤에 이 글을 읽는 자는 장군의 의로운 공적을 모두 알고 또한 반드시 책을 덮고 탄식할 것이다.
숭정(崇禎) 후 5번째 계축년(癸丑年, 1913) 1월 하휴(下休, 하순) 이병수(李炳壽)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