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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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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토평일기[甲午討平日記]

태상(太上, 황제)이 즉위한 31년, 곧 갑오년(甲午年, 1894) 봄에 동비(東匪)가 사설(邪說)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속였다. 처음에는 하늘을 공경하여 복을 구한다는 말을 하다가 결국에는 사천(射天)의 흉악한 계획을 세워 무리들을 모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존귀한 사람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무뢰하고 패악한 부류가 날마다 개미처럼 모여 들어 그 무리가 참으로 많아져서 각각 거수(渠帥)가 있었는데, 많은 자는 5,000∼6,000명이었고, 적은 자는 300∼400명이었다. 부(府)와 군(郡)에 들이닥쳐 군기를 빼앗고 명리(命吏)를 죽이며, 흩어져서 마을을 위협하여 재물과 돈을 갈취하고 평민을 구타해서 다치게 하여 피해가 더욱 늘어났다. 여러 군들이 무너졌는데, 먼저 고부(古阜)성이 함락되어 군수가 도망을 갔고 완영(完營)을 지키지 못하고 방백(方伯)이 달아나서 피하니 인심이 흉흉해지고 조정에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임금의 분노가 대단하여 홍재희(洪在熙)에게 호남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고, 엄세영(嚴世永)에게 주(州)와 군(郡)을 감찰하도록 하였다. 동괴(東魁) 전봉준(全奉準)이 연달아 흥덕(興德)·고창(高敞)·장성(長城)·무장(茂長)·영암(靈岩) 등의 군들을 함락시켰다. 함평읍(咸平邑)에 근거하여 마치 유린하고 몰아가는 것처럼 나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나주의 공형(公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의 뜻이 매우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이때 지담(芝潭) 민종렬(閔種烈) 공이 본주(本州, 나주)에 부임하여 연좌(椽佐, 아전)와 군교(軍校)를 불러 눈물을 닦으며 말하기를,“적의 위급함이 이와 같아 금성(錦城, 나주)을 잃어버린다면, 강회(江淮)의 보루와 장벽은 영원히 의지할 곳이 없어 조정을 욕되게 할 것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고, 죽기를 맹서하고 함께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마침내 전적(全賊, 전봉준)이 보낸 편지의 뒤에 “명분 없는 거사로 법을 어그러뜨린 것은 죽여야 마땅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은 듣고 싶지 않다”라는 16자를 써서 적의 진영에 돌려보냈다. 적이 편지를 받고 간담이 서늘해져 마침 밥을 먹다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감히 주(州)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고 이 날 밤에 함평진(咸平津) 산장(山場)으로 진영을 옮기고 다음날에 장성으로 향하여 월평(月坪)에 이르렀다. 초토사(招討使) 홍재희가 영광에서 약간의 군대를 보내어 적을 살피게 했는데, 적과 마주쳐서 대관(隊官) 이도승(李道承, 이학승(李學承)의 오기)이 죽고 관군이 패배하였다. 이 날이 4월 22일이었다. 민후(閔侯, 민종렬)가 소식을 듣고 분통해서 말하기를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화(禍)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해서 사람이 모두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 마침 참막(參幕)에 있던 정석진(鄭錫珍)이 그 말에 호응해서 나와 말하기를, “땅을 지키고 적을 토벌하는 것이 맡은 일이고, 대장을 보좌하여 계획을 돕는 것도 맡은 일입니다. 원컨대 고립된 성을 죽음으로 지킵시다”라고 하였다. 민후가 칼을 빼어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바로 들어맞는다. 하늘이 어찌 화(禍)를 다시 받지 않도록 나와 그대에게 고립된 성안에서 만나게 하여 토벌하여 회복할 기회를 주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방략을 세우고 군사를 지휘해서 한편으로는 훼손된 첩(堞)을 수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를 수선하며 군오(軍伍)를 모집하였다. 이때 민심은 무사안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갑자기 소요를 당하자 대부분이 두려워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고, 아기를 업고 피하는 자와 부축하여 성을 넘는 자를 거의 제지하기가 어려웠다. 민후(閔侯)가 이에 맹서하여 말하기를, “지금 고립된 성을 지키는데 의지할 것은 인화(人和)이다. 가혹한 법령으로 금지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만약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떠나가서 살길을 찾아라. 나는 연좌(椽佐)와 함께 성을 사수할 것이다”라고 하고, 낮에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밤에는 성을 순찰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떠나갔던 자가 다시 돌아와서 군대의 사기가 점점 다시 진작되었다.

7월 5일 밤에 적의 괴수 최경선(崔景先)과 무리 수천명이 금안동(金安洞)에서 벼랑을 타고 금산(錦山) 꼭대기에 올라와서 일제히 내려와 서쪽 성문에 다가왔는데 성세(聲勢)가 매우 급박하고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민후가 정석진을 불러 모의를 결정하여 대오를 엄중히 단속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 깃발을 내리고 북을 멈추어서 적막하여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이 곧바로 문루(門樓)를 두드리자 관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장사가 먼저 올라가 대포를 한꺼번에 쏘고, 천보조총(千步鳥銃)과 뇌고(雷鼓)를 크게 울리니 적이 손을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무너져서 사방으로 도망하여 크게 전승을 거두었다. 민후가 이에 명령을 내려 추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병사가 모두 뛸 듯이 기뻐하니 온 성이 울렸다. 조금 전에 민후가 조용히 진정시키고 정석진이 계책을 내어 속임수를 세우지 않았다면 어찌 대승의 큰 공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어서 크게 병사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때부터 성을 지키는 방비가 느슨하지 않고 더욱 충실하였으므로 적들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아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해서, 마을이 텅 비고 인민이 어육(魚肉)처럼 되었다.

10월에 이르러 출정하여 토벌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급보를 들었는데, 광주(光州) 등지에서 적도가 더욱 사납게 날뛴다는 것이었다.

10월 20일에 민후가 장대(將臺)에 나가 앉아 김창균(金蒼均)을 선봉(先鋒)으로, 정석진을 후군(後軍)으로, 김성진(金聲振)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각각 포군 200명을 인솔하고 대오를 엄중히 단속해서 읍과의 거리가 5리 되는 석현리(石峴里)에 나가서 진을 치게 하였다. 김창균이 나이가 많아 날씨가 추워서 한전(寒戰)이 갑자기 일어나니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하였다. 정석진이 선봉(先鋒, 김창균)에게 청하기를, “선진(先陣)과 후진(後陣)이 비록 장령(將令)이 있더라도 병세가 이와 같으니 내가 선진이 되고 당신이 후진이 되는 것은 어찌 임기응변(臨機應變)의 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마침내 선후를 바꾸었다.

10월 2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바로 행군을 하였다. 연이어 초탐(哨探)을 접하니 700여 명의 적들이 광주의 침산(砧山)에 진을 치고 있는데 기세가 대단하였다. 나팔을 불어 군대를 재촉하여 포를 쏘며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과녁 하나정도 되는 거리에서 군사를 1자로 나란히 배치하고 먼저 돌격하게 하였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대완포(大椀砲)를 쏘아 1차에 촌가를 맞추어 불빛이 일어났고 연이어 천보조총을 쏘았다. 일제히 쏘아죽이니 적이 상대하지 못하고 포와 창을 버리고 한꺼번에 흩어져서 도망하였다. 적진을 점거하여 깃발을 뽑고 포를 수거하였다. 한편으로는 본부(本府)에 승리를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기를 거두어 장대(將臺)에 보냈으며 평민을 잘 타일러서 안도하게 하였다. 이때 접응장(接應將) 손상문(孫商文)·박재구(朴在九)·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鶴述)·전학권(錢學權) 등이, 아군에 실패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포군 100명을 이끌고 크게 깃발을 내걸고 바람에 휘날리며 왔다. 이에 군의 사기가 더욱 진작되었다. 막 군사들에게 음식을 내려 위로하려고 할 때에 멀리 광주의 선암(仙巖) 등지를 바라보니 수만명의 적들이 강가에 진을 쳐서 깃발을 세우고 포를 쏘면서 성세를 과장하고 있었다.
정석진이 말하기를, “적이 멀리 있지 않은데, 오래 기다리며 관망을 해서 적으로 하여금 예리함을 키우게 하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니다. 지금 승리를 얻은 군대가 바람처럼 내달아 우레처럼 공격한다면 기세는 마치 썩은 나무를 꺾는 듯이 쉬울 것이다”라고 하고, 바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수들이 적의 기세가 점점 대단해지는 것을 보고 모두 숫자가 많고 적은 것이 현격하여 승부를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바로 군사를 돌려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니, 정석진이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옛날 악의(樂毅)는 제서(濟西)를 의탁하여 한번 싸워 제(齊)나라를 깨뜨렸는데, 더욱이 저 보잘 것 없는 비류(匪類)는 방금 패한 나머지 반드시 무리들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지만, 우리 군대는 승리를 얻은 뒤라서 용기가 백배해 있으며, 게다가 적들이 비록 많다고 해도 대개가 오합지졸(烏合之卒)이고 우리 군사는 비록 적더라도 모두 정예의 병사들이니 이때를 틈타 토벌하지 않는다면 민심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관가(官家, 나주목사)에 걱정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본군(本軍)을 점검하며 말하기를,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없다. 우리와 적은 함께 설 수 없는 형세이다”라고 하니, 박재구(朴在九)만이 말하기를, “정장군이 말한 것이 병법에 들어맞는다. 형세를 보아 변화에 대응하는 데는 더욱 깊은 안목이 있다. 내가 비록 병약하나 싸움에 나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군대를 지휘하여 먼저 나서며 말하기를, “뒤에 떨어지는 자는 군율로 처리할 것이다”라고 하니, 병사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한꺼번에 전진하였고 후군(後軍)이 호응하여 군사가 이어졌다. 우리의 진영과 적과의 거리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에서 적이 조총을 난사하니 정장군(鄭將軍, 정석진)과 강춘삼(姜春三)이 강 언덕에 가까이 다가가서 먼저 대완포(大椀砲)를 쏘자 포환이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많이 죽었다. 천보대(千步隊) 전공서(錢公西) ·김기옥(金奇玉) 등이 천보조총을 연달아 쏘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서로 밟혀서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관군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려고 했으나 깊이 들어가면 고립될 것을 걱정하여 깃발을 흔들어 군사를 불러들였다. 이름을 불러 점검을 하였더니 다친 사람이 1명도 없었다. 마침내 적의 소굴에 들어가 적의 둥지를 불태우고, 각 초(哨)에 명령을 내려 평민을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다. 서봉(西峯)과 산수(山水) 2곳으로 진군하여 강을 건너 작천(鵲川)을 따라 북면(北面)에 이르니 적의 기세가 더욱 창궐하였다. 추격하려고 했으나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전투를 한 군사들이 배고프고 피로한데다가 날도 칠흑같이 어두워서 바로 군사를 돌렸다. 지나는 곳의 인민이 모두 칭찬을 하였다. 성호(城壕, 해자) 가까이에 오니 횃불이 하늘에 가득하여 대낮과 같았고,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환호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돌아와서 장대에 보고하니 민후가 크게 칭찬을 하고 이어서 소고기와 술을 내려 군사를 위로하며 더욱 성을 지키는데 힘쓰도록 하였다.

11월 8일에 영암(靈巖)에서 온 경보가 시급했고, 동면(東面)에서 위급함을 알리는 보고가 답지(遝至)하였다.

11월 9일에 민공이 정석진을 도통장으로, 김재환을 부통장(副統將)으로, 김성진을 중군(中軍)으로, 최문협을 서기(書記)로 삼았다. 포군 300명을 인솔하고 동창(東倉)으로 달려갔더니 성세가 미친 바에 적들이 도망갔다. 마침내 진군하여 금마면(金馬面)의 용두(龍頭)에서 유숙하였다. 영암의 공형(公兄)에게 군령을 내려 적의 동태를 탐문케하였더니, 공형의 문장(文狀)에, “적들도 명령을 듣고 도망을 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10일에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고 군사를 돌렸다. 김창균과 최윤용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접응하였고, 각 면의 민병(民兵)도 죽창(竹槍)을 가지고 도로에서 영접하였다. 멀리서 온 민병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각각 10전씩 숫자대로 계산하여 주었다. 신안원(新安院)을 거쳐 돌아와서 군사를 위로하는 것을 겨우 끝냈는데, 밤에 북면(北面) 등지에서 각 읍의 적들이 나주에 유감을 품고 재산을 약탈하며 죄 없는 사람을 죽여 그 형세를 막기가 어렵다는 급보가 눈이 내리듯 답지하였다. 민공이 바로 정석진·김재환·김성진에게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도록 명령을 하였다.

11월 11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행군하여 죽엽정(竹葉亭)에 머물렀다.
11월 12일에 북창(北倉)으로 진군하였는데, 날씨가 춥고 비가 내려 군사들의 심정이 매우 괴로웠다. 바로 적의 동태를 탐문해보았더니, 광주 두동(斗洞)의 뒷산에 주둔해있고 무리가 수만명이라 하여 역시 숫자가 많아 상대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었다. 평리(平里)의 집강(執綱) 김대규(金大圭)·삼가(三加)의 집강 유영관(柳永觀)·금안(金安)의 집강 홍봉현(洪鳳鉉)·관동(官洞)의 집강 김경환(金敬煥)·이노(伊老)의 집강 이민상(李敏相)이 각각 민병(民兵) 수백명을 데리고 명령을 받아서 왔다. 후응장(後應將) 손상문(孫商文)·최성순(崔成順)·김창균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군의 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그러나 비가 오랫동안 개이지 않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서 광야에서 진을 치는 것은 그 형세가 매우 불편하여 죽산(竹山)의 뒤편 산꼭대기로 옮겼다. 부근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내와서 인심이 흠모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후응장령(後應將領)이 회군(回軍)하려고 하니, 정도통(鄭都統, 정석진)이 말하기를, “명령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는데, 적을 보고 군대를 물리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고, 한편으로는 의막(依幕)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찰하며 탐문을 하였다.
비가 더욱 내리고 밤도 깊어져서 옷과 무기가 모두 젖었으며 한기가 뼈속까지 침입하였다. 장좌(將佐)가 모두 비의 형세가 이와 같고 산이 높아 바람이 차가운데 적이 만약 갑자기 온다면 적을 맞을 겨를이 없으니 회군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정석진이 말하기를, “회군해서는 안 될 3가지가 있다. 밤이 어둡고 비가 와서 반드시 적이 오지 않을 형세가 하나이다. 백성이 적의 포학을 괴롭게 여겨서 그들을 소탕해주기를 바라는데 적을 보고 물러난다면 민심이 떠나가고 적의 기세는 갑절이나 커지는 것이 두 번째이다. 어두운 밤에 행군하면 매복의 염려가 있는 것이 세 번째이다. 지금 이미 닭이 울었고 곧 날이 밝을 것이고 비는 개일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탐문해보니, 적이 용진산 위로 옮겨갔다고 하여 마침내 중군 김성진에게 크게 깃발을 내걸어 적을 맞을 대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도통장 정석진·부통장 김재환·향도관(鄕導官) 임주호(林周鎬)와 유의근(柳宜根)·돌격장(突擊將) 강춘삼·천보대장(千步隊將) 전공서(錢公西) 등 33명이 입에 막대기를 물고[含枚] 길을 갑절로 재촉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갑자기 수천의 적들을 용진의 중봉(中峯)에서 만났다. 적이 아군의 숫자가 적고 약한 것을 보고서 바로 포를 아래로 난사하기에 즉각 강춘삼에게 대완포를 쏘게 하고 천보조총을 이어서 발사하니 양쪽 진영의 포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아군의 숫자가 적어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깃발을 흔들어 군사를 불러들여 중군으로 하여금 나누어서 한쪽은 왼쪽 산위에 진을 치고 다른 한쪽은 본진(本陣)에 속하게 하였다. 마침 후응장 손상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접응하니 군용(軍容)이 조금 진작되었으나 적은 산위에 자리잡고 아군은 산아래에 있어 지형상의 이로움을 잃어버리고 있어 걱정하고 있을 때에 접응장(接應將) 박근욱(朴根旭)·박재구(朴在九)·최윤용·구유술(具有述)이 병사를 이끌고 왔다. 그래서 왼쪽 산꼭대기에 주둔시켜서 적들에게 3방면을 상대하게 하고 다시 민병을 불러 좌우로 나누어 주둔하여 성세를 이루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고무되었다. 임여현(林如賢) 등 수십명에게 분부하여 산의 왼쪽에 불을 놓아 양도(糧道, 보급로)를 끊게 하였고, 김성진에게 산의 오른쪽에 불을 놓아 도주로를 끊게 하였다. 치열하게 싸우다가 한밤중이 되어 적진에서 포소리가 점점 줄어들기에 강춘삼에게 몸을 바위사이에 의지하여 몰래 적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저항하는 적이 남아 있지 않고 나무를 잡으며 벼랑을 타고 모두 도망하였다. 일제히 산에 올라 무기를 수습하였다. 밤이 깊고 산이 험하여 추격하지 못하고 바로 회군하여 북창의 큰 들판에 주둔하니 곧 날이 밝아 왔다. 본부에 승리를 보고하고 광주지역에서 후진군에게 음식을 먹였다. 적들이 서쪽으로 영광과 삼남(森南) 등지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소굴을 소탕하려고 했다. 서쪽의 급보가 오고 성안이 비어있으니 회군하라는 명령이 매우 엄중하였다.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가 접응하러 중도에 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마침내 홍정(紅亭) 백진사(白進士)에게 격문을 전하여 그에게 계획을 세워 잡게 하고 바로 죽산으로 돌아와서 영장과 함께 군사를 재촉하여 돌아오는데 이르는 곳마다 인민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일일이 잘 타일러서 생업을 안정시켰다. 날이 저무는 것을 무릅쓰고 성에 이르니 개선가를 번갈아 부르고 환호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진용(陣容)은 정연하고 군의 사기가 당당하였다. 민후가 직접 나와서 위로하고 포상을 하며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11월 15일에 다시 서쪽 정벌을 시도하여 방략을 강구하였다.

11월 17일에 도통장 정석진과 부통장 김재환 및 중군장 김성진이 포군 300명을 인솔하여 20리 거리의 자지현(紫芝峴)에 나갔는데, 적이 무안(務安) 고막포(古幕浦)에 있는데, 그 무리가 5만에서 6만명이라고 하였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부통장에게 말하기를,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서로의 거리가 고개 하나 사이여서 지키는 데는 여유가 있으나 진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내가 10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강춘삼·전공서 등과 초동시(草洞市)에 가서 주둔하여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려고 한다”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 밤이 되어 초동시에 진을 쳤는데, 들판은 넓고 군사는 적어서 형세를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 전왕(田旺)·지량(知良)·상곡(上谷) 3개 면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통령(統領) 박훈양(朴薰陽)·임노규(林魯圭)·나사집(羅士集)이 민병 수천명을 인솔하고 와서 지휘를 기다리고 있기에 그들로 하여금 관군의 뒤에 진을 치게 하여 멀리서 성세를 이루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경계하고, 또 부통장에게 진을 옮겨 합세하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300명의 포군과 대포군(大砲軍)을 배치하고 먼저 대포를 쏘니 적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산을 내려갔다. 4면에 불을 지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고 포성이 땅을 울렸다. 아군은 세 갈래의 군사를 1자로 배치하여 접전하려고 했는데, 후응장 최성순·박근욱·구유술이 계속 와서 관군(官軍)과 민병(民兵)이 합쳐서 3,000여명이 되었다. 적과 수다장등(水多長嶝)에서 마주하여 진을 치고 바로 포를 쏘니, 산위의 적들이 해산하였다. 점차로 전진해가니, 적의 대대(大隊)가 가득 하고 장등 아래위에 깃발이 늘어선 것이 숲처럼 많았으며 그 기세는 물꼬가 터진 것처럼 급박하였다. 대포군에게 먼저 쏘게 하고 천보조총을 뒤따르게 하였다. 도통장과 부통장(副統將)이 병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싸움을 독려하였다. 중군(中軍)이 적진의 왼쪽을 기습공격해서 포환이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죽었다. 관군은 기세가 올라 한 명이 100명을 감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시체가 들판에 널렸다. 10여 리를 추격하여 고막교(古幕橋)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은데다가 조수는 불어나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적이 마침내 궁지에 몰림을 헤아려서 죽음으로써 저항하였다. 지형이 이롭지 않아서 징을 쳐서 군사를 물려 호상산(虎狀山)위에 진을 치게 하였다. 적의 기계를 수거하고 군사들의 수를 점검하였더니 다친 자가 1명도 없었다. 본부(本府)에 승리를 보고하고 크게 깃발과 북을 울리니 환호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부근의 5개 면의 민인들이 술과 음식을 보내와서 산에 올라가 병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토벌할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데, 북쪽의 변고가 시급하여 회군하라는 장령이 연이어 이르렀으나 적과 대치해 있으며, 밤에 회군하면 뒤를 밟을 걱정이 있어 이유를 아뢰고 진에 머물러 밤을 지냈다. 해운(海雲)이 참담하고 삭풍(朔風)이 매서웠다. 부통장(副統將)과 천보군(千步軍)이 길의 왼쪽에 매복하여 그들의 동정을 살피다가 갑자기 포를 쏘아 10여 명의 적을 죽이니, 저들이 모두 놀라 산에 올라가서 감히 내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군사들을 단속하여 서서히 군대를 철수하였다.

11월 18일에 해가 장대 몇 개 높이에 떠서야 장대에 돌아오니 민후가 크게 칭찬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간성지재(干城之才,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인재)가 내 막하(幕下)에 있어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지키고 방비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고막의 남은 적들을 끝내 제어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함평과 무안등지에서 비도가 일어나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순리를 어긴다는 급보가 답지하니 장대가 특별히 엄명을 내려 먼저 중군 김성진에게 포군 50명을 인솔하게 하였다.

11월 20일 밤에 서부(西部)의 장등에 나가서 주둔하니 민병의 통령 조맹균(曺孟均)이 합세하여 진에 머물렀다.

11월 21일 아침에 도통장 정석진과 도위장(都衛將) 손상문에게 포군(砲軍) 300명을 인솔하고 급히 행군해서 서쪽지방을 구원하게 명령하여 장등의 선군(先軍)과 합세하였다. 군관 김일운(金一云)과 김영환(金永煥)에게 포군 5명을 인솔하여 먼저 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더니, “적이 서창(西倉)의 세곡(稅穀)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급보를 했기 때문에 말을 달려 갑절이나 빨리 갔다. 적이 아군을 보고 고막산(古幕山)으로 달아나서 바로 20여 리를 추격하였더니 사람과 말이 지쳐서 군대를 주둔하려고 했는데, 선군이 이미 적과 상대하여 화급하게 진군해서 숨도 고르지 못했으나,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고 적이 산에서 포를 쏘았기 때문에 조금 병사를 쉬게 하고 선군과 후군이 합세하여 산 가까이에 가서 주둔하였다. 군용이 비로소 진작되었으나 날이 어두워서 계속 지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호장산(虎壯山)에 옮겨 주둔하였다. 온종일 전투를 한 군사들이 한 모금의 물도 먹지 못하여 군관 김일운에게 각 마을에 나누어 보내게 하였다. 촌민이 술과 음식을 주어 기갈을 조금 해결하였다. 급히 군졸에게 일제히 포를 쏘고 함성을 질러 진격하는 형세를 보이게 하였더니 적들이 기세가 꺽여 도망가려는 조짐이 있기에 중군 김성진에게 군사를 인솔하여 먼저 가게 하였다. 도통장 정석진과 도위장 손상문이 포군 40명씩을 인솔하고 호장산의 오목한 곳에 매복하였다. 선군의 먼 행군이 갑절이나 빨리 온다면 전군이 지현(芝峴)에 진을 치고 후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를 놓고 밤에 군사를 돌렸다.

11월 22일에 북면의 비도가 용진산의 패배에 유감을 품고 5∼6개 읍의 도당(徒黨)을 불러 모았는데, 성세가 대단하여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아 인연(人煙)이 끊어지려 하였다. 급보가 왔으나 여러 차례 싸움을 한 뒤라 장졸이 모두 피로하여 휴식하고 적을 상대하려고 하였다.

11월 23일에 수만 명의 적들이 금안면 남산촌에 주둔하였는데, 읍과의 거리가 10리 정도로 가까웠다. 성을 도륙하려 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이날 밤에 저들이 기습하려고 북문(北門) 밖의 함박산(咸朴山)에 올라갔다. 계책을 세우려고 멀리 동천(東川)가를 바라보니 도깨비불이 별처럼 늘어서서 마치 화승(火繩)모양처럼 보였다. 적이 놀라 달아나버렸다.

11월 24일에 장대에서 위무(威武)를 분발하여 도통장 정석진에게 군대를 정돈하여 출정하도록 명하면서 말하기를, “출정하여 토벌하는 일은 도통(都統)의 역할이 중요하니 경솔하게 상대하지 말고 일심으로 협력하라”고 하였다. 또한 도위장 손상문에게 화포군(火砲軍)과 천보조총군(千步鳥銃軍)을 인솔하고 전진해서 적을 상대하도록 명령하고, 초관(哨官) 박성로(朴成老)에게 100명의 포군을 데리고 산길을 따라 그 배후를 기습하여 교란하게 하였다. 별장(別將) 전학권에게 100명의 포군을 인솔하고 들길을 따라 그 오른쪽을 기습하게 하였는데, 소위 3개 방면의 기병이라는 것이었다. 선군 정석진과 손상문이 군사를 인솔하고 남산에 바로 진입하였는데, 적의 깃발이 하늘을 덮고 적의 막사가 산에 가득하였다. 김기옥이 천보군을 이끌고 누워서 탄약을 재우고 적 진영의 주위로 용감하게 가서 일제히 포를 쏘았다. 장령들이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포를 난사하며 전진하였고, 적도 응사하며 크게 함성을 질렀으니, 마치 솔개가 날개를 펼친 것 같았고 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양 진영의 총소리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듯하고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군사들이 일제히 포를 쏘면 저들도 일제히 응사하였다. 장수들이 힘을 내어 진격하니 적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넘어졌다. 이에 단병(短兵, 칼이나 창으로 하는 싸움)으로 접전하니 적이 마침내 도망을 갔다. 관군이 더욱 용맹을 발휘하여 좌우에서 추격하니 시체가 엉켜 들을 메웠고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계를 거두고 평민을 잘 타이른 뒤에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와서 장대에 나아가 접전을 한 연유를 갖추어 말씀을 드렸더니, 민공이 슬픈 낯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적을 격파한 것은 기쁠만하나 인명을 많이 해친 것은 가련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 수령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날 조정에서 초토사로 특별히 제수하는 제서(制書) 가 내려와서 온 성이 뛰고 기쁨이 전군(全軍)을 움직였으며 금산이 빛을 더했고 영수(靈水)가 맑음을 드러내었다. 한층 엄중하게 방비를 하여 이로부터 끝내 침범하지 못하였고, 관군은 여러차례 싸움을 치루어서 적들이 안중에 없었다.

12월 3일 남평의 수리(首吏)인 정남홍(丁南洪)이 발괄(白活)을 급히 보내오기를, “적의 괴수 최경선(崔敬善)이 바로 본군을 무너뜨려 사또가 부금(符金, 부절과 도장)을 빼앗기고 어깨에 탄알을 맞아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특별히 군사를 내어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토영(招討營)에서 특별히 도통장 정석진·도위장 손상문·부통장 김재환·중군장 김성진·참모(參謀) 박재구 등에게 명하여 정예의 포군 300명을 인솔하고 갑절이나 빨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12월 4일에 남평의 경계에 당도하니 본군의 이교(吏校)가 악기를 갖추어 맞이하고 길에 분주하였다. 말을 세워 잘 타일러서 길을 안내하게 하고, 평민을 어루만져서 조금도 놀라지 않게 하였다. 남평에 도착하니 관가(官家, 수령) 이희하(李熙夏)가 공장(公狀)을 보내왔기에 돌려주게 하고 후봉(後峰)의 월연대(月延臺)에 주둔하여 적의 동태를 탐문하였더니, “적이 소문을 듣고 능주(綾州) 등지로 향했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산위에서 머물렀다.

다음날( 12월 5일)에 도위장·부통장·중군·참모를 이끌고 남평 수령에게 가서 문안인사를 하고, 말하기를 “도통(都統)은 대장으로서 잠시도 진중(陣中)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남평 수령이 면면이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만약 여러 장수들이 수고하여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관가가 거의 적의 칼날에 피를 흘리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모습이 매우 측은하였다. 바로 본진(本陣)에 돌아와서 방편을 상의하였다. 매우 정성을 들여서 음식을 제공하였다. 도통장이 개연히 이교들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관과 이민(吏民)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손발과 머리 및 눈의 관계와 같다. 이런 난리를 맞아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생사를 함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난리를 피해 도망을 가서 비류(匪類)에게 제멋대로 흉악한 짓을 하게 하고, 수령에게 변고를 겪게 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가”라고 하니 모두 엎드려서 명을 들었다. 원근의 인민이 소나 돈과 곡식을 가지고 와서 군대 앞에 바치면서 말하기를, “적류(賊類)를 토벌하고 평민을 보호한 은혜는 강과 바다처럼 깊습니다. 약간의 물건으로 정성을 표시하려고 하니 군사들을 먹이는 한때의 비용에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도통장이 말하기를, “인정으로는 혹시 그럴 수 있으나, 이번 출군에는 스스로 비용을 조달할 방도가 있다. 함부로 민간에서 물건 하나라도 받는다면 크게 장령을 어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일일이 돌려보내고 엄중히 대오를 단속하였다. 바로 능주 공형의 문장을 보니, 적들도 도망가서 흩어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회군하기 위해 남평의 관가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적이 이미 멀리 달아났는데 군대가 머무르면 폐단이 생기니 우선 군대를 돌리고 만약 위급한 변고가 있으면 성화같이 달려와서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남평 수령이 고마움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들을 먹이라며 소 1마리와 돈 200냥을 주었으나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바로 회군하니 진용이 당당하여 산을 끼고 바다를 뛰어넘을 듯한 기세가 있었다. 초토영에서 특별히 흐뭇해 하는 안색을 띠며 말하기를, “만일 이 군대를 온 나라에 다니게 하다면 비도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12월 6일에 장흥(長興)에서 성이 거의 함락되기에 이르렀다는 비보(飛報)가 갑자기 왔다.

12월 8일에 강진(康津) 등지에 적들이 창궐한다는 급보가 다시 이르렀다. 초토영에서 크게 장좌(將佐, 보좌하는 장수)를 모아 나가서 토벌할 것을 의논하고 특별히 분부를 내리기를, “병법에 멀리서 적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바로 영암에 내려가서 그 허실을 탐문하는 것이 만전의 대책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 도통장 정석진·부통장 김재환·중군 김성진에게 천보조총군 300명과 창군(鎗軍) 200명을 인솔하게 하였다. 또한 비밀리에 영암 병영의 각처에 군령을 내려 군병을 엄중히 단속하여 초토영 도통장의 지휘를 기다려서 거행하라고 하였고, 또 동오면(東五面)의 의병 통령인 유기연(柳紀淵)에게 병사 1,000명을 데리고 신안원에서 기다렸다가 도통장과 합세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명령을 재촉하여 출발해서 영산강(榮山江)을 건너 영암의 경계에 당도해 동오면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용이 크게 진작되었다. 날이 이미 어두웠고, 내린 눈빛이 차가워서 횃불을 들고 바로 영암의 화수원(火燧院)으로 향하였다. 강진의 수령 이규하(李奎夏)가 군문(軍門)에 달려와서 장령을 뵙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잠시 군마를 멈추고 모두 만나보니, 성이 함락된 상황을 자상하게 말하였다. 재촉해서 행군하고 강진의 수령도 군대를 따라오게 하였다. 화수원에 이르러서 산 옆의 언덕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밤새 번을 돌았다. 날이 밝기 전에 행군을 하려고 할 때에 영암 공형의 공문이 한꺼번에 5∼6차례나 연이어 도착하여, “적들이 지금 성을 침범하였다”고 했다. 또 들으니, “병영이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행군을 급히 하여 영암에 도착하니, 인민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고서 난리를 피해 길을 메우고 있어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것을 매우 근실히 하였다. 영암 휘하의 8개 성에서 성을 수비하던 장졸들이 악기를 갖추어 오리정(五里亭)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암의 수령인 남기원(南起元)이 문을 나와 군대를 맞이했는데, 깃발과 북이 질서정연하고 군용이 엄숙하였다. 대월루(待月樓)에 진을 쳤다. 비보에, “병영이 이미 함락되었고, 동도가 뒤를 따라 갑자기 쳐들어 와서 인심이 당황하여 울고 놀라서 어찌 할 줄을 모른다”고 하였다. 급히 군령을 내려 조용히 진정을 시키고 성의 사방을 지키게 하였다. 나주와 영암 2개 읍의 군사로 하여금 함께 순찰하게 하고, 사방 대문의 열쇠를 거두어 장소(將所, 장수가 있는 곳)에 두고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장령의 지시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게 하였다. 조치를 이미 끝내고 들어가서 수령을 뵈었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성을 지키는 한가지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잘 헤아려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물러나서 장소에 돌아오니, 남문(南門)의 수성장(守城將)이 병사도(兵使道)[서광복(徐光福)]가 단기(單騎, 말 1필)로 왔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바로 영접하였다. 장수들이 들어가서 보고 상세히 병영을 지키기 못한 연유를 듣고는 문을 열어 적을 들이는 것을 면하지 못한 애석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병사가 그 성이 함락된 것을 분하게 여겨 함께 성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영암의 관민(官民)이 길을 막고 성을 지켜줄 것을 청하였다. 다만 일의 형편을 생각해보니 병영은 이미 함락되었고 영암은 위급한데, 위급한 곳을 버리고 함락된 성을 구원하는 것은 형세상 매우 온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초토영에 사유를 열거하여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의 수비를 엄중히 갖추었다. 무안의 비도가 강을 건너 침입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연이어 왔기 때문에 병사를 보내어 황치(黃峙)와 덕진(德津)의 요충지를 막았다. 적이 초토영의 구원군이 와서 기다린다는 소문을 듣고 감히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지킨 지 10여 일이 지나 경군과 일본군이 계속 내려왔기 때문에 바로 군사를 돌렸다. 민공이 특별히 칭찬하여 말하기를, “장성보다 낫다고 한 것은 이 사람을 말할 것이다”라고 하고, 출정한 공로를 위로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군대를 내보내지 않았다.
대개 정석진이 도통이 되어 전후에 걸쳐 출전한 것이 8차례인데, 전혀 잘못이 없고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평민을 위로하고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으며, 군인을 아꼈기 때문에 병사들이 기꺼이 따랐고, 싸움에 나가 적을 상대해서 의기가 편안했고 화살과 돌이 좌우에 떨어졌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비록 옛날의 이름난 장수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능가하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해도 지난날의 초토사 영감이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다면 장군이 어떻게 세상에 없는 큰 공을 이루었겠는가? 진실로 장군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지 않았다면 어찌 초토공(招討公, 초토사)의 충의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충세형(种世衡)과 같은 사람이 방상공(龐相公)의 막하에 있을 때 문법(文法)으로 구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간(靑澗)의 공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처음에 민후가 장군과 정말 서로 더불어 할 수 있음을 알아서 금성(錦城)의 1개 주가 호남 전체의 보장(保障)이 되게 하였으니 물결들이 세차게 흘러도 지주(砥柱)가 우뚝 서 있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아! 위대하구나.

주석
사천(射天) 은(殷)의 무을(武乙) 과 주왕(紂王) 및 송의 강왕(康王) 등이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달아놓고 활을 쏘아 천신(天神)과 무공(武功)을 겨루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포악함과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거수(渠帥) 원문에는 거사(渠帥)로 되어있으나 거수를 잘못 쓴 듯하다.
강회(江淮) 양자강과 회하(淮河)를 말하나 여기서는 영산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날이 4월 22일이었다. 이학승이 동학농민군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은 4월 23일이다.
첩(堞) 성가퀴. 성(城) 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담을 말한다.
뇌고(雷鼓) 검은 칠을 한 6개의 북을 한 묶음으로 해서 틀에 매달아 치는 북을 말한다.
장대(將臺) 장수가 올라가서 명령과 지휘를 하던 누대를 말한다.
향도관(鄕導官) 군사를 인솔하고 갈 때에 길을 인도하던 관리를 말한다.
含枚 銜枚의 오기이다. 군사가 행진할 때에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하무라는 나무 막대기를 물린 데서 나온 말이다.
접응장(接應將) 응접하러 나온 민병의 장수를 말하는 듯하다.
제서(制書) 조서(詔書). 국왕이 자신의 뜻을 알리는 글을 말한다.
발괄(白活) 관청에 글이나 말로 하소연하는 것을 말한다.
공장(公狀) 수령과 찰방(察訪)이 감사·병사·수사(水使)를 공식적으로 만날 때에 내는 관직명(官職名)을 적은 편지를 말한다.
충세형(种世衡)과 같은 사람이 방상공(龐相公)의 막하에 있을 때 문법(文法)으로 구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간(靑澗)의 공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청간성(靑澗城)에서 여러 해 동안 병사들을 잘 대우하고 위무하였는데, 강(羗)족이 침입했을 때에 병사들이 그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한다. 혹 사람을 부르는 일이 있어도 사람을 시켜서 문서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게 하고, 다만 종이쪽지에 써서 관아문에 방을 붙여도 사람들이 기일을 맞추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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