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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난파유고 권4 부록[蘭坡遺稿 卷之四附錄]

행장[行狀]

공의 이름은 석진(錫珍)이고 자는 태완(台完)이며 자호(自號)는 난파(蘭坡)이다. 나주 정씨는 고려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선생으로 이름이 가신(可臣)인 분의 주손(冑孫)이다. 문정공은 중국 조정의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세상에 크게 이름이 있었다. 그 후에 영모재(永慕齋) 경무공(景武公)은 이름이 식(軾)인데, 세조(世祖)를 섬겨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6대를 지나 진사로 이름이 선경(善卿)이고 호가 낙천재(樂天齋)인 분은 공에게 9세조가 된다. 이로부터 몇 세(世)동안은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5대조 할아버지는 이름이 봉주(奉周)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조(高祖)는 이름이 초명(楚明)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였으며, 증조(曾祖)는 이름이 수민(壽民)이고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이름이 계화(啓華)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이름이 찬기(讚基)이고 참봉(參奉)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해주최씨(海州崔氏) 사륜(師崙)의 여식으로 철종(哲宗) 신해년(辛亥年, 1851) 8월 9일에 나주 치서(治西) 명당리(明堂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외모가 크며 기개가 원대하여 보통 아이와 매우 달랐다. 배우기 시작하여 일찍 성취해서 비록 기꺼이 학과 공부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나 대의를 통달하였다. 품성이 돈독하여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부모를 잘 모셨다. 어머니가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여러 해를 지냈는데, 공은 의원을 모셔다가 치료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끝내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의사를 접대하는데 한 가족처럼 하였고,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남보다 훌륭한 것을 볼 수가 있다. 형제 간에 있고 없는 것을 함께 하여 담장 안에서 싸우는 부끄러운 모습을[鬩墻之恥]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미루어 종족을 대하여 각각 그 환심을 얻었다. 더욱이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해서 학업을 익힐 수 없는 서당의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를 위해 힘을 내어 넉넉하게 도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글방 사람 중에 그에 의지하여 이처럼 이룬 자가 여러 곳에 가끔 있었다.
지난 계사년(癸巳年),( 1893)에 기근이 만연하여 관에서는 진휼(賑恤)을 펼 방도가 없었는데, 공은 의기로 재물을 내어 온 경내를 많이 구제하여 지금까지 그 은혜를 칭송하고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구제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펼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나주의 목사(牧使)인 민종렬( )공을 모셨는데, 민공이 자주 칭찬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에 동비가 소요를 일으켜 먼저 고부에서 관군을 패배시키니 그 기세가 솔개가 날개를 편 것처럼 대단해져서 연이어 주군을 함락시키고 장성에 침입하여 대관이 피살되니 인심은 흩어져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나주는 요충지에 끼어 있고 고립된 성으로 방어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그래서 민공이 공을 불러 도통장으로 삼아 군무를 모두 위임하였다. 공이 단에 오르니 병사들의 환호성이 우레와 같았다. 부지런히 힘써서 돕고 의로운 용기를 내어 성을 지켰는데, 진실로 출전하면 반드시 승리하였고 8개월 동안 성을 굳건히 지켰으며 전후에 걸쳐 승리를 알린 것이 6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군용이 엄숙하고 폭력과 약탈을 금지하여 이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백성이 모두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환영하였다. 이 해 11월에 민공이 초토사로 승진했기에 공이 명령을 받아 출정을 해서 남쪽으로 영암·동보()·남평을 구원하였는데, 위성(威聲)이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흩어졌다. 이어서 왕사가 내려와서 남은 무리를 체포하였다. 초토사가 의정부에 군공을 치보(馳報)하였는데,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 군공을 기록한 별지에서 말하기를, “7월 5일에 서문(西門)의 승리는, 공이 아전과 백성을 엄중히 단속하여 항오를 나누어 바로잡고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한바탕 격렬하게 싸워서 100여 명의 적들을 사로잡고 군기를 많이 노획하였습니다. 10월 12일에 침산에서는 비괴(匪魁) 손화중이 10,00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쳐서 사람들의 마음이 놀라고 성안이 들끓었으나 공이 충의를 격려하고 군병을 인솔하여 광주에 나가 주둔하였습니다. 적들이 넘쳐나서 곳곳마다 집결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병사보다 앞장을 서서 총을 쏘며 습격을 하니 적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바람에 쓰러지듯 도주하였습니다. 추격하여 사창과 선암 등지에 들어가서 무기와 식량을 거두고 그 소굴을 불태워버렸습니다.
11월 11일 용진산의 전투 때에는 비류 수 만 명이 북창에 집결하여 상하(上下) 10여 리에 불을 놓고 약탈을 해서 5∼6개 면의 마을에서 인적이 끊어졌습니다. 공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포군 수백 명을 이끌고 불의에 기습적으로 출전하여 신속하게 토벌해서 직접 쏘아죽이고 잡은 것을 셀 수가 없었습니다.
11월 16일 고막의 전투 때에는 무안의 비도가 모인 것이 숲처럼 많고, 기세가 매우 대단하였습니다. 공이 다시 장령들을 통솔하고 민병과 합세하여 적과 10여 리 되는 곳에 진을 쳤는데, 저들은 많고 아군은 적었으나, 오직 계책만으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포군을 지휘하여 양쪽에 매복을 시키고 우리의 약함을 보였더니 저들이 정말로 가볍게 여겨 수만의 병사가 양쪽 길로 나누어 불을 지르고 포를 쏘며 바람을 몰듯이 공격해 왔습니다. 공이 먼저 출전하여 포를 잘 쏘는 자에게 먼저 대완포를 쏘게 하였고, 양쪽에 매복시킨 병사들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게 하며 천보대조총군에게 용기를 내어 먼저 오르게 하였습니다. 적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사방으로 도주를 해서 시신이 서로 엉키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는데, 사람 하나, 말 1필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초토사가 크게 칭찬하기를, “뜻밖에 간성(干城)의 인재가 내 막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11월 24일 남산의 승리는 이러하였습니다. 적들이 여러 번의 패배에 유감을 품고 혈전을 하려고 생각하여 10여 개 읍의 비류를 꾀어 들여 3길로 나누어 와서 반드시 성을 도륙한 뒤에 그치려고 하였습니다. 공이 조용히 일을 정리하고 난 뒤에 나누어서 기병을 만들어 적이 조금 나태해진 틈을 타서 먼저 습격을 하니 적이 지난날의 패배에 기가 죽어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졌습니다. 북쪽으로 추격하여 300여 명을 죽이고 획득한 총·칼·말·소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로부터 적이 감히 이 성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모두 치보에 있는 말이나 글이 많아서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이 때에 조저(朝著, 조정)가 바르지 못하여 벼슬과 상이 미치지 못했으나 겸손히 물러나 공을 자랑하지 않고 낯빛과 말에 드러나는 기미가 없었다. 최후에 제공들이 억울함을 호소함에 따라 특별히 해남군수를 제수 받았으나 공이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임소(任所)에 나아갔다. 이 때에 참서관(參書官) 안종수(安宗洙)가 주(州)의 일을 대리하며 단발(斷髮)을 억지로 시행하여 기염이 대단하였다. 관찰사(觀察使) 채규상(蔡奎祥)이 쫓겨났고, 초토사 영감도 핍박을 당해 공에게 이르렀는데, 공이 말하기를,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가 없다”고 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심이 분노하였다. 이에 앞서 간사한 무리가 외국의 지원을 끼고 나라를 그르쳐서, 모후(母后, 명성왕후)가 시해를 당하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播遷)하니 중외(中外, 서울과 지방)의 의병이 곳곳에서 단결하였다. 호남에서는 전 참봉(前 參奉) 기우만(奇宇萬)이 앞장을 서서 천하에 대의을 펼치려고 하였고, 공이 함께 일을 도모하여 흉도(凶徒)를 꾸짖어서 공을 의지하는 것이 매우 급박하였다. 나주의 사람들이 다투어 참서관(參書官, 안종수)을 죽임에 이르러서 공이 지시한 일이라 생각하고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부임한 뒤의 일이었다. 대장 김병욱(金炳旭)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간궤(奸軌)의 사주를 받아 의병을 모함하여 살육을 자행하니 일개 도가 두려워서 혈색이 없었다. 다음에 나주에 도착해서 은밀히 순포(巡捕)를 보내 공을 체포하여 수레에 태웠다. 대개 공이 수레에서 내려 읍의 훌륭한 선비에게 예를 차리고 민간의 괴로움을 찾아가서 물어보아 치적이 드러난 지 몇 개월이 못 되어 아전과 백성이 공을 아끼고 받들었기 때문에 공이 체포되니 온 경내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 원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죽을 힘을 다해 공을 구제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만류하기를, “나는 조정의 명리이다. 비록 죄가 있더라도 진실로 추국(推鞫)을 해야 하는데, 더욱이 전혀 지은 죄가 없는데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병욱이 한 마디 공초(供招)없이 바로 형(刑)을 시행하려고 명령하니, 공이 크게 소리를 지르기를,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멋대로 죽이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병욱이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마침내 공을 죽였는데, 바로 3월 12일이었다.
온 성의 선비와 여자들이 다투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정해남(鄭海南)이 죽었는데,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고, 3일 동안 불을 피우지 않았다. 원근에서 그것을 들은 자들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 원통하도다. 논하건대, 동비의 난리는 진실로 국가에 처음 있는 변고였다. 처음에 주문을 외우고 이단을 내걸어 어리석은 백성을 속였으나 끝내 군사를 일으켜 포학을 저질러서 군부(君父)에 근심을 끼쳐 순절한 대관의 목을 베고 명을 받든 윤사(綸使)를 불태워 죽이며 완부(完府, 전주)를 연이어 함락시켜 양전(兩殿, 경기전과 조경묘)의 수용(睟容, 임금의 어진)이 피난을 가고 주현(州縣)을 약탈하며 명리(命吏)를 태워 죽이는 데에 이르렀다. 팔도가 모두 마찬가지여서 그 예봉(銳鋒)을 당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홍주(洪州)와 나주만이 온전하였고, 나주의 완벽한 승리는 공(公)의 공(功)에 달린 것이었다. 진실로 10세(十世)동안 용서를 해주어야 마땅한데도 한번도 그 자신의 죄를 면하지 못했으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안참서(安參書)가 포학을 저지른 것은 실제로 하나하나 들어서 거론하기가 어려우나 그가 범한 악행 중에 가장 현저한 것은 국모(國母)가 시해된 것이다.
갑오년(甲午年, 1894) 6월에 이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끌어온 것은 이상한 일이다. 또한 학교를 세워 선비를 양성하는 것은 나라와 관계가 없고, 학교를 없애고 서당만 남겨 병대를 배치하며 객사(客舍)에서 망하례(望賀禮)를 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은 혐오할만하고 실제 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판적(版籍, 호적)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것이어서 성인(聖人)이 판(版, 호적)을 짊어진 자에게 경의를 표했으나 모두 끌어내어 벽을 바르는 휴지로 주었고, 비각(碑閣)은 전임 수령이 남긴 교화를 추모하는 것으로 후세 사람의 모범으로 여겼으나 모두 훼손하여 각 청(廳, 대청)의 땔감으로 충당하였다. 읍의 수령이 된 자가 이런 죄목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왕법(王法)에 용납되지 못할 터인데, 더욱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춘추(春秋)에서 역적을 토벌하는 법에는 사람마다 죽이는 데 명칭이 부합하며 말이 이치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공이 주모했다거나 기송사(奇松沙, 기우만)에게 후대를 입었다고 하여 잘못된 죽임을 당하였다. 거리낌이 없는 당시의 무뢰배와 무고를 한 간사한 자들을 이루 다 죽일 수 있겠는가? 공은 공적이 있고 죄는 없는데 무고를 당해 원한을 갖게 된 것은 하늘과 땅에 널리 알리고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백세(百世)가 지난 뒤에 반드시 공의(公議)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알기 바랄뿐 모르는 자와 말하는 것은 어렵다. 공의 부인인 숙부인(淑夫人)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홍권(金洪權)의 여식으로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곡기를 끊고 따라가려고 했으나 시어머니가 집에 살아계시고 아이들이 방에 가득한 것을 생각하여 참으며 죽지 않고 마침내 집안일을 이루었으니 현명하다고 할만하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우찬(遇燦)으로 의관(議官)이고, 차남 우경(遇卿)은 참봉(參奉)이며, 또 다른 차남은 우권(遇權)이다. 딸들은 박정석(朴正錫)·양주환(梁周煥)·조도기(曺道基)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은 처음에 종남(終南)의 임좌(壬坐 )언덕에 묻혔다가 나중에 묏자리가 이롭지 않아서 갈마(葛馬)의 갑좌(甲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우찬이 나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선친의 공적은 저처럼 우뚝한데, 원한을 품고 돌아가셔서 땅을 두드리고 하늘에 부르짖어도 이를 곳이 없어 아직까지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운수가 변하고 나랏일은 망극하여 원한을 호소할 데가 없으니, 불초한 저의 죄는 이에 더욱 간절합니다. 다만 훌륭한 덕을 기술하여 후세를 기다리려고 하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선친을 위해 붓을 잡으려는 자가 없습니다. 공은 평소에 제 선친과의 정리(情理)가 있어 한마디 말을 받아 작가에게 부탁을 하려고 하니 공께서 사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차마 사양하지 못했으나 차마 글을 지을 수도 없었다. 옛날 고려의 원수(元帥)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紅巾賊)을 격파하고 송경(松京, 개성)을 회복했으나 상을 받지 못하고 간신인 김용(金鏞)의 모함을 받아 목이 잘렸는데, 상주(尙州)의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이 그를 위해 곡(哭)을 하며 말하기를, “마침내 태산같은 공을 칼날의 피로 변하게 하여 그 충성스럽고 훌륭한 혼백이 천추만세(千秋萬世)동안 반드시 구천(九泉)에서 피를 마실 것이다”라고 한 일을 생각해보니, 아! 김공(金公)이 비록 억울하게 죽었으나 도리어 문충공의 글을 얻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공의 억울한 죽음은 실제로 김공과 서로 들어맞으나 누가 그를 위해 드러낼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송사(松沙) 기공(奇公, 기우만)이 의롭게 죽은 것으로 장담하였고, 초토사 민공은 간성(干城)의 인재로 칭찬하여 이것을 의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은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직지(李直指) 공은 모함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것을 임금께 몰래 아뢰었다. 주(州)의 많은 선비들은 공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관찰사와 수의(繡衣, 암행어사)에게 연명으로 호소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금 비록 억울함을 풀지 못했으나 나중에 살펴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마침내 그를 위해 글을 지어 다음처럼 해서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을 기다린다.
숭정 5번째 신해년(辛亥年, 1911) 12월 상순 금성 오준선(吳駿善)이 짓는다.

주석
鬩墻之恥 형제간의 다툼을 말한다.
치보(馳報) 지방에서 역마를 달려 급히 중앙에 보고하던 일을 말한다.
참서관(參書官) 대한제국 때에, 여러 관청에 둔 주임벼슬을 말한다.
간궤(奸軌) 법을 어기고 난을 일으키는 일을 말한다.
순포(巡捕) 순검(巡檢). 경무청에 속해있던 판임관 벼슬의 하나를 말한다.
윤사(綸使) 임금의 윤음(綸音)을 받들고 온 사절을 말한다.
망하례(望賀禮) 나라의 경사스런 날에 고을 수령이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을 말한다. 전패(殿牌)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겨 객사에 세운 나무패이다.
김득배(金得培) 1312∼1363.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호는 난계(蘭溪)이다. 1357년과 1359년에 홍건적의 침입 때에 서북면 도순문사가 되어 방어에 힘썼으나 1363년에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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