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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묘갈명[墓碣銘]

세상에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야 비상한 공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사하고 시샘하는 무리의 모함을 받아 크게 쓰이지 못하고 중도에서 죽는 자가 역사에 종종 있었다. 비록 1,000년이 지났어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더욱이 직접 겪고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절실한 원통함을 또한 어찌 사서(史書)를 본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보잘 것 없는 나는 죽은 도통장 해남군수 정공(鄭公, 정석진)의 일에 대해 처음부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의 이름은 석진이고 자는 태완으로 철종(哲宗) 신해년(辛亥年, 1851) 8월 9일에 태어났다. 체구가 크고 도량이 넓어서 우뚝히 세상에 쓰일 가망이 있었다. 갑오년(甲午年, 1894)에 동비가 난리를 선동하여 곳곳마다 봉기해서 모두 멧돼지처럼 돌진하였다. 고부에서 바로 장성으로 내려올 때에 장리를 죽이고 백성을 괴롭혀서 그 피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였다. 그러나 나주 목사인 민종렬 공만 의기를 갖고 성을 수비하여 군(君, 정석진)을 밀어 도통장으로 삼고 크고 작은 군무를 모두 위임하였다. 장군이 단에 오르니 아전과 군사들이 용기를 내었다. 마침내 더욱 충의를 격려하고 방략을 도와서 8개월 동안 지켰으며 6번 싸워 6번 승리하였다. 약속의 분명함과 항오(行伍)의 엄정함은 비록 법도에 맞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의 전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처음에 서성(西城)에서 한바탕 크게 싸워 승리하고 비당(匪黨)을 체포하였으며, 다음에는 침산에서 포를 쏘고 습격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또한 고막과 용진산의 싸움에서 북을 쳐서 사기를 북돋우고 적의 간담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남산(南山)에서 승리하여 거괴를 법에 따라 처리하였고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민후가 크게 칭찬하기를, “뜻밖에 막부 안에 이런 간성의 인재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계책이 아래에서 들어맞으면 하늘의 도움이 반드시 위에서 부응한다고 생각한다. 아군이 처음에 무기가 적은 것을 근심했으나 남고(南庫)에서 몇 백 년이나 비장(秘藏)되었던 예리한 병기가 나온 것이 첫 번째이다. 적이 밤에 기습을 하려고 했으나 동문(東門)의 도깨비불이 바둑판과 별처럼 늘어서서 저들로 하여금 의심과 두려움을 갖게 하여 군대를 1사(舍, 30리)나 물러나 한 것이 두 번째이다. 또한 적이 화공(火攻)을 하려고 했으나 큰 눈이 마침 내려 성을 몇 자나 덮어 적이 감히 계략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 세 번째였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도운 기이함이 아니겠는가?
이 해 11월에 조정에서 민후를 초토사로 제수하고 왕사로 하여금 뒤를 이어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장군이 1,000여명을 이끌고 영암과 장흥 등지에 출전하니 비도가 소문을 듣고 밤에 도망을 가서 전혀 흔적이 없었다. 회군하여 남평에 이르니 군민들이 소 2마리와 돈 100궤미로 군대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장군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군수는 미리 준비했으니 해당 군의 비용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추격해서 도망간 자들을 잡아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니 초토사가 군공을 적어 의정부에 보고했는데, 장군을 으뜸으로 삼았다. 을미년(乙未年, 1895) 12월에 특별히 해남군수를 제수하였고, 다음해 2월 9일에 부임하였다.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읍의 어진 선비를 찾아갔고 마을에 가서 괴로움을 물어보며 오래 묵은 폐단을 제거하니 구비(口碑)가 길을 메웠다. 이에 앞서 참서 안종수가 군의 일을 대리하여 제멋대로 단발을 시행했는데, 그 형세가 솔개가 날개를 편 것보다 심하였다. 관찰사 채규상이 이미 쫓겨났고, 초토사 영감도 곤경을 당하였으며, 이어서 곤경이 장군에게 이르니, 장군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종수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참봉인 송사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 도내의 진신(縉紳, 관리)과 장보(章甫, 유생)가 모두 호응하였고, 장군이 실로 앞장을 섰다. 완부의 대장 김병욱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는데, 간사한 계책으로 사주를 해서 의병을 모함했기 때문에 화기(禍機)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나주에 이르러 몰래 병사를 보내 해남 관아에 들어와서 공을 결박하여 수레에 태우니, 해당군의 아전과 선비들이 사력을 다해 구하려고 하였다. 공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나는 명리인데,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추국하는 것이 마땅한데 더욱이 잘못을 범한 것이 없는데 있어서야”라고 하였다. 병욱이 와서 한마디 공초도 없이 바로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이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사구(司寇, 형정(刑政)을 맡아보는 관리)도 아니면서 나에게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네가 감히 함부로 죽이려 하는가”라고 하니, 병욱이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군사를 지휘하여 공을 해치니 그 날이 바로 3월 12일이었는데, 바람과 구름이 참담하고 해는 빛이 없었으며 온 성의 선비와 아낙네가 달려와서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3일 동안 불이 끊어졌다. 원근(遠近)에서 공을 알거나 모르는 과객들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나주 정씨는 고려 문정공 설재선생인 가신에게서 처음 시작되었고, 아조(我朝, 조선)에 들어와 영모제 경무공인 식이 중조(中祖)가 되었다. 6대를 전하여 진사인 낙천재 선경이 바로 9세(九世)가 된다. 고조는 이름이 초명으로 수계(壽階, 품계)가 동지(同知)였고, 증조는 이름이 수민으로 참의를 추증받았다. 조부의 이름은 계화로 참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찬기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해주최씨 사륜의 여식이다. 부인은 광산김씨 홍권이 그의 아버지가 된다. 남편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따라가려고 했으나 도리어 늙은 시어머니가 살아계시고 아이들이 방에 가득한 것을 생각하여 차마 죽지 못하고 마침내 가계를 이루었으니 현명하다고 할만하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우찬은 의관이고, 차남 우경(遇卿)은 참봉이며, 또 다른 차남은 우권이다. 장녀는 밀양 박정석에게, 차녀들은 제주(濟州) 양주환과 창녕(昌寧) 조도기에게 시집을 갔다. 난파는 그의 자호이다. 성품이 독실하고 효성스러워서 어머니가 여러 해 동안 큰병을 앓았는데, 밤에는 하늘에 기도하고 낮에는 의술로 치료를 하여 마침내 회복되었다. 동생들에게 우애가 있어서 없는 것과 있는 것을 함께 하여 화기애애한 즐거움을 다하게 하였다. 매우 가난하여 서당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힘을 내어 권장하였고, 온 경내가 기근을 만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진휼을 베풀어 구제하였다. 그 음덕(陰德)과 음공(陰功)은 남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이 몇 가지 일을 보면 어찌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겠는가? 아! 동비의 난리는 옛날에 있었던 적이 없었도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백성의 재산을 탕진하며 연이어 주와 군을 함락시켜서 임금에게 근심을 끼쳤다. 비록 완부가 공고하더라도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고, 병영이 험준하더라도 오히려 적의 소굴이 되었다. 팔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였으나 홍주와 나주만이 온전하여 전라도의 백성이 지금까지 우리 땅을 경작하고 우리 책을 읽는 것은 장군의 힘이 아닌 것이 없다. 조정에서 포상하는 도리로 말한다면, 진실로 공을 이정(彛鼎)에 새기고 이름을 죽백(竹帛)에 써야 할 것이다. 비록 죄를 범했더라도 영원히 용서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장군의 몸조차도 용서를 받지 못했으니 처비지금(萋斐之錦)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 참담하도다! 묘소는 나주의 서쪽 갈마마을 동쪽 산기슭에 갑좌 방향의 언덕에 있다. 장남 우찬이 나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선친이 비도를 토벌한 공에 대해서는 후세에 알릴 수 있으나 원한을 품고 죽은 것에 대해서는 억울함을 풀 길이 없으니 비아(匪莪)한 저의 슬픔은 이에 더욱 간절합니다. 한마디 말을 내려주어 3자(三尺)의 비석에 드러내려고 하니 글을 지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슬퍼하며 응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선친과 서로 안 지가 거의 30년이 되었으나 조금도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어 싸우면 이겨서 공을 이루었다. 지금의 훌륭한 장수는 관인(官印)을 차서 남쪽 멀리까지 명성이 들리지만, 옛날의 선량한 관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수양하고 공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았다. 순전히 군자 같은 사람이 점차로 등용되어 그 포부를 펼치게 되었으나 매얼(媒蘖)이 갑자기 생겨나 중도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비유하면, 그 바다를 도모하던 붕새가 갑자기 그 날개가 꺽이고 장추(長楸)를 달리던 천리마가 도리어 그 발굽이 부러진 것과 같다. 이것이 다만 장군의 불행이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장군의 실제 사실은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에 실려 있고, 또한 초토사 민공의 계문(啓文)에 상세하여 나중에 찾아볼 수가 있다. 어찌 내 말이 있고 없는 것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옛날을 생각하니 차마 끝내 사양할 수가 없다. 여동래(呂東萊)의 글에서 말하기를, “백세(百世)가 지난 뒤에 악무목(岳武穆)의 원망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에 호소하고 싶으나 따를 수가 없다”고 하였고, 문간공(文簡公) 기선생(奇先生)이 지은 고송(孤松) 최공(崔公)의 비문에, “소인배의 무고가 바로 그 사람을 해쳤다고 했으나 끝내는 그 사람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내가 세 번이나 2개의 글을 반복하여 읽고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훔치며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명(銘)하기를, “지혜를 쓴 적이 없으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고,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았으나 남이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어찌 공은 높은데 자리는 낮으며, 어찌 주는 것은 풍성한데 빼앗는 것은 빠른가? 굽어지면 반드시 펴지는 것이 이치이고, 원한은 어디에서나 풀리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단필(丹筆)을 빌려 돌에 새겨 산등성이에 우뚝 세워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상장(上章, 고갑자로 庚) 엄무(閹茂, 고갑자로 戌) 12월 상순에 금성 오계수(吳繼洙)가 짓는다.

주석
정병(正兵)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군대를 말한다.
구비(口碑) 비석에 새긴 것처럼 오래 전해 내려오는 말로 사람들의 칭송을 비유한다.
수계(壽階, 품계) 나이가 많아 나라에서 받는 품계를 말하는 듯하다.
처비지금(萋斐之錦) 처비패금(萋斐貝錦). 조개무늬처럼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남의 사소한 잘못을 모아서 큰 죄처럼 꾸미는 참언을 말한다.
비아(匪莪)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불효를 하였다는 겸손한 말이다.
매얼(媒蘖) 죄를 짓게 유도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말한다.
장추(長楸) 『이소경(離騷經)』에 나오는 말로, 원래 큰 가래나무[楸]를 뜻하지만, 교목(喬木)과 같은 말로 고국(故國)을 가리킨다. 또는 옛날 도성의 큰 길 거리에 가래나무[楸]를 길게 심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서울의 대로(大路)를 말하기도 한다.
여동래(呂東萊) 1137∼1181. 남송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동래(東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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