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군전[鄭將軍傳]
장군 정석진 공의 자는 태완이고 호는 난파이며 세계는 나주이다. 설재 선생 가신은 중국 조정에서 한림학사를 지냈고, 고려조에 문정(文靖)의 시호를 추증받았는데, 이 분이 그 상조(上祖)이다. 영모재 식은 국조(國朝, 조선)에서 벼슬을 하여 병조판서를 지냈고 경무(景武)의 시호를 받았다. 낙천재 선경은 진사를 하였고, 경무(景武) 뒤로 6대를 내려왔는데 공의 9대조다. 고조인 초명은 동중추부사를 지내고, 증조인 수민은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계화는 참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찬기는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해주최씨로 그 부친이 사륜이다. 공은 철종 신해년(辛亥年, 1851)에 태어났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넉넉하며, 문예가 풍부하여 대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려서는 성품이 극진하여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해서 회복을 시켰다. 의사를 한 집안 사람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형제간에 내 것 네 것이 없었고, 종인(宗人)들 간에 화목을 즐겼다. 그 천성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해서 서당에 갈 수 없는 자에게 힘을 내어 도와주었고, 기근이 든 해에 곡식을 내어 백성이 많이 그것에 의지하여 소생하였다. 온전히 갖추어진 행실이 이와 같아서 민종렬 공이 나주에 부임하여 백성의 희망에 따라 일을 맡겼는데, 경제(經濟)의 재주를 갖추었음을 칭찬하였다.
갑오년(甲午年)에 동비가 난리를 일으키니 주군이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졌다. 경병(京兵)의 대관이 장성에서 싸우다가 죽어 그 화가 피부에 닿을 정도가 되니 민공이 방비할 계책을 세우고 장군을 불러서 도통장으로 삼아 모든 군무를 위임하였다. 장군이 의기를 내어 단에 올라 계략을 도운 것이 모두 보통 사람의 의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침탈을 금지하고 호령을 분명히 하니 옛날 명장의 풍모가 있었다. 물러나서 지키고 나아가서 싸웠는데, 7번 싸워 7번을 이겼고 군사들은 손해가 없었다.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소와 술로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서 연로를 침범하니, 장군은 이에 말하기를, “왕토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나주만을 보호하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출전하여 남으로 영암·동보·남평을 구원하고, 그 소굴을 불태웠으며 도망간 자들을 거의 없앴다. 마침 왕사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주의 경내에 들어왔으나 할 일이 없었다. 조정에서 나주의 목사를 초토사로 삼았는데, 군공을 보고할 때에 장군을 원공(元功, 첫 번째 공로)으로 적었다. 초계별단(抄啓別單)의 대략에, “서문의 싸움에서는, 아전과 백성을 엄중히 단속하여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한바탕 크게 싸워서 100여명의 적을 베거나 체포하였으며 군기를 많이 빼앗았습니다. 침산의 싸움에서는, 비도 10,000여 명이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으나 장군이 의사(義士, 의병)를 격려하고 병사보다 앞장서서 포를 쏘며 습격하니 적이 손을 쓰지 못하고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을 가서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무기와 식량을 거두고 그 소굴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용진산의 전투에서는 수만명의 비류가 10리에 집결하여 5∼6개 방(坊, 마을)과 면에서 인적이 모두 끊겼는데, 장군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기습적으로 베고 잡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고막(古幕)의 전투에서는 비도(匪徒)가 숲처럼 많고 그 기세가 불처럼 대단하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했으나 장군이 계책을 내어 승리를 얻었습니다. 먼저 약함을 보였더니 적이 정말로 쉽게 여겨 전진해오자 장군이 용기를 내어 먼저 오르고 매복한 병사가 갑자기 나오니 적들이 모두 부딪히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뒤를 이었습니다. 남산의 전쟁에서는, 적이 여러 번의 패배에 유감을 품고 한번에 갚으려고 세갈래 길로 나누어 왔는데, 그 기세가 마치 물길을 터놓은 것 같았습니다. 장군이 기병을 나누어서 앞에서 돌격할 때에 도망간 자를 추격하여 300명의 머리를 베었고 노획한 총과 칼 및 말과 소가 매우 많았습니다. 어찌 간성의 인재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국가에 일이 많아 상전(賞典)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풍대수(馮大樹)의 겸손이 더욱 드러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을미년(乙未年, 1895)에 처음으로 해남군수를 제수 받았으나 당초 마음은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사태의 기미를 살펴보니 이때에 참서 안종수가 나주의 일을 대리하며 억지로 단발을 시행해서 장군을 압박하니, 장군이 용기를 내어 말하기를,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분노하였고, 또한 의소(義所)에서 편지를 보내 종수의 10가지 죄를 열거하였다. 종수가 끝내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장군에 혐의를 두어 다른 혐의를 꾸미려고 하여 그날 바로 임소에 갔는데, 종수가 정말로 사람들의 손에 죽으니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군(郡, 해남군)에 도착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묻고 어진 선비를 방문하니 한 달이 채 못되어 명성이 성대해졌다. 나중에 적신(賊臣)이 임금을 끼고 의병을 체포했는데, 대관 김병욱이 적의 사주를 받아 살육이 낭자하였다. 나주에 이르러 몰래 병사를 보내 장군을 체포하였다. 이에 앞서 내가 광산(光山)에 주둔했는데, 장군이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진중의 해남유생을 보내 은밀이 장군에게 전하기를, “일을 핑계삼아 바닷길로 서울에 올라가서 화기를 피하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우리는 한 번의 실패로 스스로 무너져서 후일을 도모하지 못해서는 안된다. 의병이 의지할 사람은 장군뿐이니 다른 사람은 죽어도 되지만 장군은 죽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경내의 아전과 백성이 죽을 힘을 다해 구원하려고 했으나 장군은 편안한 마음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를, “나도 명리인데, 비록 죄가 있더라도 반문(盤問)해야 한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어찌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크게 꾸짖기를 “병욱 너는 어떤 사람인가? 적에 붙어 관리가 된 것이 이미 큰 악인데 감히 함부로 죽이니 너는 하늘의 도와 신명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3월 12일에 해를 입으니 온 성의 선비와 아낙네가 달려와서 통곡하였고 3일 동안 불을 지피지 않았으며 장군을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모두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였다. 이 때에 나와 수십명의 의병이 담양의 산속에 있다가 변고를 듣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내가 누구를 의지하여 훗날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하며 여러 날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부인 김씨가 남편의 비명을 애통히 여겨 따라 죽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갑자기 계획을 바꾸어 말하기를, “늙은 시어머니가 집에 계신데 내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고, 어린애가 방에 가득한데 내가 없으면 누가 키우겠는가? 죽은 남편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현명한 남편에 현명한 아내라고 하였다. 아들 3형제, 우찬·우경·우권이 모두 이미 성장하였는데, 날마다 천명을 바라며 말하기를, “비명이 풀어지게 되고, 공이 있는 사람을 해친 자가 나라의 법에 처벌을 받게 된다면 구원(九原)에서 눈을 감지 못한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입니다. 저희들의 평생 원한도 조금 풀어질 것입니다. 세상 변화가 흐르는 물처럼 더욱 심해지니 당시에 기필할 수 없었던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내세에 혹시 풀 수 있는 것은 군자들의 신필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석(後石) 오준선이 행장을, 난와(難窩) 오계수가 비명을 썼다.
나도 함께 의병을 한 사람이었는데,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전후(殿後) 한천자(寒泉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문교(文敎)가 지금까지 500년 동안 매우 아름답게 빛났으나 무너져서 이단이 날로 극성해졌다. 동비라는 것은 더욱 심하여 인심을 무너뜨려 백성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홍수와 맹수 같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은 백성답지 못하고 나라는 나라답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난리를 선동하여 팔도가 무너졌는데, 성을 지켜서 싸워 그들을 몰아내려고 한 곳은 호서에서는 홍주이고, 호남에서는 나주뿐이다. 7번을 싸워 1번도 패하지 않은 곳은 나주만이 그랬다. 누가 주장하였는가? 바로 초토사 민공이 사람을 알아보고 잘 부려서 장군으로 하여금 그 충의와 지모를 펴게 했을 뿐이다. 아! 당시의 일은 내가 직접 본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장군이 없으면 나주가 없고, 나주가 없으면 호남은 호남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계책도 졸렬해졌을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땅을 경작하고 우리 책을 읽게 만든 것이 비록 장군의 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위해 계책하는 자는 그 사람을 포상하고 높여야 하며 자손까지 용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은 그 공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에 붙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여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나라를 위한 계책이 오늘날에 무너지게 된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후석(後石, 오준선)은 고려의 김원수(金元帥, 김득배)가 간신에게 모함을 받았는데, 포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이 곡하기를, “마침내 태산 같은 공이 칼날의 피로 바뀌었다”라고 한 글을 인용하였고, 난와(難窩, 오계수)는 여동래가 말한 “백세가 지난 뒤에 늘 악무목의 원통함을 생각하여 바로 하늘에 호소하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다”는 글을 인용한 것은, 서로 비교한 것이 합당함을 얻었다. 장군은 지와 덕을 갖추어 백세를 기다리지 않아도 논의가 이미 정해졌다고 할만하다. 더욱이 간성의 인재라는 칭찬은 민초토사의 보고에 근거가 있고, 세상에 없는 공훈이라는 칭송은 조전운사(趙轉運使)가 억울함을 호소한 데에 실려 있으며, 억울함을 풀어주고 장려해야 한다는 요청은 이직지의 밀계(密啓)가 있어 살펴보기에 충분하다. 공을 죽인 자에게 현륙(顯戮)과 음주(陰誅, 하늘이 내리는 벌)가 내려지는 것은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받은 화가 지독할수록 향기가 더욱 드러난다는 내 선친의 말이 구원에 있는 공을 위로할 것이다. 아! 나라를 위한 계책이 오늘과 같이 어려우니, 반드시 죽지 않는 넋이 있어 긴 무지개로 변하여 날마다 갈마의 들판을 오르내리고, 그 기운을 바라보는 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숭정 후 5번째 신해년(辛亥年, 1911) 행주(幸州) 기우만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