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남의 기사 [金吾南記事]
천하의 의리를 실천한 선비가 어찌 한도가 있겠는가? 의리를 실천한 이름은 있으나 그것을 실천한 실제가 없는 자는 선비 사이에 끼는데 부족할 것이다.
우리 강진현의 김오남(金吾南, 김한섭)은 일찍이 고산(鼓山) 임선생(任先生)의 문하에 수학(受學)하여 여러 해 동안 있으면서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오남(吾南)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선생이 그를 가상히 여겨 ‘오도남(吾道南)’의 뜻을 취하여 그에게 호(號)를 주었다. 오남은 다시 중암(重庵) 김선생에게 쫓아가서 수십년 동안 한결같이 하여 성리학에 더욱 정통하였고, 심지어 의(義)와 리(利)의 분석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으며 문장도 출중하고 덕행이 온전히 갖추어졌다. 성품도 부드럽고 온화하여 사람을 보아 비록 포폄(褒貶)이 없지 않더라도 반드시 좋은 얼굴로 대하고 끝내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기뻐하며 따랐다.
옛날 대명동(大明洞)에 살 때에 내가 찾아가서 매우 존중을 받았다. 수양촌(首陽村)으로 이사했을 때에 의심나는 것이 있어 바로 찾아가면 심지어 불을 밝히고 밤새 강론을 그치지 않아 내가 얻은 것이 약간 있었다. 오남도 여러 차례 내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법도가 아닌 것이 없었고, 그 갈고 닦은 공부는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그래서 저절로 물이 이르러 배가 뜨는 날이 있고 물결위에 달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바다를 바라보며 크게 감탄하게 하였다. 이것이 참으로 남쪽에서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큰 바람이었다.
갑오년(甲午年, 1894)에 비류(匪類)가 봉기하고 사설(邪說)이 어지럽게 퍼지니 오남은 그 무리를 제거하여 물이 졸졸 흐르는 초기에 막는 것과 같이 하늘을 뒤덮는 그 기원을 막으려고 했는데, 운수인가? 운명인가? 끝내 적의 참혹한 칼날에 불행을 당했으니 의(義)가 아니면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대저 선비는 선도(善道)를 사수(死守)하는 자로 진실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는 없다. 어찌 밖에서 구하기를 바라는가? 더욱이 포의(布衣)로 국난에 목숨을 바쳐 죽는 것은 당연히 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상대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의기(義氣)가 없다면 어찌 선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선비가 배운 것은 단지 의리일 뿐이다. 의리가 있는 곳에 의기(義氣)도 따른다”고 하였다.
그 때에 태수(太守, 강진현감) 이규하(李奎夏)가 1개 면(面)의 병사를 그에게 통솔하게 하였는데, 그 의(義)가 사람들과 다른 것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한 그에게 병사를 인솔하여 그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휘하의 병사가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그를 따른 것도 그의 의(義)가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 때에 수령이라는 자들 중에 의(義)를 망각하고 적에 붙거나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자가 있었으나 오남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죽었다. 내가 차라리 의기(義氣)가 있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될지언정 의기가 없는 벼슬아치가 되지 않겠다는 그대의 말처럼 하였다. 지난 번 임진왜란의 변고에 의병을 일으킨 자가 대부분 백면서생이었는데, 생각컨대 모두 그른 것인가? 지금 그 문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일을 맡은 자가 누구인가? 의(義)에 깊은 자가 아니면 그 때의 일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