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인 진사 학영이 성균관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는 글[賀宗人進士學英升庠文]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렵다. 여강(廬江)의 모의(毛義)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한 것은 참으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대가 머리를 늘어뜨린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기약해서 정말로 30의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뜻이 있으면 일은 끝내 이루어진다고 할만하다. 난삼(幱衫)과 복두(幞頭)는 햇빛에 빛나 빛을 다투고, 화동(花童)과 옥피리가 가마를 둘러싸고 길을 메웠다. 곡강(曲江)의 연회와 자은(慈恩)의 명성은 옛날보다 아름다울 뿐만이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부모를 뵈올 때에 그 부모가 등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내 자식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선조가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대가 입신(立身)한 것은 아름답다고 할 만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한 것은 지극하다고 할만하다. 우리 고향에서 입신양명한 자는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가 없으나 노년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이루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대의 공명(功名)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그 나이에 부모를 영화롭게 한 것은 진실로 미칠 수가 없다. 내 나이가 40이 넘어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성취하지 못했는데, 장래에 이런 경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그대가 조금 성취한 것이 분수안의 일임을 알고 있어 축하할 것이 못되나 관리가 되는 일은 조정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당대의 정치를 도야(陶冶)하는 것은 실제로 여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다만 그것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