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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부록[附錄]

행장[行狀]

갑오년(甲午年, 1894)에 동학의 적들이 일어나 유혹하고 위협하니, 당대의 평소 사대부(士大夫)라고 불리는 자들 중에 그것을 모면한 자가 드물었다. 그 때에 연파(蓮坡) 김선생은 용강서숙(龍岡書塾)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학생을 불러 말하기를, “만약에 사악한 얘기에 물든 자가 있다면 북을 쳐서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내 약조(約條)를 적어 벽에 걸었는데, 그 말이 늠름하고 골수에 스며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들이 창궐하여 주(州)와 군(郡)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호남의 태반이 적의 소굴이 되었다. 선생은 전 도정(前 都正) 박창현(朴昌鉉)·전 진사(前 進士) 김병윤(金柄潤)과 함께 의거(義擧)를 도모하고, 주관(主官, 수령)에게 포군(砲軍) 100명을 받아 밤을 이용하여 적의 우두머리가 있는 소굴을 직접 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되었으나 주관(主官)이 끝내 약속을 실천하지 않아 선생은 매우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 해 겨울의 12월에 적이 장흥(長興)을 도륙하고 부사 박헌양(朴憲陽)을 살해한 뒤에 앞을 향해 달려서 다시 강진(康津)을 함락시킬 때에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선생은 도총장(都摠將)으로 적을 꾸짖고 죽었다. 적이 다시 진격하여 강진병영을 포위하니, 병사(兵使) 서(徐) 아무개는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나, 군기관(軍器官) 김극경(金克敬)은 화약고(火藥庫)에 들어가서 불지르고 자폭(自暴)하였다. 박창현은 직접 적 수십명을 대적하다가 죽었고, 선생도 거의 이 화(禍)을 면하지 못하였다. 비록 여러 공(公)들과 생사(生死)를 함께 하지 못했으나 그가 의(義)를 견지한 것은 역시 다르지가 않았다.
선생의 이름은 병휘(柄輝)이고 자(字)는 민오(玟五)이며 연파(蓮坡)는 그의 호이다. 김해(金海) 김씨는 가락국(駕洛國)의 임금에게서 나왔다. 고려(高麗)때에 도총관(都摠管) 경신(敬臣)이 그의 중조(中祖)이다. 총관(摠管)의 증손(曾孫)은 종부시사(宗簿寺事)인 방려(方礪)로서 호는 축은(築隱)이며 큰 절개가 있었다. 축은(築隱)의 손자인 계희(係熙)는 세종때에 관직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장릉(莊陵)이 왕위를 세조에게 양보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퇴은(退隱)’이라고 하였다. 퇴은의 손자인 극검(克儉)은 호가 여헌(汝軒)이고 호조판서를 지냈다. 여헌의 현손(玄孫)인 □는 호가 절옹(節翁)이고 문학(文學)과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며 옥구현감(沃溝縣監)을 지냈다. 이들이 김씨 집안의 4현(四賢)으로 사림(士林)이 장흥 안량면(安良面) 양사리(養士里)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절옹(節翁)의 증손인 훈련주부(訓鍊主簿) 신남(信南)은 보성(寶城)에서 장흥으로 옮기고 명(命)을 낳았다. 다시 강진으로 옮겼는데, 선생에게 8세(八世)가 되는 선조이다. 진사(進士)인 오일(五一)은 호가 매계(梅溪)이고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그의 묘(墓)에 비명(碑銘)을 썼다. 이름이 일수(鎰壽)인 선조는 호가 유촌(柳村)이고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지냈는데, 바로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맹영(孟永)이고 조부는 석성(錫聖)이다. 아버지는 노택(魯澤)이고 호가 죽헌(竹軒)인데, 숨은 덕이 있었다. 일신(日新) 정처사(鄭處士) 의림(義林)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어머니 경주이씨는 경묵(敬黙)의 여식으로 부덕(婦德)이 드러나서 알려졌다. 헌종 8년 임인년(壬寅年, 1842) 8월 3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선생을 강진(康津) 용두리(龍頭里) 집에서 낳았다. 모습이 단정하고, 천성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납게 성내지를 않았다. 앉을 때는 반드시 바르게 앉고, 다닐 때는 찬찬하여 타고난 것 같았다. 6살에 천자문을 배워 음과 뜻을 배송(背誦)하여 틀리지가 않았다. 8살에 소학(小學)에 들어갔고, 10살에 대학(大學)·중용(中庸)을 읽었다. 이때부터 경사(經史)의 여러 책들에 힘을 쏟아 문리(文理)가 확 트여 동료들이 감히 비교하지를 못하였다. 부모를 모시는데 마음을 공손히 하고 삼가서 부모의 명(命)이 있으면 비록 하고 싶지 않은 것이더라도 감히 어기지 않았다.
철종 12년 계해(癸亥)에 죽헌공(竹軒公)이 병으로 누웠는데, 선생은 밤마다 하늘을 보며 대신하기를 바랐다. 고종 2년 을축년(乙丑年, 1865)에 부친상(喪)을 당하자 너무 슬퍼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무진년(戊辰年, 1868)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애통해하기를 이전의 상(喪)때와 한결같았다. 부모님의 묘소와 집 사이의 거리가 몇 리(里)가 되었으나 왕래하여 살펴서 산의 좁은 길이 큰 길이 되었고 비가 심하게 오지 않으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임오년(壬午年, 1882)에 경군(京軍)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여러 날 술과 고기를 들지 않았고, 갑신년(甲申年, 1884)에 상감이 이동함에 선생은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침식(寢食)을 그만둘 정도였으니,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공부를 하여 명성이 있었으나 과거시험은 합격하지 못하고 중년(中年)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세상의 도(道)가 날로 변하는 것을 보고 과거(科擧)에 나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는 마침내 성리학의 책에 깊이 심취하여 마음에 깨닫는 곳이 있으면 기뻐서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연재(淵齋)선생의 문하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오남(吾南)·일신(日新)과 함께 도의(道義)로 사귀어 왕래하며 의문나는 것을 강론하고 더 이상 장옥(場屋)의 득실(得失)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때부터 배우는 자들이 모여들어 매우 성대해졌다. 나의 선친이고 이름이 재환(在煥)이고 호가 아경(雅敬)인 참판공(參判公)이 내게 선생에게 배우도록 명(命)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속에 변화를 받지 않는 자가 드물다. 진실로 세속과 크게 다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마을에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사는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선생이 의리(義理)로 상세히 비유해주어 그 사람이 깨달아서 그만두었다. 과부 김씨의 행실이 매우 뛰어났는데, 선생이 이것을 덮어두어서는 안된다고 여겨 빨리 그 사실을 드러내었다. 선비 박기현(朴冀鉉)이 문학(文學)과 효행(孝行)이 세상에 모범이 되었는데, 선생이 약장(約長)이 되었을 때에 특별히 그 일을 기록하여 장려해서 풍속을 한편 격려하였다. 그가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한 것이 늘 이런 경우가 많았다. 계묘년(癸卯年, 1903) 1월 23일에 죽으니 향년(享年) 62세였다. 문인(門人) 최방현(崔芳鉉) 등이 상(喪)을 예(禮)에 따라 치루어 달을 넘겨 장흥군 이마산(离馬山) 제동동(齊東洞) 경좌(庚坐)의 언덕에 묻었다가 선친의 묘소로 옮겼다. 부인(婦人)은 인천(仁川) 이석방(李錫房)의 여식으로 공도공(恭度公) 문화(文和)의 후손이다. 장남은 종환(鍾煥)이고 차남은 경환(鏡煥)이다. 종환은 주학(胄鶴)과 주빈(胄彬)를 낳았고, 경환은 주봉(胄琫)과 주신(胄臣)을 낳았다.
아! 선생은 명문(名門)의 후예로서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몸가짐이 돈독하고 문사(文詞)가 맑고 화려하여 당대에 이름이 있었으나 중년의 나이가 넘었는데도 다시 큰선비의 문하에 머리를 숙이고 배우러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보통사람을 크게 능가하는 타고난 자질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것에 이를 수 있겠는가? 사도(邪道)를 배척한 큰 절개가 지금까지 늠름하여 생기가 있다. 세상의 교화에 어찌 약간의 보탬만이 있었다고 말하겠는가? 선생이 죽은지 11년이 지난 계축년(癸丑年, 1913)에 문인(門人)들이 선생의 유고(遺稿)를 모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선생의 집에 가서 대략 교정을 하였다. 서로 돈을 내어 활자로 찍어 세상에 배포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이 유고를 인쇄하는 날에 선생의 행적을 적어 그 뒤에 싣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내가 이 일에 종사한 것이 오래 되어 행장(行狀)을 쓰게 되었다. 내가 학식이 일천하여 진실로 선생의 만(萬)에 하나라도 그려내기에 부족하지만 평소에 자식처럼 살펴주신 덕의(德義)를 추모하여 감히 끝내 글재주가 없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다음과 같이 지어서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을 기다린다.
계축년(癸丑年, 1913) 3월 16일 문인(門人) 종생(宗生) 김찬석(金璨錫)이 삼가 글을 짓는다.

주석
철종 12년 계해(癸亥) 철종 12년은 신유(辛酉)년으로 1861년이다. 잘못 적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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