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 종림의 갑오년 사장[宗人鍾淋甲午事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비분강개하여 자신을 버리는 것은 쉽고 조용히 의(義)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비분강개하거나 조용한 것이 비록 쉽거나 어려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 충성도 동일하다. 금릉현(金陵縣, 강진)의 북쪽 계산리(桂山里)는 나의 종인(宗人)인 종림(鍾淋)의 몇 대가 살던 땅이다.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의로운 기운이 넘쳐나고 효제(孝悌)에 돈독하였다. 초(楚)의 노래자(老萊子)가 춤을 추어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고 동소남(董召南)이 고기잡이와 나무를 해서 맛있는 것을 드린 것과 비교하여 실제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갑오년(甲午年, 1984) 동도(東徒)와 사악한 놈들이 역당(逆黨)을 불러 모아 여러 개의 군(郡)들을 연이어 무너뜨렸다. 장흥(長興)은 수령인 박헌양(朴憲陽) 공(公)이 죽었고, 강진(康津)은 처사(處士) 김한섭(金漢燮)이 유림(儒林)의 도총장으로 해를 입었다. 며칠만에 적이 다시 병영(兵營)을 함락시켰는데, 그 때에 성을 지키던 병사는 무려 수천명이었다. 그러나 종림(鍾淋)은 자신의 형 종형(鍾珩)과 함께 의기(義氣)를 견디지 못하고 칼과 창을 잡고 고립된 성을 지켰다. 갑자기 형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의리상 혼자 살 수는 없다고 여겨 직접 칼을 빼들고 몸을 빼쳐 적에게 달려가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 때 나이가 28세였다.
아!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이고, 목숨을 버리고 의를 선택하는 것은 사람의 훌륭한 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버리는 데 가볍고, 의를 선택하는 데 신중히 하였다. 만약 일찍이 이런 처신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종인(宗人) 종연(鍾淵)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친척으로 그의 단명(短命)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훔치며 나에게 몇 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나도 서글픔을 느껴 그 사실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