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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

금상(今上) 갑오년(甲午年, 1894)에 호서와 호남에서 일어난 적이 사설(邪說)과 주문(呪文)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나약한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평소 절의(節義)로 죽기를 작정한 자가 아니면 서로 이끌어 한패가 되어 공사(公私)간의 포(砲)·말(馬)·돈·곡식 등을 마음대로 약탈하였다. 그러나 군현(郡縣)은 바라만 보고 성문을 열어 바쳐서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義)를 부여잡고 대항해서 방략(方略)을 세워 적을 섬멸한 곳으로 호서에서는 홍주(洪州)이며, 호남에서는 나주(羅州)가 있었다. 홍주는 거리가 멀어서 상세히 알 수가 없었으나, 나주는 인접하여 숨소리를 들을 정도여서 소식을 듣는 것이 보는 것과 같았다. 당시에 정도(正道)를 믿는 쪽은 나주에 의지하는 것이 마치 두극(斗極, 북두칠성과 북극성)과 같았고, 사악한 쪽은 나주를 꺼리는 것이 마치 등에 난 가시와 눈 안에 못과 같았다. 정도(正道)를 믿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사도(邪道)를 꺼리는 것이 저와 같았다.
나주의 목사는 바로 민종렬(閔種烈) 공(公)으로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나주에 와서 향약(鄕約)으로 인솔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알게 하여 정도를 지지하고 사도를 없애는 것을 의로 삼았다. 충효의 풍속이 쉽게 떨쳐 일어나게 하였고, 주(州)의 선비는 나주에 와서 일을 맡아 성을 지키는데 다른 마음이 없었다. 남쪽의 주(州) 50개가 사비(邪匪)의 소굴이 되었음에도 1개의 고립된 성을 다시 회복하고 도를 지키는 터전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이 정말로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에 적(賊)이 고부(古阜)에서 영병(營兵)을 물리치고 바로 나주의 서쪽 경계에 이르러서 편지를 보냈는데, 매우 패악스러웠다. 공이 그 편지의 뒤에 쓰기를, “명분이 없는 군대는 법에 있어 당연히 죽여야 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하여 물리치니, 적은 기세가 꺽여서 몇 십리를 물러났다. 아! 이것이 비록 적막한 16글자의 말이더라도 글의 필봉이 도끼보다 엄중하여 막 오고 있던 수만의 예봉을 꺾어 버릴 수 있었다. 진실로 바른 기운이 있는 곳에 도깨비가 모습을 감추고, 나중에 그들을 소탕하는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때에 임금의 군대가 영광(靈光)으로 내려가서 적과 장성(長城)에서 전투를 벌이다 대관(隊官)이 순절(殉節)하고 윤사(綸使)가 조롱을 받아 죽게 되니 반역의 기미가 더욱 드러나서 조금도 용서할 기대가 없게 되었다. 농민군이 바로 달려가서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임금의 군대가 가까이 가니 적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간 것을 알아 귀화를 애걸하며 성(城)을 나왔다. 그럼에도 저들은 더욱 꺼리낌이 없었고, 더욱 늘어나서 잔악함이 심했으나, 나주는 그들의 뒤를 밟아 힘을 합쳐 유린할 계획을 세우지 못하였다.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이길 수 없음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공(公)이 계획을 세워 성을 지킬 때에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기무(機務)를 처리하고, 진영의 병사를 내어 뒤에서 후원하여 공적을 이루었다. 주승(州丞) 박상수(朴祥壽)는 아래와 위를 이어주고 군령의 복종과 위배를 감독하여 말하기를, “정태완(鄭台完) 너는 도통장(都統將)으로, 김재환(金在煥) 너는 부통장(副統將)을 맡아 상대를 잘 헤아려서 훌륭한 계책으로 승리하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다. 손상문(孫商文) 너는 도위장(都尉將)을 맡아 군대의 수요에 맞추어 식량과 병기를 조달하여 공을 이루게 하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다. 김성진(金聲振) 너는 중군(中軍)을 맡아 군령(軍令)을 분명히 하고, 전진과 중지를 훈련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우게 하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다. 김창균(金蒼均) 너는 통찰(統察)을 맡아 군대 전체가 명에 따르는지 여부를 모두 감찰하라. 전학권(錢學權) 너는 별장(別將)을 맡아 네 포군(砲軍)을 인솔하여 파수(把守)를 근실하게 하고, 군대가 나가면 뒤를 막아라. 박근욱(朴根郁) 너는 별장(別將)을 맡아 서문을 지켜라. 문락삼(文洛三) 너는 별장을 맡아 북문을 지켜라. 박윤칠(朴允七) 너는 별장을 맡아 동문을 지켜라. 문관후(文寬厚)와 박경욱(朴京郁) 너희들은 모두 별장을 맡아 남문을 지켜라. 적이 들어오는 곳도 문이고 군대가 나가는 곳도 문이다. 적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군대가 나가는 것을 근실히 하는 것이 너희들의 일이다. 모든 출입에 있어 수상한 자를 막아 적의 간첩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희만이 살필 수 있다. 최윤용(崔允龍)·박성노(朴成老)·김석균(金錫均)·박윤홍(朴允弘)·박관욱(朴寬郁)·오득환(吳得煥)·서연권(徐然權)·오화준(吳華準)·박상욱(朴尙郁)·최용환(崔鎔煥)·박두영(朴斗瑛)·양남중(梁南中)·손유택(孫有澤)·오득제(吳得濟)·박봉년(朴琫年)·박규년(朴珪年)·김양문(金良文)·이춘익(李春益) 너희들은 모두 별초군관(別哨軍官)을 맡아 각기 너희 부대를 인솔하여 방비를 근실히 하라. 적이 오면 전진하여 사기를 북돋우고, 뒤에서 후원하여 그 때를 놓치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가상히 여길 것이다. 김학술(金學述) 너는 참장(參將)이다. 박시홍(朴時泓) 너는 참모(參謀)이다. 구유술(具有述) 너는 군물(軍物)을 맡아라. 장길한(張佶翰)·이돈기(李敦祺) 너희들은 모두 첩부(牒簿)를 맡아라. 양인환(梁仁煥)·최문섭(崔文燮) 너희들은 서기(書記)를 맡아 각기 네 직무를 하여 군무(軍務)를 도와라. 김근환(金根煥) 너는 병방색(兵房色)이고, 기학연(奇學衍) 너는 도훈도(都訓導)로서, 모두들 점군(點軍)을 맡아 오는 것을 칭찬하고 가는 것을 권면하며 군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어기는 자는 부끄럽게 하라. 최일봉(崔一鳳)·김진해(金振海) 너희들은 별군색(別軍色)으로 모두 척후(斥堠)를 맡는데, 상세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손동혁(孫東奕)·장봉삼(張鳳三)·정한탁(丁漢卓) 너희들은 정탐(偵探)을 맡는데, 조심하고 비밀스럽게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양화영(梁華永)·나금만(羅錦滿)·김일운(金日運 )너희들은 수부(需簿, 물품명부)를 맡는데, 청렴하고 결백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최성순(崔成純) 너는 천총(千摠)이고, 윤용성(尹龍成) 너는 파총(把摠)으로 모두 행군(行軍)을 맡아 포(砲)와 돌을 무릅쓰고 병사를 위해 앞장을 서면 사람들이 모두 너희를 추대할 것이다. 승용규(昇龍奎)·손치홍(孫致洪)·나학곤(羅學坤) 너희들은 첩(堞)을 수리하는 일을 맡아라. 성첩(城堞)을 수리하지 않으면 군과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다. 고덕봉(高德鳳) 너는 도집사(都執事)로 모든 군무(軍務)의 크고 작은 일들을 네가 맡아라. 전공서(錢公瑞)·김기옥(金基玉) 너희들은 별군관(別軍官)으로 진격만 알고 후퇴는 모르며 부대를 감독하여 흩어지는 적을 추격하여 체포하라. 박수협(朴守俠)·김양규(金陽奎)·정석완(鄭錫完)·양상언(梁相彦)·김홍재(金洪在)·박흥주(朴興株)·안공찬(安孔燦) 너희들은 순초(巡哨)로서 초(哨)들을 돌며 타일러서 각기 힘을 다하도록 하라. 윤기문(尹起文) 너는 군기(軍器)를 맡아 갑옷과 투구를 잘 수선하고 창과 방패를 갈아서 감히 근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 강춘삼(姜春三) 너는 용감하고 힘이 세니 대포를 가지고 선봉이 되어 적의 예봉을 꺽어라. 최경봉(崔慶鳳) 너는 힘을 다해 구원하고 따로 포군(砲軍)을 인솔하라. 김준보(金俊甫)·박흥연(朴興淵)·정일서(鄭日西)·허치관(許致寬) 너희들은 기패관(旗牌官)으로 4개 문에 나누어 함께 지켜라. 너희 68명은 공(公)이 수족(手足)과 같은 부대로 여겨 너희를 두목으로 삼았다. 적을 섬멸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희에게 달려있고, 적을 놓아주어 임금에게 근심을 남기는 것도 너희에게 달려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바칠 것을 원하였다. 그래서 의로운 기운이 성 안에 넘쳤다. 의로운 소리가 사람에게 퍼지고, 적도 간담이 떨어져서 기세가 다하였다.
이 때에 나주의 선비들도 의병을 일으켜 안팎에서 도울 계획을 세웠다. 유기연(柳紀淵)·민주식(閔周植)·유병식(柳秉植)·박훈양(朴薰陽)·임노규(林魯圭)·오석환(吳碩煥)·나사집(羅史集)·임병한(林秉翰)·정재형(鄭在衡)·나도현(羅燾鉉)·이기우(李淇宇)가 바로 그 두령(頭領)으로 다른 읍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의 사기가 날로 쌓여 1명이 100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모두 한번 싸우기를 바랬다.
무안(務安)에서 적(敵)을 만나 여춘(汝春)이 죽음을 당했고, 두 번째는 서문에서 승리하여 경선(敬善)이 밤에 도망을 갔으며, 세 번째는 사창(社倉)에서 이겨 그 소굴을 태워 없앴고, 네 번째는 용진산(聳珍山)에서 이겨 오권선(吳權善)이 겨우 죽음을 모면하였다. 다섯 번째는 고막(古幕)에서 승리하였는데, 패배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 여섯 번째는 남산(南山)에서 이겨 적이 멀리서 보고 저절로 무너졌다. 공(公)은 군대를 낼 때에 늘 많이 죽이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적이 도망을 가면 그만두고 끝까지 추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위협에 따른 사람은 귀화를 시키고 무기와 깃발을 마침내 빼앗으니 적도 사기가 떨어져서 다시 일어날 힘이 없었다.
그 때 마침 임금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바로 소굴을 공격하여 거괴(巨魁)를 죽였다. 임금께서 공(公)이 아래로 흘러가는 물결에 지주(砥柱)가 된 것을 가상히 여겨서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를 더하고 아직 해산하지 않은 남은 적을 추궁하도록 하였다. 영장(營將) 이하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 차등이 있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아직 거행되지 못하였다.
아! 지금 적이 창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9달 동안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처럼 짓밟혔는데, 마치 끝없는 홍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처럼 신속할 줄을 어찌 저들이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나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공(公)이 없었으면 나주가 없었으며, 호남의 백성이 밥을 먹고 물을 마셔 한줄기 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그의 공(功)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노래하여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 마땅한 데도, 공은 그것을 차지하지 않고 오히려 임금의 영명(靈明)한 데에 돌리며 인화(人和)를 끝내 실천하였다. 또한 의기(義氣)를 낸 장리(將吏)에게 아름다움을 양보하였다. 여러 읍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성문을 열어 바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장리(將吏)가 먼저 물들어 재앙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공(公)이 아름다움을 양보한 것은 정말로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주(州)의 선비들이 돌에 새겨 그것을 노래하고, 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록하고 명(銘)을 짓게 하였다. 선비 양상태(梁相泰)가 장명(將命)을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국조(國朝) 500년 동안 문교(文敎)가 융성하였고,
융성함이 오래되어 바뀌거나 다른 말로 무너졌네.
주(周)나라의 노자(老子)와 한(漢)나라의 석가 같은 이가
색은(索隱)을 기술한 것이
나중에 근심거리가 되기도 하였네.
지금 사악한 것은
옛날에도 의지할 것이 못되었고
어리석은 자가 무리를 이뤄
난리를 일으켰네.
매우 현명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들이
번성하여 무리를 이뤄
재앙의 씨와 재난을 당할 빌미는
양호(兩湖)가 그 소굴이었네.
멀리서 바라보고 분주하게 움직이니
군현(郡縣)은 다가가지 못했고
임금의 군대를 거역하여
전주성을 무너뜨려 차지하였네.
홀연히 금악(錦嶽)만이
우리 남쪽의 기강(紀綱)을 지켰네.
목사 민공(閔公)은
눕거나 일어날 때 칼을 만졌고
진정시키는데 장수의 풍모와
의기(義氣)가 함께 있었으며
주승(州丞)과 아전이 직접 힘을 다했네.
적이 틈을 보아 보낸 편지의 말이 패악스러웠는데,
뒷면에 적은 16자의 글자는
적의 등에 땀이 젖게 하니
다른 날 그들을 소탕할 조짐이 여기에 있었네.
전체 호남이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을
그가 아니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전주성을 포위하고 남쪽이 무너질 때
그들을 아끼어 공격하지 않았으나
마치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처럼
두려워서 따르지 못하니,
공이 “괜찮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불쌍하다”고 하였다.
면주(綿州)에서 적을 만나
그 수괴를 죽였고
서문(西門)의 승리와 사창(社倉)의 일로
적의 예봉을 꺽고 그 소굴을 추궁하여
용진산(聳珍山)까지 추격하고
고막(古幕)에서 모두 쓸어버네.
적은 남산(南山)에서 밤에 달아나고
바람소리와 학울음 소리에 적들이 놀랐네
공이, “추궁하지 말라.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은 불쌍하다”고 하였다.
기세가 막히고 간담이 떨어져 꺽여 버렸는데
임금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 정치를 추궁하니
공(公)이 호소하여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네.
자신(自新)을
허락했으나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였네.
적이 평정되고 사교(邪敎)가 없어진 것이
빠르고 더디지 않았네.
나라에 있어서는 기둥이고
선비로서 지주(砥柱)와 같았네.
공(公)은 임금의 영명함을 말하고
태수(太守)의 공(功)으로 삼지 않아
끝내 인화(人和)를 실행 하였네
아전 누구누구에게
덕(德)을 돌리고 아름다움을 양보하여
그래서 명성이 있게 되었네
돌에 새겨 노래하니
하늘·땅과 함께 하리라

주석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 이 비는 현재 나주 금성관(錦城館) 구내에 보존되어 있다. 금성관은 나주의 관아의 건물 이름이었는데 이곳에 일제시기와 해방 뒤 나주군청을 두었다.
처음에 적(賊)이 고부(古阜)에서 영병(營兵)을 물리치고 농민군이 고부의 황토현에서 이해 4월 6일 전라감영의 군대와 접전해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투를 말한다.
편지 농민군은 고부에서 남하해 고창 영광을 거쳤는데 장성으로 진출하는 도중, 4월 18일 나주 공형(公兄)에게 편지를 보내 농민군을 압제하지 말고 협조하라고 일렀다. 민종렬은 이를 거절하는 회답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장성(長城)에서 전투 이해 4월 23일, 농민군이 장성 월평에서 주둔해 있을 때 후방에서 추격해온 장위영병과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고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다.
윤사(綸使) 윤사는 임금의 명을 적은 윤음을 받들고 특별히 보낸 사신. 당시 고종은 선전관 이효응과 배은환을 전봉준에게 보냈는데 이들은 4월 25일 금구의 원평에서 전봉준을 만났으나 전봉준은 이들을 살해했다.
임금의 군대가 가까이 가니 적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간 것을 알아 귀화를 애걸하며 성(城)을 나왔다. 전주성을 차지한 농민군은 관군과 몇 차례 접전을 벌인 뒤 5월 8일 화약을 맺고 전주에서 후퇴한 사실을 말한다.
참장(參將) 장교 계급의 하나로 부장(副將)의 다음이며 장관(將官)중에 최하위 계급이다.
무안(務安)에서 적(敵)을 만나 무안접주 배상옥과 함평접주 이화삼이 지휘하는 농민군이 연합해 목포 함평 등지를 공격했는데 나주 영병(수성군)이 출동해 접전을 벌였다.
서문에서 승리 광주에 주둔해 있던 최경선과 나주접주 오권선은 집강소 기간, 나주 관아를 점령키 위해 나주농민군을 모아 나주 서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사창(社倉)에서 이겨 남쪽 농민군은 임치진의 서창(西倉)에 있는 사창을 공격해 저장한 곡식을 수거했고 연이어 고막리로 나와 11월 11일 나주수성군과 접전을 벌였다.
용진산(聳珍山)에서 이겨 용진산은 광주와 나주 사이에 있는 산. 이곳에서 11월 10일 두 진용이 접전을 벌여 일진일퇴했으나 끝내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은 패주했다.
고막(古幕)에서 승리 고막포(현재 함평 학교면)는 나주 외곽 30여리 지점에 있는 작은 포구이다. 배상옥이 이끄는 농민군은 11월 18일 이곳에 이르러 나주수성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산(南山)에서 이겨 광주에 후퇴해 있던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은 수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11월 23일과 24일 사이, 나주 금암면 남산촌에 집결해서 나주관아 북문을 공격해 여러차례 공방전을 벌인 끝에 후퇴했다.
임금의 군대 장위영 좌선봉장인 이규태는 일본군 1백여 명과 합세해 나주 함평 무안 장흥일대를 석권했다. 이들 관군은 농민군을 철저하게 토벌했다.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 이해 9월 29일 호남소모사로 임명된 뒤 다시 10월 28일 호남초토사로 임명되어 이 지역 토벌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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