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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좌승지에 추증된 선전관 이공의 순의비 [宣傳官 贈左承旨李公殉義碑]

아! 이 장성(長城) 관아의 서쪽 10리에 있는 신현(莘峴)은 선전관(宣傳官) 이학승(李學承) 공이 순절한 곳이다. 예전의 갑오년(甲午년, 1894)에 동적(東賊)이 호남에 창궐하여 군현(郡縣)을 연이어 함락해서 지나는 곳의 인민이 거의 어육(魚肉)처럼 피폐해졌다. 조정에서 홍계훈(洪啓薰)을 차출하여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병사를 인솔해서 공격하게 하였다. 공은 장위영 대관(壯衛營隊官)으로 군대를 따라 영광(靈光)에 주둔할 때에 적도(賊徒) 수만명이 장성의 월평(月坪)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이 200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선봉이 되어 물을 끼고 싸워서 적 100여명을 베었으나, 적은 수로 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고 대군(大軍)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적이 물을 건너 3면을 포위하여 병사들이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다. 휘하의 병사가 공을 만류하며 도망가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을 뿐이다. 어려움에 처하여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하고, 홀로 우뚝 서서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그 날이 4월 23일이었다. 비록 옛날의 안고경(顔杲卿)이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를 반장(反葬)할 때에 길에서 다시 적들이 관(棺)을 열어 시신을 찌르는 변고가 있었으니, 공의 참화가 더욱 지독하였다. 그러나 적이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으니, 어찌 공의 뛰어난 기개가 따라 죽지 않고 죽은 뒤에 이런 영험한 일이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 받았다. 조정에서는 관리를 보내 치유(致侑)하고, 그의 동생 도승(道承)을 관리로 임용하여 김포군수(金浦郡守)로 삼도록 하였다. 구원(九原)에 있는 충혼(忠魂)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만세(萬世)에 백성의 모범이 될 것이고, 신하를 위한 권면이 지극하다. 향촌의 선비들이 서로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와 송자(宋子) 두 분 선생이 충의(忠義)를 기록할 때에 비록 미천하더라도 반드시 적어서 당(唐)의 위사(衛士)인 이사룡(李士龍) 같은 부류도 모두 책에 드러났다. 하물며 공의 훌륭한 절의(節義)가 기록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지금 비석을 세워 그 충절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하였다. 침랑(寢郞) 기우만(奇宇萬)이 그 의논을 먼저 제기했고, 부사(府使) 김성규(金星奎)가 힘을 보탰으며, 유생 송영순(宋榮淳)과 박만승(朴萬升)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박군(朴君, 박만승)이 김한목(金漢穆)에게 소식을 전해 북쪽으로 800리를 달려와서 나에게 글을 구하였다. 내가 절반도 읽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록 다른 세대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마음을 감동시킬만한데, 더욱이 같은 시대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전에 “사람은 오상(五常)을 가지고 있지만, 군친(君親)이 가장 크다. 선비가 가져야 할 백가지 행실 중에 충효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목숨을 바쳐야 본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진실로 평소에 의(義)에 분별을 하고 마음 속에 분명히 기른 자가 아니라면 갑자기 위급할 때에 그 본심을 상실하고 미워해야 할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고 죽음보다 심하게 된 자가 많을 것이다. 공은 효(孝)를 충(忠)으로 옮겨서 늘 강개(慷慨)한 뜻을 품고 있다가 나랏일이 많이 어려운 때를 만나 끝내 날카로운 칼을 밟을 수 있었고, 그 머리를 잃었으나 후회를 하지 않았다. 세찬 바람에 굳센 풀이나 추운 겨울에 소나무라고 하는 것은 공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높은 하늘에서 땅 아래까지 해와 달이 비추는데,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은 이공(李公)의 순절일 것이다.
공(公)의 자(字)는 경습(景習)이다. 성종(成宗)의 아들로 시호는 정민(貞敏), 이름은 침(忱)인 경명군(景明君)의 후손이다. 중엽에 이름이 제형(齊衡)이고 문신으로 집의(執義)를 지낸 분, 이름이 단석(端錫)이고 문신으로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된 쌍호당(雙壺堂)의 호를 가진 분이 모두 청백(淸白)과 효행(孝行)으로 장천서원(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공에게는 7세와 6세의 조상이다. 5세(五世)인 복연(復淵)은 무신으로 통제사(統制使)였고, 증조인 응혁(應爀)은 무신으로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조부인 후지(厚址)는 통덕랑(通德郞)이었고, 아버지는 무신으로 군수를 지낸 종규(鍾奎)이다. 공은 예릉(睿陵) 임자(壬子, 1852)에 태어나서 금상(今上, 고종) 갑술(甲戌, 1874)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겸(武兼)에 나아가 도판경첨(都判經僉)·장위영 초관 겸 선전관(壯衛營 哨官 兼 宣傳官)을 지냈다. 죽은 나이가 겨우 43세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했으니
이것을 큰 절개라고 한다.
선비의 도리는 평소에 높지 않은 것이 없으나
변고에 처하여 스스로 선 자가 드물다.
공은 조용히 안으로 돈독히 마음을 잡고
성패(成敗)와 이해(利害)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지한 것은 충성이었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었네.
살아서 나갔다가 죽어서 집에 돌아가니
임금께서 측은하게 여기셨네
무엇을 주셨는가?
은대(銀臺)의 높은 직책이었네.
용강(龍江)이 마르지 않으니
영웅의 풍모도 장구하리라.
돌에 글을 새기니
끝없이 밝게 보여주리라.

주석
이공의 순의비 [宣傳官 贈左承旨李公殉義碑] 이 비석은 현재 장성군 신호리에 보존되어 있다. 1994년 1백주년을 맞이해 이 비 아래 동학농민혁명 장성전승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장부는 죽을 뿐이다. 어려움에 처하여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하고, 홀로 우뚝 서서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그 날이 4월 23일이었다. 장성 황룡촌 전투. 동학농민군 4천여명과 대관 이학승(李學承)이 이끄는 관군과 향군 합해 7백여명이 장성 황룡촌에서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관군은 대포를 버리고 장성으로 빠지는 신현(莘峴)으로 도망쳤는데, 동학농민군은 신현고개 밑에서 대관 이학승을 붙잡아 칼로 목을 베어 가져갔다.
안고경(顔杲卿) 692∼756.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토벌하다가 그들에게 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치유(致侑) 제물을 보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군친(君親)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줄여 말한 것이다. 이는 오륜 중에 충효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은대(銀臺)의 높은 직책 은대는 승정원의 별칭으로, 높은 직책은 승정원의 좌승지를 말한다. 곧 이학승은 무관출신인데도 문관인 좌승지에 추증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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