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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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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사의 의로운 행적[朴侯義蹟]

아! 옛날의 군자(君子)가 생사(生死)의 커다란 변고(變故)를 만난 것은 한갓 감개할 뿐만 아니라, 살신(殺身)하여 조용히 의(義)를 취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박부사(朴府使)처럼 목숨을 버린 대의(大義)는 바로 장순(張巡)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던 것과 같은 부류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의 몸을 아껴 수치를 견디고 목숨을 건지는 자가 많으니, 이제 박부사의 풍모를 들으면 조금은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다. 박부사의 이름은 헌양(憲陽)이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갑오년(甲午年, 1894) 7월 그믐에 수레를 타고 부임하였으며, 그 때에 동반한 자는 기실(記室, 박영수) 1명 뿐이었다.
이보다 앞서 비류(匪類)가 완영(完營)이 무너진 이후로 더욱 극성스럽고 승리에 익숙해졌다. 본읍(本邑, 장흥부)에는 적의 우두머리가 무뢰배(無賴輩)를 꾀어 그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는데, 모이고 흩어짐에 일정함이 없었고 마을사람들을 협박하였다. 마을사람 중에 평소에 어리석고 우매한 자들이 이해(利害)에 겁을 먹고 손발이 어지럽게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들여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대접하였다. 단지 호응할 뿐만 아니라 근본을 망각하고 패륜(悖論)을 저지르며 풍속을 어지럽히기에 이르러서 온 경내(境內)가 크게 어수선해졌다.
부사는 부임한 다음날 아침에 바로 교당(校堂, 향교)에 나가 향(香)을 올려 예(禮)를 마치고, 유림(儒林)과 당시의 소요를 생각할 때에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뜻이 낯빛과 말에 간절하였고, 먹고 잘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인민(人民)이 어리석게 빠져있고 이류(異類)가 창궐할 때에 정학(正學)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고 해당 면(面)에서 제법 가까운 훈임(訓任)을 가려 뽑아 비용을 내어 물자를 지급하였으며, 그 다음 무기를 수선하여 성(城)을 방어할 방도를 삼았으니, 대개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알았던 것이다.
적의 우두머리를 불러 여러 번 올바른 방도로 타일렀는데, 그 대략에, “대개 재앙과 복이 들어오는 곳은 일정한 문이 없고 사람이 불러 오는 것이다. 서로 충동하여 불러 모으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조짐이고, 집에 들어가 생업을 편안히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기틀인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에 경내(境內)의 여론을 들어보니, ‘귀화한 사람이 의사(義士)라는 두 글자로 점점 의심스런 형태를 이루어 서로 유언비어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 무슨 말인가? 작게는 성(城)을 지킬 수 있고, 크게는 나라를 지킬 수 있다. 지금 의사(義士)라고 하는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강상(綱常)을 떠받들게 하여 선비로 대우한 것인데, 어찌 이것을 화두(話頭)로 삼으려 하는가? 조금도 의심하거나 겁을 먹지 말라”고 하고, 적의 우두머리에게 글로 알려서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부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뒤를 밟아 잡으려고 하였다. 부사가 직접 강영(康營, 강진 병영)에 가서 원병(援兵)을 청하여 함께 토벌하려고 할 때에 적이 여전히 웅치면(熊峙面)에 주둔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바로 수성별장(守城別將) 임창남(任昶南)에게 명령하여 가서 토벌하여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적이 더욱 흉계를 벌여 적 1,000여명을 크게 일으켜서 고읍(古邑)으로부터 바로 남면(南面) 등지를 공격하였고, 다시 남면으로부터 바로 회령(會寧) 땅에 이르렀다. 그러자 다시 수성별장에게 명령을 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였으나, 저들의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어 적의 우두머리를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사가 적들이 우리 백성을 위협하여 억지로 저들의 패거리로 삼는 것을 걱정하여 유생과 의논하였는데, 경내의 사민(士民)중에 양심을 지키고 조금 가까운 사람을 의사로 기용하여 함께 성(城)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그 서약한 말에 의하면, “근래에 소위 각 접(接)에서 기포(起包)했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창을 가지고 포(砲)를 지닌 것은 기병(起兵)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병이 반역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일전에 웅치(熊峙)의 소요에 관군(官軍)을 보내어 몇 놈을 잡았으나 전부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고읍(古邑)과 남면(南面)에 모인 비류(匪類)가 나주(羅州)를 도륙할 것이라고 떠벌려서 더욱 부도(不道)함을 드러냈다. 군사를 일으켜서 성을 공격하는 것도 반역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래서 어제 관군을 보냈고, 지금 추격하여 잡으려고 한다. 만약 귀화하지 않고 기포(起包)하여 준동(蠢動)하는 자가 있다면 일일이 군대를 보내어 섬멸할 것이다. 혹시라도 미혹함을 고집하지 말라. 스스로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설령 지난 날의 실수가 있더라도 지금 다시 귀화한다면 착한 부류이다. 또한 집에 머물러 생업을 편안히 하는 백성은 조금도 놀라거나 겁먹지 말라. 의사의 명부에 들어가는데 장애가 없다. 관(官)이 어찌 백성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날이 바로 11월 어느 날이었다.
이 때에 아군의 기세가 조금 살아나고 적들은 위축되었다. 이보다 앞서 부평면(富平面)에 적의 우두머리가 은밀히 기발한 흉계를 품고 몰래 각 처의 적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성(城)에 들어갈 거사 날짜를 지정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두머리를 잡아 바로 사형에 처하였다. 그래서 적이 더욱 원한을 품었다.
12월 1일 적이 보성(寶城) 등지로부터 다시 북면(北面) 사창(社倉)이 있는 곳에 집결하였는데, 많은 곳은 10,000여명이 되었고 적은 곳은 6,000∼7,000명이었다. 금구(金溝)·화순(和順)·능주(綾州)의 적들이 사면에서 경내를 압박하여 오니 물정(物情)이 흉흉한 정도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사가 적들의 반역을 매우 통탄스럽게 여겨 성(城)의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하도록 명령을 하고, 밤낮으로 순찰을 하며 군졸을 위로하는데 그 말과 뜻이 간절하여 마을의 백성과 군사들 중에 감격하여 분발해서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2월 3일에 적들이 봉기하여 혹은 평화(平化)의 송정(松亭) 비탈에 주둔하고, 혹은 건산(巾山)의 모정(茅征) 비탈에 주둔하고 혹은 벽사(碧沙)의 뒤쪽 들판에 주둔하거나 행원(杏園) 앞의 들판에 주둔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형세가 미약하여 사면에서 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날에 부사가 동문(東門)의 누대에 올라가 적의 기세가 더욱 극성스러운 것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이 저와 같고 또 일전에 요청한 영병(營兵)이 오지 않으니, 적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며 한탄이 그치지 않으니, 좌우(左右)의 사람들도 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2월 4일에 적이 먼저 벽사(碧沙)에 불을 놓아 공해(公廨)와 여사(廬舍)가 모두 재가 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날 밤에 부사가 성을 돌다가 동문 누대에 이르렀는데, 기실 박공(朴公, 박영수)도 뒤를 따라왔다. 적이 사면에서 성을 다가오고, 포 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통인(通引)과 시종(侍從)이 청하기를, “성첩(城堞) 가까운 곳에 잠시 피할 데가 있습니다”라고 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 급박함이 대단하다. 너희는 성을 넘어 살기를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어찌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려하겠는가”라고 하며 개연히 의분(義憤)을 드러내었다. 목숨을 바쳐 그 뜻을 이루었으니, 진실로 궁색(窮塞)과 재난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분이었다. 만약 체득한 것이 부실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이 때에 벽사찰방(碧沙察訪) 김일원(金日遠)도 성을 지키려고 왔으나, 병영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로 아침 일찍 성을 나갔기 때문에 화(禍)를 모면하였다. 아! 성을 지키는 방비가 견고해진 것은 성 밖의 백성이 단지 현재 성을 방어하는 엄정함을 보고 집 식구와 살림살이를 옮기고 성안으로 피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찰방의 처자(妻子)도 본 관아의 성안에 있었다.
다음날 새벽녘에 부사가 다시 문루(門樓)에 올라 적진(賊陣)을 바라보았더니, 한 차례 포 소리가 난 뒤에 나머지 적들이 바로 북문을 넘어 사방에서 난입하여 온 성이 불속에 들어갔다. 죽은 자가 서로 뒤섞이고 사내라고 불리는 자들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화를 면하지 못했으니 차마 말을 하겠는가? 관군이 부사를 부축하여 바로 동헌(東軒)으로 향했는데, 적이 뒤를 쫓아와서 난리를 치며 소매를 잡고 옷을 당겨 인부(印符)를 뒤지기에 이르렀다. 부사가 꼿꼿하게 서서 굴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왕명을 받아 인부가 나에게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빼앗으려 하는가”라고 하며 입에서 호통이 그치지 않았다. 적이 위협하여 동문 밖의 시장터에 이르러 창과 포를 휘두르며 협박하는 것이 무엄(無嚴)하였다. 부사가 정색(正色)을 하고 꼿꼿하게 앉아 조용히 의(義)를 취하였는데, 그 날이 바로 12월 5일이었다. 기실 박공이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변고를 당하여 부사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황급하게 관문(官門)에 왔다가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아! 절의(節義)에 죽는 군자(君子)가 위급한 때를 맞아 지킬 방도를 다했으나 죽음을 모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운명이다. 험난함에 두려워서 굽히거나 지독한 액운(厄運)에 죽음을 당한 자가 어찌 우리의 의(義)를 얻을 수 있겠는가? 아! 높은 성(城)의 보루와 차가운 강물은 천지와 더불어 길이 존재하다 함께 없어질 것이니, 머물러 살지 않아도 영원히 전해진다는 것을 비로서 믿겠다. 몸을 이끌어 화재를 입었으니, 그 참담함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해를 입은 것은 마침 그 기개를 더하고 평소에 목숨을 버릴 뜻을 잊지 않기에 충분하였다.
적이 비록 물러갔으나 오히려 시끄러움이 그치지 않았다. 2,000∼3,000여명의 적이 2∼3일 동안 성을 에워싸고 포를 쏘아 재앙에서 빠졌던 자도 끝내 화를 모면하지 못하였다. 어찌 그 악독함이 한결같이 이렇게 심한 데에 이르렀는가? 그래서 끝내 시신을 거두려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12월 7일에 선비 김용후(金容厚)와 백우인(白禹寅)이 의기(義氣)를 내어 자신이 입고 있던 윗옷으로 성 밖의 시장에서 부사의 시신을 거두었는데, 어깨와 겨드랑이는 젖은 땅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편지 1통과 옷깃 및 가죽신 1짝만이 다행히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읍점(邑店, 읍의 店幕)의 이매암(李賣巖)도 책실(冊室)의 시신을 거두어 성안의 깊숙한 곳에 감추었다.
이 때에 3∼4일 동안 적이 다시 강진병영을 함락시켰다가 12월 12일에 다시 돌아와서 본 관아의 남문(南門) 밖과 건산(巾山) 모정(茅征)의 산등성이에 주둔하였다. 이 날에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이 경군(京軍)을 인솔하여 보성(寶城)에서 왔는데, 저물녘에 바로 먼저 모정(茅征)의 산등성이에 있는 적을 격파하였다. 다음날 새벽녘에 다시 남문(南門) 밖의 적을 깨뜨렸다.
12월 14일에 적이 다시 크게 일어나 남면(南面) 면치(眠峙)로부터 계속 와서 본 관아의 앞뒤에 나누어 주둔했는데, 경군(京軍)이 둘씩 대오(隊伍)를 지어 포(砲)를 쏘아 해산을 시켰다. 죽은 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였다. 아! 부사의 충혼(忠魂)과 의로운 넋이 우레와 바람처럼 빨라서 적이 발을 돌리지 못하게 하여 이렇게 전멸을 가져온 것이니, 황천(黃泉)에서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선비 고광익(高光翼) 등이 소모관(召募官, 백낙중)과 함께 다시 평화서재(平化書齋)에서 시신을 염(殮)하여 비로소 아침 저녁으로 제사상을 마련하였다.
12월 28일에 부사의 아들인 진사(進士)가 분상(奔喪)하였다. 아! 부사의 평소 언행(言行)도 반드시 들을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멀리 있어 교분(交分)이 원한데다( )부임(赴任)한 것이 오래 되지 않아 한 가지도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비록 상세히 그 언행을 알더라도 대의(大義)가 저처럼 빛나니, 부사에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부사가 처음 이곳에 올 때에 외진 길에 말 1필을 끌고 온 나그네의 행색이었는데, 오래 된 버선은 발꿈치가 터지고 갓끈을 드러내었다. 주리(柱吏)가 1벌을 만들어 바치며 오래된 것은 태워버리기를 청했는데, 부사가 말하기를, “한 짝은 아직 멀쩡하다”고 하고는 한 짝이 터지면 다른 한 쪽은 새것을 신고 다른 쪽은 그대로 두었다. 또한 망건(網巾)이 오래 되어 더러워져 붉은 빛이 나고 손이 닿는 대로 갈라졌다. 어느 날 중간 정도의 망건을 앞에 드렸더니 그것을 보고 물리치며 말하기를, “너희들의 사치가 이렇게 심한 데에 이르렀는가”라고 하고, 썼던 것을 벗어버리고 지시하기를 “이런 모양으로 짜서 오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평소에 보지 못한 거친 것이었다. 그 뒤에 다시 화려한 방석 하나를 드렸더니 크게 책망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물건은 평소에 보지 못했는데 더욱이 직접 깔고 앉겠는가? 근래의 소요는 바로 너희들과 관장(官長)이 사치를 탐하여 초래한 것이다”라고 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평소 마음에 쌓은 것을 대략 헤아려서 알 수가 있다. 그 본성을 길러 그것이 드러나서 바로 대강(大綱)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오래 묵은 폐단을 전부 없애려고 했는데, 이 백성이 복이 없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애통하고 슬플 뿐이다. 만약 관향(冠鄕)의 백성이 일찍이 우리 부사처럼 청렴하고 어진 사람을 얻었다면 반드시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자하고 훌륭한 우리 부사도 이런 망극(罔極)한 재앙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슬프다. 지금까지 백성과 선비가 오히려 적을 평정한 것을 기뻐할 줄을 모르고, 부사의 죽음을 슬픔으로 여기고 있다. 관아의 일을 본지가 겨우 100여일이지만 백성에게 인자하고 아끼는 마음이 들어간 것이 깊고 절실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여러 번 훈계를 받들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뜻에 있어 매우 간절하여 그것을 반복했을 뿐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직접 사랑과 보살핌을 입은 곳은 아직까지 눈에 선하고 갈수록 새롭다. 게다가 시신을 수습한 선비가 이웃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들어서 알고 있으나, 다만 사람이 못나고 견식(見識)이 얕아서 부사의 덕(德)을 만에 하나라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가 남긴 훌륭한 행적이 사람의 이목(耳目)에만 있어서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그 진면목을 잃어버릴까 걱정스럽고, 훗날에 붓을 잡는 군자가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논자(論者)들은 근래의 재앙이 유래한 연유는 점차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진실로 그 근원을 살펴보면, 우리들이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듯한데, 무엇 때문인가? 선비의 습속은 향국(鄕國)에 관계된 것이 중요하다. 선비의 습속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 지에 따라 향국이 다스려지는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선비의 습속이 올바르면, 백성의 경향(傾向)이 정해지고 향국이 다스려진다. 선비의 습속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의 경향이 정해지지 않고 향국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므로 선비는 백성의 바램이라고 한다. 진실로 선비된 자는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연유를 생각하고 백성의 경향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겠는가?
다만 현재 향촌의 습속을 보면, 학교는 바로 예의(禮義)를 솔선하고 백성들이 돌아가서 의지하는 곳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인륜(人倫)을 밝히고 제향(祭享)을 받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 성현(聖賢)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정숙해야 하는지를 아예 알지 못한다. 날마다 출입하는 것은 작은 일을 일삼을 뿐이다. 염치(廉恥)를 모두 잃어버리고 경영(京營)에 청탁을 하고 관부(官府)에 뇌물을 주어 온갖 계곡과 길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게다가 그 문벌(門閥)이 가장 훌륭하고 그 사람의 명망이 있더라도 사람을 뽑을 때에는 지조가 있는 지는 묻지 않고 근실하게 지키는 것이 어떠한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외진 바닷가에서 어망질을 하고 깊은 골짜기에서 숯을 굽는 어려움을 견딜 수 있더라도 한바탕 술을 먹으면 좋은 자리로 보아 정말로 높은 품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위로는 명부(明府)를 기망(欺罔)하고 아래로는 하인을 속인다. 너울거리는 옷과 띠를 두르고 다니며 당(堂) 위에서 크게 이름을 부른다. 더욱이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은 어떻겠는가? 이것이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학교에 대해서 그 안을 살펴보면, 훈장(訓長)은 유모(乳母)의 젖을 먹이는 어린애에 불과하고 학생은 머리를 늘어뜨린 예닐곱 살의 아이이다. 겨우 머리를 묶을 때가 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을 가르치고, 형이 그 동생을 권면한다. 이런 저런 사물을 겨우 분별할 때에 속임수가 싹이 트고 관(冠)을 처음 쓰기 시작하는데, 모함이 펼쳐져서 날마다 부(富)와 사치에 뜻을 두고 교제는 사사로운 욕심에 치중하여 사민(四民)이 어지러워졌으니,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하나 혼란스럽지 않기 어렵다. 비록 편오간(編伍間)의 심상한 일일지라도 송곳만큼도 바꾸기가 어렵고 치수(錙銖)조차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나머지 일을 어찌 따져 볼 수가 있겠는가?
시험삼아 시정(市井)가를 눈여겨보면 분답하게 왔다갔다 하는데, 비록 부자(父子)와 형제라도 같은 길은 함께 다닌다. 아울러 시중에 들어가 보통사람으로 큰 의사를 가지고 좋은 모양을 가진 자처럼 하지만 이것이 어찌 길가는 사람과의 이해관계 없는 사귐과 같을 수 있겠는가? 평소에 향촌의 사대부라고 불리는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 자질을 살펴보면 그 이목(耳目)은 애석하고 그 나이는 아낄만하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제법 지각이 있게 되어 밤낮으로 성취하여 진실로 깨달은 것은 일개 이(利)라는 글자 뿐이다. 대학(大學)과 소학(小學) 처럼 평소에 가장 다반사(茶飯事)로 가까이 할 책은 접해 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마음에 경험한 적이 있겠는가? 울타리가에 버려진 물건으로 여기고 변모(弁髦) 처럼 보는데, 이와 같고서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동생을 아끼고 동생이 형을 존경한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작은 것은 들어서는 안되고 큰 것은 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선현(先賢)의 말에, “치지(致知)는 책을 읽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더욱이 3대(三代) 이후에 덕성(德性)을 기르는 것이 모두 없어졌는데, 이런 마음을 유지하고 세도(世道)를 지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책 뿐이다. 진실로 뜻이 있는 자라면 책을 버리고 구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 이런 뜻이 드물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훌륭한 선비가 사라지고, 향촌에 좋은 풍속이 없게 되었다. 덕 있는 모습을 반목(反目)하는 행태가 늘 있고, 형제간에 싸우는 부류가 흔한데, 이것은 사람이 이익을 쫓아 빼앗는 풍조가 유행하여 향촌과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국가가 어지러워져서 망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 가장 두각을 보이는 것은 과거(科擧)에 의탁하여 독서를 하지 않고, 경영(京營)에 헛되게 다니며 빈궁을 구제하지 않고 순서를 알지 못하여 돈을 버는 것만을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수만냥에 홍패(紅牌)와 백패(白牌) 한 장을 사서 입을 크게 벌려 좋은 세상임을 자부한다. “비웃든 꾸짖든 마음대로 하게나. 좋은 벼슬이 돌아오면 나는 할 것이다”라는 식의 습관은 온 세속이 다 그러하니, 저 숲처럼 많은 어리석은 자들을 과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여기서 보통 사람들을 짐작할 수가 있다.
향곡(鄕曲)에 제법 이름이 있는 몇 명이 그 아전에 부탁하여 사사로움을 따라 읍(邑)을 운영하고, 그 자급(資級, 벼슬아치)을 얻으려고 흔쾌히 수천 수백냥을 약속해서 무엄하게도 모칭(冒稱)을 하거나 위협하여 강요한다. 여러 가지 모습을 일일이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업(家業)을 기울였으나 자급(資級)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몸도 보전하지 못한 자가 태반(太半)이나 되었다. 근래에 얼마나 몰락하여 먼 땅으로 갔는가? 또한 얼마나 금옥(金玉)이 많은가? 이보다 앞서 진실로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염려가 있는 자라면 그 감회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어지러워져서 망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풍속이 무너져서 모두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향촌의 자제(子弟)들은 집에 있으면 공장(工匠)을 가까이 하여, 기교(技巧)와 사치를 지극히 한 잡다한 물건을 고상하게 여겨서 도리어 승부를 겨루어 마치 옥인(玉人)에게 옥(玉)을 다듬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밖에 나가면 시험삼아 포(砲)와 총을 쏘아 사슴과 꿩을 쫓는 기술을 부끄러움 없이 감히 하였으니, 아직 이르지 않은 폐단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또한 고상한 풍취(風趣)가 있어 음풍농월(吟風弄月)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고, 도박을 남몰래 즐기거나 닭과 개를 잡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매일 이런 생활을 기약하여 한해를 헛되이 보낸다. 처음부터 종이와 붓을 사랑하지 않아 끝내 책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부형(父兄)이 그것을 보고 당연하게 여기니, 자제(子弟)들은 편안하게 생각하여 이런 풍속이 일상적으로 되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심해졌다. 그래서 세상의 도(道)가 날로 천박해져서 돌이키기가 어려워졌으니, 서리를 밟으면 멀지 않아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아는 안목을 조금이라도 가진 자라면 한심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지러워져서 멸망을 초래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대개 혼례(婚禮)는 만복(萬福)의 근원이고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혼례를 재물로 논하는 것은 바로 오랑캐의 풍속으로 옛날에 명훈(明訓)이 있었고, 또한 명분(名分)에 연유하여 사람을 바로잡고 집안의 흥망성쇠에 하나의 큰 관건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로 그 이로움이 있는 곳은 지난날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사로움을 천하게 여기던 처지와 다르지가 않으나 제멋대로 굴(屈)칠(漆)땅에 살아 총각을 면하고 어른의 명(命)을 말하며 바로 뻔뻔스럽게 출입하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말할 때마다 우리 향촌에 벌열(閥閱)을 내세우는 자는 이런 처지와 같지 않을 것이라 한다. 심지어 며느리를 들이는 데 먼저 혼수가 후했는지 여부를 묻고,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신랑 집에서 보내온 재물의 정도를 물으며, 노비(奴婢)를 거간하는 법이 종(宗) 뒤를 잇는 경우에 행해진다. 돈은 끝이 있는데 요구는 한이 없기 때문에 혼인하는 집안이 종종 끝내는 원수가 된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반복하여 개탄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이것도 재앙과 난리가 일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난리가 일어나는 이유는 참으로 1∼2가지로 셀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일개 향촌일 뿐이겠는가? 세상에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간혹 있다. 아! 좌우를 돌아보니 은(殷)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다. 앞의 수레가 전복되었는데 따라가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따라 돌아보지 않아 어느 때에 멈춰야 할지 모른다. 대개 이류(異類)가 창궐하는 자들은 향곡(鄕曲)·문족(門族)·산업(産業)·지벌(地閥)·거업(擧業)에서 얻지 못한 자들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것 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그 나머지가 거의 드물다면 이것이 어찌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만들어진 이유이겠는가? 그래서 날과 달로 심해져 들판을 불태우고 하늘에 가득하게 되었다. 앞에서 이른바 “우리들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한 말은 족히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이는 “오늘의 논의가 너무도 꾸짖는 말과 같으니, 의도가 좋지 않은데다가 언로(言路)는 비루하다고 생각한다. 옛사람은 이와 같지 않을 것인데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한다.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情理)가 본래 기구(崎嶇)하겠는가? 근래에 경력(經歷)이 과연 어떠한가? 어찌 움직이지 않으려 하지 않는가? 이런 모든 것이 우리가 밤낮으로 늘 애쓰던 것들이다. 붓을 잡고 사실에 대해 적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남의 비난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애초에 남의 안목(眼目)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이것을 보는 자가 특별히 그 거칠고 조잡한 점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 실상(實狀)만을 취한다면 말을 가려 선택해서 나뭇꾼에게 의견을 묻는 하나의 단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호걸스런 선비가 그것을 얻어 웃는다면 실제로 자그마한 다행이 아닐 것이다. 다만 대가(大家)가 보기에 훌륭하지 않아 걱정스러울 뿐이다.

주석
분상(奔喪) 먼 곳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변모(弁髦) 변(弁)은 관례(冠禮) 때에 쓰는 치포관(緇布冠)이고, 모(髦)는 어린애의 눈썹까지 드리운 머리카락으로 관례가 끝난 뒤에 모두 필요없는 것이 된다.
굴(屈)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던 곳으로 유명했던 춘추시대에 진(晋)의 땅이다.
칠(漆) 하(夏)나라 때의 나라이름이다.
사마온공(司馬溫公) 1019∼1086.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우부(迂夫)이다. 죽은 뒤에 사마온국공(司馬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마온공이라고 불린다. 북송(北宋)때의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나뭇꾼에게 의견을 묻는 순우추요(詢于芻蕘). 풀꾼과 나뭇꾼에게 의견을 묻는 것으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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