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해학 이공의 묘지명[海鶴李公墓誌銘]

아! 평온하지 않은 날에도 세상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선비는 자그마한 권세도 없는데 곤경을 돌아보아 스스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흉금에 차서 쌓이는 것을 참지 못해 풍파(風波)를 무릅쓰고 가시를 밟았다. 일개(一介) 포의(布衣)로 천하의 성패(成敗)관계에 쓰러지니, 현자(賢者)는 걱정하며 우원(迂遠)하다고 여기고, 못난 사람은 비웃으며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몸은 죽고 나라가 망한 뒤에 유식(有識)한 선비가 그 일을 추론(追論)하여 비로소 그를 위해 탄식하고 그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얻을 수가 없다. 해학(海鶴) 이공(李公)과 같은 사람이 그런 분이다.
공의 이름은 기(沂)이고, 자(字)는 백증(伯曾)이다. 선세(先世)의 본적은 고성(固城)이었다가 나중에 호남으로 옮겨와서 만경(萬頃)이 되었다. 헌종(憲宗) 무신년(戊申年, 1848)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에 이미 영특하였고,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재주와 명성이 원근(遠近)에 알려졌다. 장성해서 지략(智略)을 지니고 있었고, 당세(當世)의 일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마침 외척(外戚)의 혼란이 날로 심하고, 삼남(三南)의 백성이 박탈을 견디지 못하여 갑오년(甲午年)에 동비(東匪)가 일어났을 때에 공의 집은 구례(求禮)에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에 달려 들어가서 정부(政府)를 뒤엎고 간신(奸臣)을 죽여 임금을 받들어 국헌(國憲)을 새롭게 할만하니, 일찍 서둘러서 운용(運用)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전봉준(全琫準)에게 달려가서 설득시켰다. 봉준은 동비의 괴수로 제법 호걸스러웠는데, 공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말하기를, “나는 공의 설득을 따를 것이오. 남원(南原)에 김개남(金介南)이 있으니 공은 가서 합세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바로 달려가서 남원에 이르렀으나, 개남은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오히려 해치려고 하여, 공은 옷을 바꿔 입고 달아나서 죽음을 모면하였다. 이로부터 그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뒤 비도가 약탈을 하면서 구례에 들어오자, 공은 수백명의 군민(郡民)을 규합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정치가 변해 있었다. 을미년(乙未年, 1895)에 서울에 들어갔으나 전제(田制)로 어탁지(魚度支)에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해를 넘겨 이남규(李南珪) 공(公)이 영남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공(公)과 함께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공은 모병(募兵)하여 조련하는 일을 맡았는데, 몇 달만에 성과가 있었다. 그래서 이남규는 공을 불러 부좌(府佐)로 삼았으나 얼마후에 면직되어 갔다. 광무(光武) 3년(1899)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공을 양무위원(量務委員)에 임명했는데, 전제(田制)는 공이 소장이었다. 일을 총괄하는 자가 공에게 전국의 양전(量田)을 맡기려고 하였다. 먼저 호서(湖西)의 아산(牙山)에서 양전을 실시했는데, 명적이 분명해지고 세정(稅政)이 바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일을 총괄하던 자가 바뀌고 공도 면직되었다.
광무 9년 을사년(乙巳年, 1905)이다. 이 해에 일본과 러시아가 조약을 맺으려고 미주(美洲, 미국)에 모였다. 공이 “이 모임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 대한(大韓)에 미칠 것인데, 앉아서 바라만 볼 것인가” 하고, 몇 차례 집정(執政) 등 여러 사람에게 말했으나 모두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동지들과 미국에 건너 갈 것을 모의하고 싸워서 막으려고 외부(外部)에 여권(旅券)을 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기미를 알고 급히 외부(外部)에 편지를 보내 저지해서 공은 끝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이로부터 더욱 분개하여 “유자(儒者)에게 백이(伯夷)와 이윤(伊尹)에 대해 많이 말했는데, 백이는 정치가 다스려지면 나아갔고 어지러워지면 물러났다. 이윤은 “누구를 섬기든지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리든지 백성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저 상(商)나라가 하(夏)나라를 대신했고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대신하였다. 비록 나라는 변화가 있더라도 오히려 같은 화하(華夏, 중화)이다. 설령 그 부류가 아닌데 백이를 나아가게 하고, 이윤을 섬기게 한다면 반드시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이 세상에 처신하는데 따로 의리(義理)를 논해야 할 것이다. ‘큰 집이 기울어지려고 하니 나무 하나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하늘이 폐지하려고 하니 어찌 할 수가 없다’고 하니 모두 그릇된 말이다. 이런 의리를 지니고 힘껏 나아가 백번 꺾여도 더욱 분발하여 죽음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미국에는 갈 수 없게 되자 나인영(羅寅永)공 등과 함께 일본에 가서 상소를 하거나 두루 보낸 편지에서 극언(極言)을 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간절하고 장엄하였다.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전에 보호조약이 이루어진 것을 들었다. 돌아와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서 가르치며, 겉으로 관도(官途)를 따르고 안으로는 몰래 일본에 붙은 대관(大官) 7명을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부서(部署)의 죽음을 각오한 의사(義士)들과 약속을 한 날 일제히 이르렀을 때에 대관들의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나 마침 모두 외출중이어서 이근택(李根澤)만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성안에서 크게 수색을 한지 열흘이 넘어 나공(羅公)이 자수(自首)를 하여 비로소 공모를 한 공(公)도 체포되었다. 옥(獄)에 오랫동안 가두고 병사가 엄중히 지켰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융희 원년(隆熙元年, 1907) 겨울에 풀려나서 돌아왔다. 이에 널리 학보의 붓을 잡았는데, 호남학보(湖南學報)의 논설 같은 것은 모두 심혈(心血)을 기울여서 국인(國人)이 크게 깨닫게 되었다.
3년 뒤인 기유년(己酉年, 1909) 모월 모일에 서울에서 객사(客死)하였는데, 나이 62세였다. 그 뒤 3년만에 김제(金堤) 송산(松山)의 선영에 돌아와서 묻혔다. 공은 큰 키에 마른 모습으로 문장을 잘하고 담력과 용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그의 사촌 이공(李公)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다. 이때는 겨우 을미년(乙未年, 을미사변)을 겪어서 도내(道內)에 집결하여 관(官)에 대항하는 자가 많았다. 이공이 군사를 늘이는 것을 의논하고, 먼저 공을 보내서 타이르게 하였다. 그 장수와 함께 모여서 막 담론을 하려고 할 때에 총을 가진 몇 사람 앞에 와서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총알을 받아라”고 하니, 공이 갑자기 장수의 뺨을 때리며 말하기를, “너는 장수로서 부하를 단속하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장수가 사죄하고 총을 가진 자들을 꾸짖어 물린 뒤에 공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 장수의 손을 잡고 나갔다. 이미 돌아온 뒤에 그 얘기를 들은 자들은 모두 놀랐다. 이공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으로 공보다 1년 먼저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공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나공(羅公, 나인영)이 구월산(九月山)에 가서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살을 하여 순국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홍암(弘菴)선생이다. 공은 또한 황현(黃玹)과도 친밀하였는데, 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에 황공(黃公)도 순절하였다.
내가 처음에 공의 글을 읽고 귀중하게 여겼는데, 이윽고 공이 한 일을 알고 더욱 사모하였다. 그런데 공의 문인(門人)과 아들이 편지를 보내 내게 서문을 부탁하기에 곧 그 대략을 말하고 다시 정중하게 그를 위해 지문(誌文)을 지어 무덤에 묻게 하였다. 공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알지만, 오히려 내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려고 한다. 아들은 낙조(樂祖)다.
명(銘)하기를,

선비는 뜻을 지녀
분수안에 우주가 있네
하물며 이 견고한 나라는
조상이 물려준 오래된 것이 아닌가
손에 있는 옥(玉)
푸른 깃과 채색 자수를
꿰매고 묶어
그대와 장수를 하려고 했는데
누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을 보는가?
소리가 다하고 발은 해졌으나
외로운 분노는 끝나지 않았네
용이 무지개에 감기고
숨은 우뢰는 벼락을 치려고 하네
운수가 다하고 술법은 성글며
귀신은 막히고 공(功)은 적네
춘란(春蘭)과 가을 국화는
누가 향초를 전했는가?
슬픔을 돌에 새기니
영원히 성대하리라.

주석
어탁지(魚度支) 탁지아문(度支衙門) 대신인 어윤중(魚允中)을 말한다.
이남규(李南珪) 호가 수당(修堂)으로 일본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 주한 일본 전권공사. 1899년에 주한전권공사에 임명된 후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04년 한일의정서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한 뒤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을 완전한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