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시사[時事]

1884년[甲申]

이 해 10월 17일 변고(變故, 갑신정변)를 일으킨 흉악한 무리들은 모두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있어 연소한 나이에 벼슬살이를 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학문을 알지 못하였고, 또 잡서(雜書)를 좋아했는데, 그 부형(父兄)이 금지할 줄을 몰라서 마침내 반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심하구나! 배우지 않은 폐단이. 심지어 반역을 저질렀어도 그것이 잘못된 줄을 알지 못하니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닌가?

1885년[乙酉]

한성(漢城)의 남쪽 교외에 이르러 갑신정변의 적들이 처형되어 거리에 버려져서 개·돼지·까마귀·솔개 등이 서로 다투어 시신을 먹는 것을 보았다. 지나가는 자들 중에 코를 가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이 냄새는 없어질 때가 있으나 청사(靑史)에 남긴 그 냄새는 만세(萬世)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싫어할 줄은 모르고 저들의 악(惡)을 돌아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약산공(約山公)이 심의(深衣) 1벌을 내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판서(判書)인 나의 사촌동생이 내 회갑(回甲)잔치를 위해 지어 보낸 것인데, 제도에 어긋남이 없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자세히 살펴본 뒤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시정(市井)의 제도로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이 내 말을 받아 말하기를, “비록 제도에 위배되는 것이 있더라도 입는데에 무슨 해가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정색(正色)을 하며 말하기를, “심의는 법제(法制)가 있으므로 구차하게 짓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욱이 공(公, 약산공)은 의제(衣制)와 관계된 일로 임금과 서로 논쟁하여 반년이 지나서야 일이 정해졌는데, 지금 자신이 입는 법복(法服)이 이처럼 구차스럽고 소략한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약산이 말하기를, “옳은 말씀이다”고 하고, 따라서 그 제도를 상세히 묻고서 말하기를, “내가 산으로 돌아가서 다시 심의 한 벌을 만들겠다”고 하고, 또 자긍(子矜)과 치방(稚芳)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도 상세히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객(客)이 묻기를, “한(漢)나라의 장석지(張釋之)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은 재물로 낭관(郎官)이 되었는데, 지금 세상에서 돈을 내고 관직을 얻는 것이 참으로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한대(漢代)에 관리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재물도 관직에 들어가는 하나의 길이었다. 『한주의(漢注儀)』에, ‘돈 500만으로 상시랑(常侍郞)에 보임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세상에 벼슬살이를 하는 세 가지 길이 있으니, 과거(科擧)와 천거(薦擧) 및 음사(蔭仕) 이다. 법에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혹시 큰 기근(饑饉)이나 큰 군려(軍旅)를 만났을 때에 곡식을 내면 관작(官爵)을 주는 일은 있다. 그 밖은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국가에 돈을 내고 관직을 얻는 것은 권신(權臣)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는 것에 비해 진실로 매우 낫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관직을 얻는 것으로 말하면 권신을 살찌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이롭게 해야 하며, 세도(世道)로 말한다면 사적인 선물은 폐단이 적고 공적인 뇌물은 폐단이 크다”고 하였다.

1886년[丙戌]

수령(守令)이 청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민요(民擾)를 일으키고, 고관(考官)이 공정하지 않으면 사자(士子, 과거에 응시한 선비)가 난장(亂場)을 일으킨다. 이들 수령과 고관이 참으로 죄가 있더라도, 그것은 조정에서 조치하는 것이지 아래에 있는 자가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본분을 잊어버리고 의(義)를 침범하여 심지어 소란을 저지르니, 그 죄가 더욱 크다. 내가 어릴 때부터 과거에 응시하여 여러 번 난장을 겪어보았다. 과장(科場)에 들어갈 때마다 마치 군중(軍中)에 있는 듯 하였다. 이미 그 추악한 습속을 목격하였으니, 나를 더럽힐까 걱정되어 도도(滔滔)하게 함께 돌아가는 처지를 면하려고 과거를 그만두기를 도모하였다. 과거를 그만두려는 생각이 여기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과목(科目)이 쓸모가 없게 된 유래는 오래 되었는데, 명경(明經)이라고 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 중에 가장 쓸모없는 것이다. 평생 동안 다른 책은 보지 않고 단지 칠서(七書)의 음독(音讀)만 일삼고, 조금도 경(經)의 뜻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항상 쓰는 편지도 캄캄하니, 어떻게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생 동안 마음과 힘을 쓰고 애를 쓰니 사람으로 하여금 불쌍하게 여길만 하다.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거나 낙방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남의 탓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 과거가 남으로부터 비롯된 연유도 오래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과거도 남에게서 연유하는 것이 그와 같은데, 어찌 과거에 응시하겠는가? 지금 중국의 법에 고관(考官)이 된 자가 사사로운 뜻을 쓰면 요참(腰斬)으로 그 죄를 논(論)한다고 들었는데, 진실로 지나친 것이 아니다.
또 객(客)이 묻기를, “근래에 감사(監司)가 수령(守令)을 고과(考課)하는 전최(殿最)와 같은 일 등에서 남에게 원한을 맺지 않으려고 그 수령이 어진지의 여부를 논하지 않고 한결같이 상등(上等)에 두지만, 오직 조목(條目)의 말을 만듦에 있어서만은 다스리지 못한 실정을 나타내어 조정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유능한 관리로 지목하니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라고 묻기에, “시정(時政)을 논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크게 경계하는 바이니, 그와 같은 일을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만약 범연하게 의리(義理)를 논한다면 혹 가할 것이다. 대개 감사의 직무는 여름과 겨울의 두 차례에 하는 전최가 가장 큰데, 어찌 이처럼 혼탁하고 모호할 수 있겠는가? 여덟 글자로 적은 조목에서는 폄하(貶下)를 극진히 하고, 한 글자로 성적을 보고 하는데서는 포상만을 극진히 하여 그를 임금에게 나아가게 하니, 이것은 면전에서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을 대우하니, 이것은 원한을 감추고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가령 언로(言路)에서 남을 탄핵하는 자가 재물을 탐하고 불법(不法)한 일을 두루 말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라고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나서 그 사람을 보고 스스로 해명하기를, ‘내가 그대를 탄핵하면 탄핵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대를 포상한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것이 또한 어찌 말이 되겠는가? 아! 관직에 있는 자는 단지 일신(一身)의 사사로움을 계산하고, 3척(三尺, 법도)의 공의(公意)를 헤아리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도학(道學)의 밝지 못한 폐해가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나라의 풍속에 관직을 제수받은 뒤에 사은(謝恩)하는 것을 숙배(肅拜)라고 한다. 대축주(大祝注)를 살펴보면, 숙배는 군중(軍中)의 배례(拜禮)이고, 또한 부인(婦人)의 배례이며, 계수(稽首)는 신하가 임금에게 절하는 예(禮)이다. 지금 사은(謝恩)하는 배례를 일로 말하면 계수이고, 이름으로 말하면 숙배이니, 이름이 바르지 않은 것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지(朝紙)에 나오고 국사(國史)에 쓰여서 곧 한 왕조의 글을 이루었다. 이름이 이미 바르지 않으면 실제가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에 그 절하는 모습은 한번 꿇어앉아 네 번 몸을 굽혔다가 일어나서 드디어 절을 한다. 이런 풍속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나 이 또한 임금을 섬김에 예가 없는 것으로 이익을 보고 공도(公道)를 저버리는 한 조짐이라 한다.
사민(四民) 중에 상인(商人)이 맨 끝에 처한 것은 이유가 있다. 요즘 세상 사람을 보면, 농업에 게으른 자는 반드시 말리(末利)를 좇아간다. 말업(末業, 상업)을 좇다가 이익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잡기(雜技)에 빠지고, 잡기를 하다가 더욱 실패하면 그 폐단은 반드시 도적이 된다. 벼슬살이하는 자도 본업(本業)과 말리가 있는데, 책을 읽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본업이고, 권문(權門)을 좇아가 비리로 현혹하여 이름을 내는 것은 말리이다. 근세(近世)에 경박하고 배우지 못한 무리로서 팔을 뽐내며 외국의 일을 논하고 절역(絶域, 먼 지역)으로 봉명사신가서 부귀(富貴)를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말리를 좇는 자중에 더욱 천한 사람이니, 그들은 끝내 종종 반역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1890년[庚寅]

퇴계(退溪)선생과 율곡(栗谷)선생은 같은 세대에 태어났고 나이에 선후(先後)가 있었다. 재주와 학문으로 말한다면, 퇴계는 율곡에게 떨어지는 듯하나, 율곡은 평생 동안 퇴계를 믿고 복종하여 직접 배운 스승과 같았다. 퇴계는 율곡에 대해 그렇지 않아서 늘 매우 만족스럽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고 인재를 천거할 때에 결점이 많은 기고봉(奇高峯)을 천거하고 율곡을 천거하지 않았는데, 어찌 율곡에 대해 오히려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어 그렇게 했겠는가? 퇴계가 죽고 얼마 안되어 당론(黨論)이 일어나서 퇴계의 문인(門人)과 그 향촌사람들이 모두 동인(東人)이 되었다. 퇴계가 살아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율곡으로 하여금 헐뜯고 기만하는 모욕을 겪게 하였는데, 그 우두머리가 된 자들 역시 퇴계의 문인이었다. 이것은 진실로 퇴계가 미리 알고 한 일이 아니나, 아마도 이 또한 그가 평생 동안 만족스럽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단을 낸 듯하다. 이 일은 늘 의아심을 가지게 한다.
근래에 동춘집(同春集)을 보니, 이 일을 언급한 것이 있었다. 의심의 단서가 있는 바에 옛날 사람과 지금 사람의 견해도 대략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교남(嶠南, 영남) 일대 향촌에서 유현(儒賢)이 대대로 일어나서 추로(鄒魯)의 풍속이 있었고, 퇴계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였다. 그러나 그 후진(後進)들은 이전 사람의 학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으며, 자만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지나치게 고상하고 세상을 멸시하는 논의를 좋아하여 구렁텅이로 점점 빠져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당목(黨目)이 한번 정해지자 기풍(氣風)이 크게 변하여 마침내 당목에 구속되어 스스로 뺄 수가 없었고, 감히 다시는 선배들 중에 진유(眞儒)의 사업(事業)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한 지가 수백년이 되었다. 지금 향촌의 풍속은 더욱 어리석어져서 볼 만한 것이 없고, 선비된 자는 첩괄(帖括)하는 작은 기술만 있을 따름이다. 그 성품은 어리석고 남을 속이며, 행동은 거짓되고 비루하고, 본업에 게으르나 나아가는 데에 조급하고, 아첨에 익숙하며 이익에 깊은 관심을 가지니, 진실로 혐오스럽고 두려워할만 하다.

1894년[甲午]

요즘 세상에 여러 가지 잡학(雜學)과 잡술(雜術)로 세상을 그르치는 말들은 일일이 셀 수가 없으나, 그 총체적인 것은 동일하니, “난리를 만나 온전함을 얻는다(遇亂得全)”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선친(先親)은 평생 동안 이 말을 싫어하여 원수와 같이 여겨서 그것을 배척하는 데에 여력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더 심하였다. 그래서 향촌사람들이 왕왕 말하기를, “난리를 만나면 박씨 집안은 반드시 먼저 죽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군자는 태평한 세상을 도모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도모하지 않는다. 또 난리를 만나면 죽는다. 그 명분을 위해 사는 것은 준용할 법칙이 아니다. 난리를 만나 구차하게 사는 것은 함께 적이 되지 않으면 적에게 항복하거나 몸을 숨기어 조세와 부역을 포탈하니, 이 또한 나라의 한 적(賊)일 뿐이다. 아! 옛날의 중봉(重峯)같은 군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거친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가 난리를 만나 스스로 나와서 국가를 위해 죽었다. 지금 사람은 비록 재주와 역량이 없더라도 이것을 분별할 수가 있을 것인데, 어찌 차마 몸을 숨겨 자신만을 온전히 할 계책을 할 수 있는가? 하물며 난리가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병화(兵禍)를 피할 방도를 세우는 자야 말할 것 있겠는가. 이는 적중에 가장 심한 적이니, 왕법(王法)에서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다. 아! 도학이 밝지 않아 이해관계가 서로 작용함으로써 인심의 착하지 못한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 한심스럽지 않은가?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은 그 조목이 매우 많으나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안으로는 서울에서부터 밖으로 궁벽한 바닷가와 산골짜기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난리를 만나 자신만 온전히 하려는 마음을 가슴속에서 끊어버릴 수 있다면 나랏일은 거의 이루어지고 습속(習俗)도 볼만한게 있을 것이다. 아! 저 잡학과 잡술의 무리는 족히 말할 것이 못되지만, 비록 온 나라 통하여 과거(科擧)로 벼슬하고 학문과 문장(文章)이 있는 가문을 살펴보면 반드시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증할 수가 없다. 나 또한 성내(城內)에서 꿈을 깬 몇몇 사람의 가슴 속이 깨끗하여 이런 마음을 쌓고 있지 않은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선친의 지문(誌文, 비문)을 구하기 위해 재차 입재(入齋) 송공(宋公)을 방문하였는데, 입재가 말하기를, “대상(大喪) 두 글자는 대전(大殿)에만 쓸 수가 있고, 내전(內殿 )에는 통용할 수가 없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본조(本朝)의 오례의(五禮儀)에, 대상(大喪)·내상(內喪)·소상(小喪)·소내상(小內喪)으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주례(周禮) 이후에 모두 통용하였다”라고 하였다. 입재가 말하기를, “고례(古禮)가 그럴 뿐만 아니라 내 선친의 대전(大全, 송자대전)에서 내전상(內殿喪 )을 대상으로 부른 것이 한두곳이 아니다. 그래서 지난번 상소(上疏)에서 이 두 글자를 사용했더니, 온 조정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대왕대비의 상(喪)을 어찌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상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려고 했더니 임금께서 일이 번잡하다고 생각하여 단지 정원일기(政院日記, 승정원일기)만을 고치게 하였다. 승사(承史)는 ‘감히 제멋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우리 아이로 하여금 승정원에 들어가서 고치게 하였는데, 승사가 감히 고치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아이도 어찌 감히 고치겠는가? 비록 내가 고치려고 해도 오히려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우리 아이가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예(禮)가 지금 임금의 제도에 굴복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종류가 통용되는 것이 어찌 해롭겠는가? 게다가 오례의에 따라 내상이라 칭하려고 한다면 또한 중전(中殿)에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입재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래서 이 두 글자를 통용할 수 없다고 하는 얘기는 대개 꺼리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다. 공가(公家, 왕실)에서 꺼리는 것은 사가(私家)보다 심하여 사(巳)라는 글자가 사(死)와 음이 같기 때문에 사시(巳時, 오전 9∼11시)를 손시(巽時)로 바꾼 것과 같은 부류가 모두 이것이다. 근래에는 더욱 심해져서, 관함(官銜)을 인가(人家)의 흉사(凶事)와 명정(銘旌) 및 묘문(墓文)에 쓰기 때문에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시강원사부(侍講院師傅)로 고쳤다. 오늘날에 와서는 소차(疏箚)에서 사자(死字)를 쓸 수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공가(公家) 뿐만 아니라 서울의 사대부 집에서 꺼리는 일은 향곡(鄕曲)보다 더욱 심하다”라고 하였다. 입재가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회동(會洞)의 정씨(鄭氏)가 더욱 심한데, 정씨가 금기(禁忌)를 숭상한 것은 양파(陽坡) 때부터 이미 그랬다고 한다”라고 하고, “내 선친이 일생 동안 다른 색목(色目)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끝이 없었으나,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을 초탈한 일에 이르러서는 다른 색목도 미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문자의 준엄한 것으로 말하면 ‘우왕(禑王)과 창왕(昌王)때에 역사에 빠진 글이 많다’라고 한 것과 같은 따위다. 다른 색목들도 모두 혀를 차며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당세(當世)에 입을 열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이는 우옹(尤翁, 송시열) 한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바뀌지 않는 공론(公論)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화복의 관건에서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하물며 소소한 금기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금기 한가지 일로도 세도(世道)가 융성한지 여부를 알 수가 있다”고 하니, 입재가 말하기를, “그렇다”라고 하였다.
경주(敬周)가 지은 그의 선친인 문헌공(文獻公)의 행장(行狀)을 내게 보여주기에, 내가 말하기를, “실록(實錄)이라 매우 좋다. 비록 그러나 한 가지 할 말이 있다. 선상공(先相公)의 평생대절(平生大節)은 바로 갑신년(甲申年, 1884) 의제(衣制)에 관한 한가지 일인데, 그 일이 끝내 종결되지 못하였으니, 이 점이 좋지 않다. 그 해 겨울 변란(變亂, 갑신정변) 뒤에 ‘허물을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임금의 유지(諭旨)가 있었는데, 어찌 수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경주가 말하기를, “정말로 그렇다. 바로 수록할 것이다. 사람에게 지명(誌銘)을 구하려고 하는데, 비문을 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한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서울 문원(文苑)의 1∼2명의 거장(巨匠)이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주가 말하기를, “나는 입재 송공(宋公)의 글을 얻으려고 한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것도 가능하다. 내가 제문(祭文)에서, ‘죽은 뒤에 정론(正論)은 성문(城門)안과 헌면(軒冕, 대궐) 사이에 반드시 있지 않고 언제나 암혈(巖穴)과 초야(草野)에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다”라고 하였다. 경주가 말하기를, “진실로 바뀌지않는 확고한 정론이다. 조선 중엽 이후에 인물을 논정(論定)한 것이 율곡과 우암 두 선생 손에서 많이 나왔다. 두 분 선생은 암혈과 초야의 선비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연전(年前)에 부상배(負商輩)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들이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운 것이 제법 심하였다. 근래에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무리는 혈족(血族)처럼 서로 아끼고 귀천(貴賤)의 신분을 나누지 않아 지난날의 부상배와 흡사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동학에 들어가는 날 갑자기 환장(換腸)하여 집안 사람과 가까운 친척사이에도 학인(學人)과 속인(俗人)을 구분하는 데, 그것은 부상배에게는 없었던 일이었다. 아! 독서하는 집안으로 불리면서 만약 이 무리와 약간이라도 비슷한 일이 있다면 이것이 어찌 하나의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닌가? 아! 괴이할 뿐이다.

1895년[乙未]

우리 조선이 나라를 세워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단지 사서(士庶)의 구분이 엄중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임술민란(壬戌民亂) 때에 그 구분이 비로소 무너졌고, 외국인이 경관(京館)에 와서 거주한 뒤에 그 구분이 더욱 무너졌다. 지금 동학의 무리는 더욱 이 일에 이를 갈아, 반드시 양반과 평민 구분을 없앤 뒤에 그만두려고 하였다. 세도(世道)가 이런 지경에 이르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사서의 구분이 없는 날은 바로 국가가 망극(罔極)한 때이다. 하늘이 만약 나라에 복을 내려준다면 이 구분이 다시 밝아질 날이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볼 일이다. 사람들이 더러 ‘지금 동도(東徒)가 의병을 일으킨다고 떠버리는데, 그 뜻은 용서할만 하다’고 말하기에, ‘지금 진실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단서가 있다’고 하는데, 지난 봄과 작년에도 꼬투리를 잡을만한 일이 있었는가? 잠자는 호랑이를 찔러 화나게 하면, 한마디 말로 어찌 할 수가 없다. 누군가 분주하게 무리를 모아 스스로 지킬 것을 모의해도, 동도가 이곳에 오면 진퇴(進退)에 근거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해결할 수도 없다. 저들 동도가 우리의 순수한 신하가 아님을 알겠다.
지난해 겨울에 경욱(景郁)이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소위 개화(開化)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서울의 동학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지나고 나서 부절(符節)을 맞춘 것처럼 들어맞았다. 온갖 계교(計巧)로 사람을 잡아끌어 자신의 무리에 가입시키는 것이 모두 지난날의 동도와 같았다. 그 사민(士民)의 구분을 무너뜨림으로써 평민과 천민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류(士流)를 어육(魚肉)으로 만든 것이 더욱 그 선문전법(禪門傳法)과 흡사한 것이었다. 크게 신분을 나누면 4가지가 있는데, 적서(嫡庶)와 사민(士民) 및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금 모두 무너져서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되었다. 다만 인물의 구분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나,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설이 성행한 뒤에 이 구분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무너지면 집안이 반드시 삭막하고, 사민의 구분이 무너지면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 화이의 구분이 무너지면 천하가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인물의 구분이 무너지면 하늘과 땅이 반드시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지금 막혀서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모두 나라를 모의하는 자의 죄이지만 세상에서 책을 읽는 군자들도 그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책을 읽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진실로 이 도(道)를 크게 밝혀서 이 세상을 지탱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또한 차마 넘어지려는 나무에 도끼로 맞받아치는 자는 누구인가? 사민의 구분이 무너졌으니, 그런 예(例)를 만든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며, 그것을 이룬 자는 어떤 사람인가? 동도가 동학으로 이름을 한 것은 어디서 본받았는가? 또 한번 변화하여 개화당이 되었으니, 그 구분은 마침내 영원히 무너지고 나라는 그것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애통하고 애통하다.

1896년[丙申]

지난 가을 의복제도가 변경될 때는 두루마기의 소매를 줄일 뿐이었다. 지금 다시 그 옷의 색깔을 검게 하는 일이 있으니,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제사(祭祀)와 관혼(冠婚)에서 아직 포복(袍服, 두루마기)을 입으니, 이 또한 서울과 지방에서 통용되는 관례이다. 그러나 개화당의 사람은 또 어떻게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조상을 제사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대중을 따라 포복을 입는다면 이것은 임금을 기만하고 조상을 속여 양쪽에서 죄를 지은 자가 아니겠는가? 만약 감히 두루마기를 입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스스로 몸에 입는 의제(衣制)를 변경한 것이고, 진실로 남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궁극에 이르면 반드시 변한다. 10년 안에 개화당도 또 반드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 살고 싶은 바람이 없을 수가 없다.
임충민(林忠愍)이 중도에 망명(亡命)한 것은 삼학사(三學士)가 죽은 것에 비해 그 기개가 볼만 하지만 끝내 무인(武人)의 풍습(風習)을 면하지 못하였고, 특히 조용한 사군자(士君子)의 풍모가 없었다. 나라의 풍속이 사람을 처지를 가지고 국한함이 이와 같다. 만약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었다면 비록 무인이더라도 결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근래의 일로 본다면, 제천(堤川)의 의병은 임충민과 비슷하고, 홍주(洪州)의 의병은 삼학사와 비슷하다.

1898년[戊戌]

객(客)이 묻기를, “근래에 일어난 의병은 그들을 인솔하는데, 유자(儒者)가 많이 있다고 하니 그대도 스스로 의병장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문칫문칫하다가 대답하기를, “나는 진부(陳腐)한 유학자이다. 비록 내 자신이 의병장이 되려고 해도 이미 뜻대로 할 수 없는데, 더욱이 사람들을 모아 그 장령(將領)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의병을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마음은 장수가 되고 눈·귀·손·발은 그 막료가 되었으며 피·고기·털·뼈는 군졸이 되어 각각 그 직임에 맞추었다. 입의 임무는 재물과 곡식을 담당하여 장수와 막료 및 군졸이 모두 그것에 의지하니, 이것은 진실로 빠뜨려서 안되는 임무였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 직임을 담당하는 자는 반드시 골짜기처럼 끝없는 욕심을 극복하려고 하고, 저 막료와 군졸이 된 자는 오로지 순종할 뿐이다. 그 장수가 처음에는 제법 금지하지만 끝내는 역시 따라가니, 소위 의병이라는 것이 결국 불의(不義)한 군대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신(一身)의 의병장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객이 잠시 낙담하는 모습으로 있다가 말하기를, “지금 소위 의병이라고 하는 자는 이르는 곳마다 돈과 재물을 빼앗는 것이 정말로 심하여 혐오할만하다. 이것은 동도가 남긴 습속이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영대(靈臺)가 진실로 편안하다면 입과 몸이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100년전에는 학술(學術)이 이록(利祿)을 제재하였으나 100년후에는 이록이 도리어 학술을 제재한다. 세상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진실로 그 형세 때문이니 어찌 그리 괴이한지고.
나아가 삼천(三泉) 홍학사(洪學士)에게 조문(弔問)을 하다가, 요즘 사람들의 출처(出處)하는 일에 언급이 되었다. 삼천(三泉)이 말하기를, “갑오년(甲午年, 1894) 이후에 수구(守舊)하는 자들이 점점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오직 이봉조(李鳳藻)는 임금께 고(告)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승지(承旨) 김상덕(金尙德)은 부모에게 말하고 나가지 않았다. 모두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봉조는 그 할아버지가 병인년(丙寅年, 1866)에 자정(自靖, 자살)한 일로 의(義)의 요체를 삼아 상소에서 언급하였고, 김상덕은 선친의 비문을 직접 지어서 말하기를, ‘소자 상덕은 벼슬이 승지에 그쳤다’고 하였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런 일은 다만 주인어른에게 말하면 충분한데, 어찌 임금과 부모에게 고(告)하는 데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삼천이 다시 말하기를, “근래에 봉조가 우연히 온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일부러 몸을 자유롭게 놀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이경적(李景迪)에게 들렀더니, 경적이 마침 강화도에서 봉조를 만나보고 와서, “정말로 그렇다. 다만 전신불수가 아니라 반신불수이다”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시에 있는 “두 살적엔 눈이 내리고 반신엔 바람이 불었네[雙鬢雪半身風]”를 외었으니, 아마도 거짓으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지금 세상에 소위 개화(開化)라고 하는 무리는 그 인품이 어떠한가”라고 하기에, “여러 대륙의 영재(英才)와 본국(本國)의 적신(賊臣)은 그 집안의 중조(中祖)이다. 개화에 물든 명문세가(名門世家)도 유명한 조상의 패악한 손자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는 중엽 이후엔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의 선악(善惡)이 밝지 못하여 충신과 반역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충신이라 하나 도리어 절의가 없고, 반역이라 하나 도리어 공(功)이 있는 자가 무한정 많은 것이다. 지금 소위 개화라고 하는 무리도 제법 저들과 비슷하다. 또 지금 나라가 외국에 제재를 받은 것도 고려 말에 몽골에게 제재를 받은 것과 같다. 기수(氣數, 운수)의 융성과 쇠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어서 사람의 힘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석
심의(深衣) 제후·대부(大夫)·사(士)가 집에서 입는 옷이거나 서민이 입는 상례복(常禮服)을 말한다.
장석지(張釋之) 한(漢)의 남양(南陽)사람으로 자는 계(季)이고 문제(文帝)에게 중용되었다.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8. 한(漢)의 성도(成都)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고 작품으로 자허부(子虛賦) 등이 있다.
난장(亂場) 과거시험장에서 선비들이 질서없이 들끓어 뒤죽박죽이 된 곳을 말한다.
칠서(七書) 송 신종(神宗)때 무과(武科) 응시생이 읽어야 했던 일곱 가지 병서(兵書)로 손자(孫子)·오자(吳子)·사마법(司馬法)·울료자(尉繚子)·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육도(六韜)·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무경칠서(武經七書) 등을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사서삼경을 두고 한 말이다.
대축주(大祝注) 대축(大祝)은 축관(祝官)의 장(長)이다.
첩괄(帖括) 첩경(帖徑, 경서의 앞뒤를 가리고 중간의 한 行만 보여주고 그 대체적인 뜻을 쓰게하는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을 위해 난해한 구(句)를 뽑아 기억하기 쉽게 노래로 만든 것을 말한다.
삼학사(三學士) 첩경(帖徑, 경서의 앞뒤를 가리고 중간의 한 行만 보여주고 그 대체적인 뜻을 쓰게하는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을 위해 난해한 구(句)를 뽑아 기억하기 쉽게 노래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