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록(避亂錄)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평화로운 시기의 제왕도 이렇게 이야기 하였으니 하물며 난세에 처한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번 동요(東擾)로 피해를 입은 자를 살펴보니, 이들은 모두 갑작스레 뜻하지 않은 능욕을 당하여 비록 옥석(玉石)이 모두 타버린 탄식이 있더라도 평소의 원수를 갚는 데 이르러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본다면, 선행을 쌓은 사람은 난세에 비록 신체와 재산을 모두 온전하게 보전할 수는 없어도 굶주림과 역병으로 횡사하는 액운을 당하지 않고 반드시 목숨을 보전할 방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하늘이 반드시 그를 살펴보고 귀신도 반드시 그에게 벌을 주어 보응(報應)을 분명하게 하므로 어디에 있더라도 화가 미친다. 만약 그가 재물까지 많이 가지고 있다면 더욱 목숨을 보전하고 성명(姓名)을 온전히 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
우리 집안은 본래 시(詩)와 예(禮)를 익혀온 전통 있는 가문으로 효도하고 우애로우며 화목하여 사람들이 본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나는 가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선조를 더럽힌 죄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선조들의 음덕이 미쳐서 후손들이 집안의 명성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어떤 한 이단(異端)의 학설이 수년 전부터 도처에서 성행하여 이른바 동학(東學)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처음에 근기(近畿)와 양호(兩湖)지역에서 발생하여 [결락] 은밀하게 전파되었다. 나라에서는 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비록 드러내놓고 전파되지는 못하였으나 시골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결락] 유(儒)·불(佛)·선(仙)의 삼도(三道) 가운데서 흘러나왔으며, 그들의 행동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경하고, 집안에서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여 오륜(五倫)과 사단(四端)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비록 그것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듣고는 기이하게 여겼다.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아무도 그 진위를 밝히지 않았다.
작년 이래 동학이 점차 성행하였는데 호남과 경기에서 가장 성행하였으며 호중(湖中)이 그 다음이었다.
사람들 중에 혹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힐난하는 자가 있으면 종종 무리를 지어 그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도(道)를 비난한다는 핑계로 그를 묶어서 때리며 온갖 욕설과 수모를 주었다. 경내의 사대부 집안도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거리에서는 언어를 조심하고 여항(閭巷)에서는 시끄럽고 떠들썩하였다.
동학을 처음 만든 자는 보은(報恩)에 살았던 최제우(崔濟遇)이며, 그의 호는 법헌(法軒)이었다. 법헌은 와서 배우려는 사람에게 동학을 전파하였다.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파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전파하였다. 교(敎)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은 접주(接主)라고 자칭하며 동학을 바꾸어 동도(東道)라고 하였다. 동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입도(入道)하였다고 하며 스스로를 도인(道人)이라고 칭하였다.
김래현(金來鉉)과 서병학(徐丙學)은 모두 명문거족으로 여기에 물이 들어 동학의 거괴(巨魁)가 되었으니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수령과 방백(方伯)들은 아무도 그것을 막지도 금하지도 못하고 결국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어윤중(魚允中)에게 명하여 이들 무리들을 선유(宣諭)하도록 보은으로 내려 보냈다. 그때 삼도(三道)의 비류(匪類)들이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다.
서병학은 이미 귀화하였으나 그 밖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겉으로는 귀화하는 척하면서 실제 속으로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뿌리를 뽑지 못하고 줄곧 소란스러웠으니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하고 백성들의 풍습을 교화시키기 어려움을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은혜로써 타일렀는 데도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으니 군대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섬멸하는 국법을 시행하였어야 왕령(王令)을 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예사로운 일로 보아 넘겼다. 조정 이하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들은 소요가 일어난 초기부터 동비(東匪)를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뿌리를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절로 잠잠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리석고 부랑한 무리들이 평소에 이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비루한 습속을 바꾸지 않는데 어떻게 저절로 잠잠해지겠는가?
이른바 동비가 일단 보은에서 집회를 가진 뒤로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서 그 모습이 나날이 달라졌다. 마을마다 접(接)을 설치하고 사람마다 주문을 외니 그 형세가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하고 조수(潮水)가 밀려와서 넘치는 것 같아서 국가흥망의 위기가 경각에 달려있었다. 지난 날 보은에서 집회할 때 무엇 때문에 토멸하지 않고 다만 저들의 입에 발린 소리만 믿고 순무(巡撫)만 하여 저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는가? 그리하여 도리어 약한 모습만 보여주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우환을 끼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미약할 때 방지해야 후회가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그 끝을 다스린 자는 없었다.
호남지방의 거괴(巨魁) 전녹두(全彔豆), 전봉준와 김개남(金介南)은 가장 유명한 자들이다. 호중(湖中)의 거괴는 최제우, 박덕칠(朴德七), 박도일(朴道一), 이창구(李昌九), 손사문(孫士文), 안교선(安敎善), 황하일(黃河一), 이종필(李鍾弼), 이성시(李聖時)였다. 박덕칠은 예산(禮山)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박덕칠을 따르는 자들은 그를 예포(禮包)라고 불렀다. 박도일은 덕산(德山)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박도일을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덕포(德包)라고 불렀다.
저들은 스스로 왜(倭)와 양(洋)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매일 무기를 지니고 동쪽의 가옥에서 무리를 짓지 않으면 서쪽 동네에서 작당을 하여 국법과 왕장(王章)을 무시하고 방백과 수령을 도외시하였다. 저들 중에 만약 산송(山訟)이나 채무 혹은 자질구레하게 원한을 갚을 일 등이 있으면 저들이 제멋대로 판결을 하였다. 심지어는 사대부를 묶어놓고 형을 가하기도 하고,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고, 채무를 강제로 받아내고, 근거없이 강제로 돈을 징수하고, 유부녀를 강제로 겁탈하였다. 양반가의 노비들은 그들의 노비문서를 탈취하고 상전을 욕보인 뒤에 떠나갔다. 부자들의 돈과 곡식을 빼앗고, 남의 소와 말을 가져갔다. 저들이 갚아야 할 물건들은 모두 탕감하여 준다는 증서를 강제로 받아내었다.
반상(班常)·노소(老少)·귀천(貴賤)·친소(親疎)·선악(善惡)을 구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아침에는 동쪽 집안의 무덤을 파헤치고 저녁에는 서쪽 이웃의 재산을 빼앗으며 마치 무인지경을 다니듯 하였으니 원성이 길에 자자하였고 재앙의 기색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중에서 특히 피해를 입고 곤욕을 당한 자들은 유독 양반가였다. 갈산(葛山) 김씨(金氏), 삼산(三山) 이씨(李氏), 두리(斗里) 정씨(鄭氏)들은 우리나라의 거족인데 집집마다 봉변을 당하였다. 또 앞으로 어떤 화가 닥칠지를 몰라서 신주를 묻고,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온 식구가 도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사환을 데리고 가마를 타고 나다닐 수 있겠는가. 이른바 사환들은 곧 원수로 바뀌었고, 어제까지 친숙하던 사람들이 모두 원수가 되었다. 비록 친지나 친족 간이라도 그들이 곤욕을 당하는 것을 바라만 보며 아무도 감히 구해주지 못하였으며 남의 일처럼 생각하였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집안들이 모두 문을 걸어 잠그니 집안이 쓸쓸해졌고 동네가 삭막해졌다. 또 동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길을 다닐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비류를 만났을 때 반드시 동학도의 방식으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면 다행히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트집을 잡아서 끝내 말썽을 일으켰다. 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혐의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난세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의 이른바 동비(東匪)의 난에서 그들은 승냥이와 이리나 뱀과 전갈처럼 독을 품고 있지만, 그 근본을 조사해 보면 원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다. 비단 같은 나라 사람일 뿐만 아니라 같은 고을과 같은 마을의 이웃들이었다. 그 중에는 더러 친척이나 주객(主客)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대로 친분을 맺어온 성이 다른 형제도 있었으며, 또 평소에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은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른바 도(道)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을 기준으로 갈라진 뒤에는 구적(仇敵)처럼 질시하고 살인을 한 것처럼 원수로 여겼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생필품도 서로 도와주지 않았으며, 부족한 것을 서로 보태주지 않았고, 농사일도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비록 이웃이나 옆집에 살더라도 초(楚)와 월(越)의 사이 처럼 소원하게 지냈다. 한 집안이 미움을 받고 곤욕을 당하게 되는 싹은 모두 평소 친숙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비록 난세라고 해도 어찌 이러한 짐승 같은 무리들이 있단 말인가.
난리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이것이 과연 공익을 위한 것인가 사익을 위한 것인가? 저들 무리들은 난리를 일으킨 뒤에 스스로 국법을 무시하고 예의(禮義)를 단절하고 화를 자초하여, 비단 나라를 동요시키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외국의 이적(夷狄)에게 수모를 당하여 결국 자신을 죽이고 집안을 패망시켰으며 그들의 뼈를 모래사장에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지만 이는 또한, 슬픈 일이기도 하다.
6월 12일에 나는 한창 사람들을 구하여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산촌(遊山村)의 주민 10여 명이 급히 달려와서 숨을 헐떡이며, “청나라 사람 수백 명이 창과 칼을 가지고 비바람과 같은 형세로 방금 유산촌으로 들어와서 도륙을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온 마을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겁을 먹고 정신이 나가서 달아나 숨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산 위를 돌아보니 양반가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일제히 소나무 숲 속에 숨어있었다. 또, 동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낭자하게 들려서 앞길을 바라보니 바닷가 마을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부축하여 가는 행렬이 도로에 이어져 있었다. 그 내막은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보니 두렵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밭을 매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죄다 달아났다. 만류하여도 붙들 수 없었으며 타일러도 듣지 않았다. 이러한 때를 맞아 나 또한 지난 날 학문을 하지도 않았으며 고명한 식견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시 생각해보니, 상국(上國), 청국과 우리나라는 병자년(1636년) 이후에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오장경(吳長慶)과 원세개(袁世凱) 두 대인이 다녀간 이후에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항상 우리를 도와주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주리(州里)를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도륙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근처의 지척지간까지 들이닥쳤다고 하니 어찌 잘못 전하여진 말이겠는가.
나는 그 허실을 자세하게 조사하고 싶어서 몰래 산 위에 숨어들어 그 동정을 살피니 아까 수백 명이 들어와서 못된 짓을 한다고 하던 그 청나라 사람들은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서 친족인 청양(靑陽)의 집에 이르렀더니 수백 명이라고 한 청나라 사람들은 겨우 20명이었다. 그들은 마침 저녁을 먹고 있다가 나를 보고 기쁘게 맞이하였다.
나는 필담으로 그 곡절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왜병(倭兵)과 성환역(成歡驛)에서 싸워서 왜병에게 패하였는데 장수 섭통령(聶統領), 섭사성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의지할 곳이 없어 각자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왜병이 또 추격하여 오자 계책이 떠오르지 않아 지금 안흥(安興)으로 가서 바다를 항해하여 귀국하려합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 마을마다 들러서 큰 집을 골라 투숙을 하고 식사를 얻어먹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집으로 들어왔으며, 70명은 오동(梧洞) 임진사(任進士) 집으로 갔고, 30명은 한성지(漢城之)로 갔고, 30명은 덕지천(德之川)으로 갔고, 50명은 대교(大橋)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궁박한 새와 다름이 없었다. 왜병이 추격해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바닷가 마을의 사람들과 연로(沿路)의 노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갔다. 그 사정을 잘 생각해보면 수 천리 타국에서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왔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가엽고 불쌍하였다. 그러나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백명이나 되는 많은 숫자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토색(討索)을 하고 온갖 폐단을 일으킨다고 하니 길가와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 놀라서 흩어지지 않았겠는가. 20명이 수 백명으로 와전되고 밥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고 도륙을 한다고 하면서 일제히 도망가서 숨었으니 난세의 인심을 이를 통하여 징험할 수 있었다. 옛날의 난세에도 과연 이처럼 와전되어 헛것을 보고 놀랐을 것인가?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왜병에게 패배한 사정을 살펴보면 이 또한 호남의 동학을 토벌하려던 데서 발단이 되었다. 그러니 이른바 동학은 청과 왜가 틈을 타는 꼬투리가 되었으며, 이른바 왜와 양(洋)은 동학이 화근을 빚어내는 뿌리가 되었다. 이나 저나 모두 나라를 어지럽혀서 국가의 기강이 바로서지 않고, 국가의 재물이 탕진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생령들이 마치 땅이 무너지고 기와 지붕이 흩어지듯이 위급해 하고 갈팡질팡하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 우리나라가 비록 한 구석에 치우쳐 있지만 최고운(崔孤雲), 최치원과 정포은(鄭圃隱), 정몽주 이하 영남의 오현(五賢)과 정암(靜庵), 조광조, 퇴계(退溪), 이황, 율곡(栗谷), 이이, 사계(沙溪), 김장생, 우암(尤庵), 송시열 등의 여러 현자들이 연이어 나타나서, 의관(衣冠)·문물(文物)·인의(仁義)·예악(禮樂)·정치제도가 찬란하게 갖추어졌다. 그 도덕과 학문의 연원은 염락관민(濂洛關閩)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공자(孔子)·맹자(孟子)·정이(程頤)·주희(朱熹)를 전수하여 익히고 우러러 사모하였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소리가 사대부의 집안에서 끊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남자와 촌부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 글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모두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사람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좌해(左海)의 백성과 만물들이 금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조종(祖宗) 이래 올바른 학문을 배우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 덕택이었다.
아, 비통하구나. 어떻게 십여 년 사이에 동서의 도이(島夷), 일본과 서양가 까닭 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오백년 예의의 나라에 창궐하고 있는가? 그들이 괴상한 술책과 사악한 재주로 우리의 사민(士民)들을 유혹하니 이로 인해 강령(綱領)이 해이해 지고, 이로 인해 제도가 바뀌었으며, 사악한 말들이 성행하고, 정통이 영원히 단절되었다. 우리들을 중화(中華)에서 이적(夷狄)이 되게 하고, 어두운 암흑세계로 급속하게 몰아넣어 하늘에 뜬 밝은 해와 달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어찌된 까닭인가? 한 나라가 침범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들거늘 하물며 지금은 서양의 각국이 누린 고기를 좋아하는 개미처럼 달려들어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지가 십여 년이 되었다. 그들은 개화(開和), (開化)의 오기를 칭탁하며 요해처를 골라 도처에 개항을 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베푸는 것은 가혹한 법령이요, 가르치는 것은 사악한 술법이다. 이른바 교역은 저들 나라의 지극히 천하고 기괴한 물건들을 몇 배나 비싼 값을 받고 팔며, 우리나라의 오곡(五穀) 및 여타 물건들 중에 품질이 좋은 것을 가려서 역시 후한 값을 쳐서 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리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매매를 하지 않고 부정한 방법을 쓰더라도 물건을 항구로 보내었으니, 항구에는 한 나라의 전곡(錢穀)과 기타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리하여 외국사람이 곡식을 밟고 다닐 정도로 곡식이 거름처럼 천해졌다. 외국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니, 한 나라의 재물과 곡식이 모두 외국인의 손에 고갈되었다. 이와 같은 데도 외국인들은 곡식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공문(公文)을 근거로 삼아 각 포구(浦口)에 돈을 쌓아 놓고 마음대로 곡식을 사들여서 부자와 부상(富商)들로 하여금 남은 곡식이 거의 없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향곡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약간의 돈이 있더라도 개인적으로 양식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땅을 파먹고 사는 백성들은 일 년 내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조세를 내기가 힘든데 외국인들에게까지 곡식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추위와 배고픔이 뼈 속까지 사무쳐서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은 적이 한 해도 없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가의(賈誼)는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한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열 사람이 모여서 그것을 먹는다면 천하에서 배고픔을 없애고자 하여도 불가능하다. 백 사람이 옷을 만들어도 한 사람을 입힐 수가 없다면 천하에서 추위를 없애고자 하여도 가능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나라가 모여서 그것을 먹고, 한 부녀자가 옷을 지으면 열 나라가 모여서 그것을 입으며, 한 사람의 장인이 기물을 만들면 열 나라가 모여서 그것을 사용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나라의 재물이 어떻게 탕진되지 않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추위에 떨고 굶주리지 않겠는가. 그 그림자를 살펴보고 또 그 모습을 보니 속담에서 이른바 별다른 상처는 없는데 머리가 부서졌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었다. 우리의 사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선왕의 법언(法言)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더 이상 선왕의 법복(法服)을 입지 못하게 하여 오백년을 지켜온 법강(法綱)과 예교(禮敎)가 한꺼번에 다 무너졌다.
아, 저 영화와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들은 왜학(倭學)에 들어가지 않으면 양학(洋學)에 들어가고, 양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학(俄學), 러시아의 학문에 들어가서 권세의 길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이 때문에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영화를 탐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용렬하게 흉내 내며, 또 방백과 수령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서학(西學)에 들어가지 않으면 동학에 들어가고 동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서학에 들어가서는 여항에서 행패를 부리고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고요(皐陶)·기(夔)·후직(后稷)·설(契)이 함께 조정에 있거나, 두시(杜詩)·소신신(召信臣)·공수(龔遂)·황패(黃覇) 등이 주군(州郡)에서 서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반드시 그것을 바로잡고 옛날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는 우리 집이나 남의 집을 막론하고 독서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어서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귀로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듣지 못하게 하고 눈으로는 육예(六藝)와 사단(四端)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이 흘러가버리면 선왕(先王)의 정법(正法)을 어떻게 볼 수 있으며 선유(先儒)의 정학(正學)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그들은 시양(廝養)과 다름이 없게 되니 이는 매우 한스럽고 애석한 일이다. 비단 지금 동비의 난 뿐만이 아니라 전해오는 약간의 비결(秘訣)을 보면 매년의 운세를 논한 것이 있는데, 비록 장래의 일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지나간 일은 부절을 맞추듯이 잘 들어맞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생령들이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집의 아이는 금년 봄에 면천(沔川) 한기(閑基)의 이씨(李氏) 집으로 장가를 갔는데 그 집안은 정승을 지낸 용재(容齋), (李荇)의 후손이다. 혼인할 때에 양가의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여 즉시 신행(新行)을 하지 못하고 가을에 신행을 하기로 양가가 의논하였다.
그러나 봄 이후로 사돈댁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더구나 요즘같이 어지럽고 급박한 세상에서는 실제로 정신을 쏟기가 어려웠다. 7월 초에 사돈댁에서 특별히 하인을 보내와서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마음이 놓이기가 말할 수 없으며, 술과 안주까지 보내어 왔다. 이는 며느리의 효양(孝養)이니 세상사는 재미를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난리의 형세가 급박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짐작할 수 없으니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새 사돈의 편지를 보니 집의 아이가 추석 전후에 재행(再行)하여 며느리를 데려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세상일이 무사히 지나갈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새 사돈댁의 하인과 함께 걸어서 가라고 명해야 하니 현재의 이러한 슬프고 비통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말고 즉시 돌아오라고 직접 명하였다. 그런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근처에 동비의 세력이 나날이 성해져서 경내에 곤욕을 치른 집안이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석천(石川)의 재종숙부도 석천의 임가(林家) 놈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매일 보고 듣는 것들이 답답하고 두려운 것들 뿐이었다. 공림(空林)댁도 지금 트집을 잡히고 있었다. 우리 생가의 누대 산소는 온정동(溫井洞)에 있는데, 이웃 동네에 사는 전복록(全卜彔)·박명돌(朴命乭)·김준약(金俊若) 등이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그 산을 사들여서 연전(年前)에 묘지 구역 내에 몰래 산소를 썼다. 그래서 나는 즉시 직접 파가라고 하였다. 그놈들이 현재의 시국을 만나서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집회를 가진다는 소문이 날마다 들려오니 어찌 놀라고 겁이 나지 않겠는가.
어느 날 저녁에는 하성산(下城山)의 송수진(宋壽辰)·신산동(申山同)·이건성(李建成) 등이 와서 입도(入道)할 것을 권하면서, “만약 입도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반드시 큰 곤욕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건성·신산동·송수진 세 놈은 평소에도 불량배로 지목받던 자들이었다.
이른바 이건성은 한 동네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한 날 저녁에 동산(東山) 김감찰(金監察)이란 자에게 입도하였다. 이른바 감찰이란 자는 태안(泰安) 청산동(靑山洞)의 김가(金哥)이다. 이 자는 버릇이 사나우며 스스로 경주(慶州) 김씨(金氏)라고 칭하면서 경주 김씨의 항렬을 따라 상하(商夏)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전에도 좋지 못한 버릇 때문에 감영과 고을에서 여러 번 형벌을 받았으며 지금은 산천포(山川包)의 접주(接主)가 되어 근처의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분위기를 흐리고 말썽을 피우며 못하는 짓이 없는 자였다. 하성(下城) 한 동네의 사람들이 입도한 이후로 밤마다 주문을 외는 소리가 일대를 진동하였는데 그 소리는 마치 귀신이 웅성거리는 것처럼 음산하고 살벌하여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날이 밝으면 이른바 비류의 무리들은 각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집의 전후좌우에 늘어섰다.
정삭불(鄭朔不)은 머슴으로 고용채(雇用債)를 300냥으로 정하고 200냥을 먼저 받아갔다. 그런데 6월에 결국 동학을 따라 가버렸으니 누가 붙잡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땔감 구하기가 어려워 직접 후원에서 땔감을 베며 혹 비류들이 오고가는 것을 살펴보았으니, 앉으나 서나 안정을 하지 못하고 좌우를 돌아보는 나의 모습이 마치 재앙의 그물에 걸린 것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아는 사람이 찾아와서 전하기를, 모레 전복록이 갈산(葛山)의 포악한 무리 수백 명을 데리고 틀림없이 우리 집에서 집회를 열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자도 입도를 한 인물이나 이번 일을 당하여 이름을 의탁하였을 뿐 속으로는 본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처음에 이 말을 듣고 백방으로 생각을 하였으나 피할 방법이 없었다. 도망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좋은 계책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이에 끝이 날 난리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 도망가기는 어려웠다. 만약 온 식구가 모두 도망가려면, 세간을 실어가는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우선 제사를 받드는 사람으로서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상황을 살펴보고 사기(事機)를 생각해보니 앉아서 막기가 어렵다면 온 식구가 모두 화를 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또 송산(松山) 이도정(李都正)의 집안 대소가가 모두 식구들을 데리고 도피하였으며, 어제 저녁에 공림댁도 이미 온 가족이 도피하였다. 지금 그들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흩어지는 광경을 상상하면 실로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7월 23일이다. 이날 밤에 나도 신주(神主)를 후원에 묻고 이른바 솥 등의 세간을 빈 집에 버려두고 문과 창문을 닫아걸고서는 어린이를 업고 처를 데리고 돌연히 문을 나섰으나 사실 갈 곳이 없었다. 당내(堂內)의 여러 집안사람들이 내가 갈 곳을 물었으나 나도 아직 갈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장소를 지적하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갈 곳을 미리 정해놓았더라도 난세에 화를 피하는데 종적을 노출할 수가 없으므로 상세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이별의 시점에 당연히 서운한 마음이 있으나 도리어 불편한 말이 있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피난을 할 때 가는 곳을 드러낸다면 피난하는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부득이 하여 신기(新基)의 친척 안씨(安氏)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밤중에 허둥대는 행색이 어찌 대낮에 여유롭게 갈 때와 같겠는가? 이에 세 번이나 개울에 빠져서 옷, 신발, 갓, 망건이 모두 젖어 마치 버려진 물건과 같았다. 사람이 마치 도깨비[魍魎]의 모습처럼 되었으니 항우(項羽)가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과연 이처럼 분망하였을까. 거의 한밤중이 다되어 천신만고 끝에 신기에 도착하여 친척 안씨의 집에 유숙하였다.
다음날은 비가 와서 그대로 머물렀으며 밤에 친척 안씨, 그리고 머슴아이와 함께 공암(孔巖)에 가서 집안에 있는 이부자리와 옷 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이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집이 비좁을 뿐만 아니라 비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모두 낯이 익은 비류들이었다. 만약 한번이라도 그들을 만난다면 필경 종적이 탄로 날 지경이었다. 이때는 이른바 지난 날에 친숙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생면부지의 사람들보다 못하던 시절이었다. 백번을 생각해도 갈 곳이나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만약 하늘로 올라가고 땅속으로 들어가며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오는 재주가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구가(九街)의 큰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지나가는 길이 모두 비류들의 소굴이었고 또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만 먹고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천안(天安)의 조카 집으로 가려면 처자식을 데리고 개울을 건너 수 백리를 가야하는데 만약 중간에 불의의 욕을 당한다면 이는 노루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어 끝내 변통할 방도가 없게 되니 또한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몇 달 동안 한기의 새 사돈댁에 가서 의탁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집의 아이가 한 번 간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닌데다 또 사돈댁에게 의탁할 일을 먼저 새 사돈과 의논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에 한기로 갔다.
지나는 길에 먼저 친구 이덕인(李德仁)씨를 방문하였더니 덕인씨가 놀라면서, “자네는 지금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우리 집에서 오는 길이네”라고 답했다. 친구 이씨는, “그렇다면 어제 자네의 며느리를 자네 아들이 직접 데리고 신행을 갔는데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나를 찾아왔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심장과 담이 모두 떨어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식경이 지난 뒤에 나는 그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였다. 친구 이씨도 놀라서 얼굴 빛이 달라졌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화복(禍福)은 신수(身數)에 달려있고 생사(生死)는 천운에 달려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서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가는 것 외에 어떤 좋은 계책이 있었겠는가. 대개 그 사정을 들으니 모두 집의 아이가 깨닫지 못한 소치였다. 지금 세상을 돌아보면 이와 비슷한 광경이 또 얼마나 더 있으리오. 풀이 죽고 마음이 병든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새 사돈도 일이 있어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성첨(聖瞻)씨와 함께 왔던 길의 거취를 찾아서 지팡이를 짚고 동행하여 서둘러 중도에 이르렀을 때 자화(子和)씨가 며느리를 데리고 어둠 속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무안한 가운데 기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보는 듯하였다. 그런데 집의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집의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와 동생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자 동서를 구분하지 못하고 울면서 길을 돌아다녔으며 달래어도 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도리와 정황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행동 또한 당연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이르니 자식에 대한 정이 더욱 간절하여 그에 대한 걱정으로 실상 미친 듯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거처할 곳이 없으면 또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용서하면서 일행과 함께 한기로 돌아오니 새 사돈도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 주인과 객이 저간에 겪은 일의 전말을 모두 이야기하며 서로 한편으로 위로하면서 한편으로 슬퍼하였다. 나는 이곳으로 피난 오겠다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에 신기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집의 아이를 만나서 돌아가니,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슬픈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나면서 정안(正安)의 윤자신(尹子信) 어른을 방문하였는데 그 집도 소와 말을 비류에게 빼앗기고 비할 바 없는 곤욕을 치렀다. 이러한 일은 우리들에게는 다반사로 피차의 우열이 없었다. 죽기(竹基)의 사종형 경숙(景叔)씨와 세 숙질도 화를 피하여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식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올 계획이었는데 부녀자들이 도보로 행장을 지고 주막에 투숙할 수도 없고 또 모르는 사람의 집을 찾아들어갈 수도 없으니 형편상 친척이나 지인들의 집을 찾아가야 했다. 그래서 수일 후에 우리 식구가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윤씨 어른에게 간청하였다. 그리고 즉시 운산(雲山)의 국빈(國彬) 집에 가서 유숙하고 또 식구들을 데리고 하룻밤을 묵고 떠나겠다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바로 수동(壽洞)의 친구 김성습(金聖習)에게 가니 김씨 삼대(三代)가 소나무 숲 아래에 숨어 앉아 반쯤 죽은 기색으로 한창 신을 삼고 있다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망측한 일들을 들으니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삼종동생 연심(淵心)을 찾아가서 함께 한기로 가자고 청하여 그와 함께 신기에 도착하였다. 모든 식구들이 무사하여 다행이었다.
그런데 오면서 들으니 집안 할아버지인 평해(平海)께서 그의 노복이 소란을 일으켜서 근처로 피신하였으며 또 종창을 앓아 지금 위독하다고 하였다. 노인의 사정을 생각하니 매우 안타까웠다. 그리고 족제(族弟) 혜천(惠天)씨의 집은 본래 가난하지 않았으나 평소 이웃과의 거래가 너그럽지 못하여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불량배들이 현재의 시국을 만나서 도(道)를 훼손한다고 빙자하며 묶어서 형(刑)을 가하고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머리카락이 서고 담이 떨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친척 안씨와 연심이 이부자리와 옷 보따리를 지고 가겠다고 하여, 처자식을 데리고 면천(沔川)으로 향하였다. 밤중에 여미(餘美)의 저자거리에 도착하니 임금옥(林今玉)의 집에서 뜻밖에 적도(賊徒) 10여 명이 고함을 지르며 추격하여 와서 우선 두 사람이 지고 가는 짐을 빼앗고 또 우리 일행을 가게의 다락으로 몰아 넣고 나를 서학(西學)을 믿어서 도주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면서 끝없이 위협하고 괴롭혔다. 또 나에게, “너는 대교(大橋) 김가(金哥)가 아니냐?”라고 물었다. 나는 김가라는 질문을 듣고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지며, “나는 김가가 아니라 광천(廣川)에 사는 조가(趙哥) 성을 가진 사람이네. 그런데 자네들은 혹 대교 김씨 중에 서학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가?”라고 하였다. 그 무리들이 답하기를, “네가 만약 서학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왜 도주하는가? 근래 들으니 대교 김가들 중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도주하는 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너는 혹시 그 대교 김가가 아니냐?”라고 하였다.
내가 성을 바꾸어서 대답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작년 가을에 대교 개령(開寧)댁의 산송(山訟)의 일 때문에 덕포(德浦) 이병사(李兵使) 집의 머슴 이하 한 동네의 여러 사람들이 혹은 해읍(海邑)에서 중형을 받고 재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다른 읍으로 이감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덕포 일동의 사람들이 거의 흩어져서 텅 비게 되었다. 현재의 시국을 만나서 덕포의 여러 사람들이 절치부심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만약 우리 김가를 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칼을 뽑아 보복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을 품고 미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런 험악한 말을 들은 뒤로 우리 집안사람들 중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가는 자들이 생긴 것은 특히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덕포의 사람들이 길에서 지키고 있을까 의심하여 갑자기 성을 바꾸어서 대답하였던 것이다.
저들이 정말로 덕포의 사람들이라면 내가 성을 바꾸지 않고 포학한 욕을 끝없이 당하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서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옛 현인군자도 위험이 닥쳤을 때 융통성을 발휘하였는데[臨危處變之道] 하물며 후세의 어리석은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진(陳)과 채(蔡) 사이에서 곤욕을 당하였고, 또 미복(微服)으로 송(宋)을 지나갔다. 공자와 같이 하늘이 내리신 순강(純剛)한 대성인도 부득이하게 한 때의 임시적인 방법[權宜之策]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맹자(孟子)가 말한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구조하는 것은 임시방편으로, 이는 아성(亞聖)의 불후의 교훈이다. 만약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손으로 몸을 만지는 것을 꺼려서 구조하지 않아 형수가 빠져죽는다면 이는 인간의 도리와 인정이 아니다. 그래서 맹자도 그 뜻을 분명히 밝혀 후세에 교훈을 내렸으니, 이 또한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진(秦)의 재상 범수(范睢)는 당시 원로로서 저택에서 수가(須賈)를 만날 때 임시로 간사한 계책을 써서 성명을 장록(張祿)으로 바꾸었다. 이는 화를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농락하려는 수단에 불과하였지만 당시의 범수로서는 이 또한 임기응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내가 지금 성을 바꾸어 화를 모면한 것이 성을 바꾸지 않아서 부모에게 받은 혈육을 손상시키는 것보다 나았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용서하였다. 그렇지만 어찌 스스로 자신에게 부끄럽고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백방으로 애걸하여 결국 당오전 200냥, 마른신짚신 1켤레, 집의 아이가 혼인할 때 가져온 요강 1개를 빼앗기고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운산(雲山) 국빈(國彬)의 집에 도착하니 새벽닭이 이미 어지럽게 울고 있었다. 벼룩과 좀이 많아서 방구들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양간 옆에 멍석을 깔고 삐딱한 기둥과 깨진 초석에 기대어 잤다. 비단 옷과 버선이 모두 젖어 온몸이 파김치처럼 피곤하였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당한 수모에 분하기도 하고 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한 시각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해가 밝기도 전에 새벽밥을 재촉하였으나 입안이 성하지 않아 한 술도 뜰 수가 없었다. 또 즉시 출발하여 어렵게 당진읍(唐津邑) 앞들에 도착하여 뜻밖에 사종질 성우(聖佑)를 만났는데 그는 지금 그의 사위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때에는 친척이나 남을 막론하고 적당(賊黨)에 가담하지 않은 지인을 만나게 되면 그 기쁘고 위로가 되는 마음은 친부자형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처음 성우를 만나자 천상(天上)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그와 함께 정안의 친구 윤씨(尹氏) 집으로 갔다. 친척 안씨와 연심은 점심을 먹은 후에 먼저 한기로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집의 아이가 마중을 나오자 곧바로 한기의 이씨 사돈댁으로 함께 갔는데 그 창황하고 비통한 모습은 참으로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음날 아침에 친척 안씨와 연심이 돌아갔다. 며칠 동안 생사를 함께한 뒤라 이별의 슬픔이 없을 수 없었다. 날마다 여러 친구들과 온 가족이 화를 피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면천 이북(以北)은 이른바 이창구라는 놈이 목포(木包) 수접주(首接主)를 자칭하면서 월곡(月谷)에 적의 소굴을 만들어 놓고 있었으며, 이른바 강(姜)·편(片)·윤(尹) 세 놈도 적괴(賊魁)로 경내에서 못된 짓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이른바 양반가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은 자가 없고 한 동네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적당(賊黨)에 들어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예전처럼 집을 지키면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열에 하나도 없었으며 이른바 예의와 염치는 모두 쓸려나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적도(賊徒)들의 행색과 장기(長技)는 이 고을이나 저 고을이나 큰 차이가 없이 삼도三道가 한 판으로 찍고 한 줄로 꿴 것처럼 마찬가지였다.
양반가가 욕을 당한 것은 면천이 다른 서산(瑞山)이나 홍주(洪州)에 비하여 상당히 적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강(豪强)한 집안이 다른 고을보다 좀 적어서 모두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창택(滄澤) 이씨(李氏)도 명문거족으로 수백 년 동안 면천의 북부지역에서 두드러졌으며 본래 수졸(守拙)을 가훈으로 삼아왔다. 그래서 평소에 그를 흘겨보는 눈초리도 적었다. 이 때문에 다른 집안에 비하여 별달리 심한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다. 대개 그 사람이 평소에 선善한가를 알아보려면 지금 난세를 당하였을 때에 살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요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가만히 조상들과 가족의 일을 생각하니, 다만 깊이 한탄스럽고 가슴만 치게 되어 비록 오늘 당장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기가 어려웠다. 분묘를 버리고 친척을 떠나서 객지에 와 있는데 점차 명절이 다가왔다. 각처 선산의 풀을 누가 베었겠는가. 틀림없이 거친 쑥이 우거져서 쓸쓸하게 버려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묘와 제사를 지낼 자손도 없었다. 비록 난리 때문에 정처 없이 떠돌지만 동남쪽을 바라보면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미 중년(中年)에 가세가 기울어서 형제와 숙질들이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큰형님은 구가(九街)로 우거하시고, 갑질(甲姪), 장조카은 천안으로, 규질(珪姪)은 서울 혹은 시골로 우거하였다. 나만 홀로 고향을 지키면서 선령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버텨오고 있었으니 이것이 운이 좋아서인가, 아니면 시대를 잘 만나서인가? 이번의 난리를 당하여 나도 분묘를 버리고 사고무친의 땅에 내던져져서 같은 골육 간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어찌 꿈엔들 만난 적이 있으며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난 달 28일은 바로 선친의 제삿날인데 제사를 지냈는지 어떤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살아갈 방도를 찾아 동분서주하니 자식된 자가 과연 이렇게 하고서도 도리가 있다고 하겠는가.
이는 내가 평생토록 깊이 한탄하고 자책할 일이었다. 또 지금 큰형님께서는 육순(六旬)의 노경으로 홀로 재앙의 그물 속에 갇혀 난을 피할 방도가 없으며 또 땔나무와 곡식을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 피하기도 어렵고 그대로 있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갑질(甲姪)도 나이가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홀로 객지에 있으면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어찌 주선할 방도가 있었겠는가. 얼핏 들으니 규질은 먼저 극심한 곤욕을 치르고 도망하여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의 장인의 임소인 상원(祥原)으로 갔다고 한다. 이 또한 놀랍고 답답한 일이나, 집에 있는 가족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는 일이 바쁜 관계로 형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또, 두 조카의 거주지를 알선하지도 못하였다. 피차의 생사와 거취에 대하여 냉담하게 모르고 있었으니 골육의 정이 오히려 길에 다니는 사람만도 못하였다. 비록 난리 때문에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언짢은 마음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가락(佳樂)댁 종숙부는 적자(嫡子)가 없어서 금년 봄에 홍주 마수동(馬首洞)의 동족 오위장(五衛將) 상현(商鉉)씨의 둘째 아들인 재종동생 명제(明濟)를 양자로 정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일찍 철이 들고 준수하며 우리 증조부의 종손이어서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공림(公林)댁이 도피할 때 마수동에 가서 머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두 집안의 안부를 살펴보려고 한 차례 가서 방문하였더니 공림댁 식구들이 과연 와서 지내고 있었으나 숙부는 출타하여 뵙지 못하였다. 양가 모두 평안하였으니 또한 아주 다행이었다.
와서 보니 마수동은 동학에 들어간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며 마을의 상태도 편안하였으니 어찌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었겠는가. 또 주인집으로 말하자면 공림댁과는 같은 골육지친이 아니라 의리로 맺은 지친이었다. 이러한 비틀러진 난세를 만나 10명 가까운 식구가 한 집에 함께 거처면서 마치 자기집 골육처럼 편안히 지내고 있었으니, 비단 동족에게 베푸는 두터운 인정뿐만 아니라 평소 덕을 닦은 본뜻을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공림댁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으며 종제 집에는 축하할 일이었다. 내가 종제 삼부자(三父子)의 돈후함과 순숙(純淑)함을 보니 마치 전통 있는 집안의 유풍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나는 감격하고 기뻐서 앞으로 그를 지기(知己)의 친척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대체로 누구를 막론하고 그 사람의 선악은 이런 난세를 만나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이튿 날 개규리(開圭里) 감역(監役)댁에 가니 규질(珪姪)이 저간에 곤욕을 치르고 상경한 것이 과연 소문과 같았다. 감역 어른은 요지부동으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구가(九街)의 소식을 들으니 큰형님이 이달 초 여기에 들르셨다가 다시 좌협(左峽)으로 가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하니 이 또한 매우 답답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감역 어른이 극구 붙잡아서 하룻 밤을 같이 잤다. 이곳 역시 부리던 여종 양순(陽順) 부부가 나가버려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데 어려움이 생겼으니 세상의 난리 속에서 또 집안의 난리를 겪게 되었다. 창동(昌洞)의 족질인 진사(進士) 종형제도 와서 근처를 떠돌고 있으며, 세환(世煥)씨도 봉변을 겪었다고 하였다. 이른바 양반가가 적도(賊徒)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런 소리를 듣고 담이 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예사롭게 넘겼다.
이튿 날 한기로 돌아왔다. 도중에 많은 동적(東賊)들이 내왕하며 트집을 잡은 것은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행인들이 도인(道人)인지 속인(俗人)인지는 역시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나귀나 말을 타고 통영갓을 쓰고 화려한 의복을 입고 안경을 착용하고 말을 거침없이 하며 양 어깨를 우쭐대며 얼굴이 증오할만한 자는 반드시 적괴(賊魁)이며, 의관이 남루하고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우며 말을 더듬고 얼굴이 흙빛을 띤 자는 반드시 일반인이다.
동림(東林)의 친구 김여석(金汝錫)은 사돈 이씨의 매제로 그 역시 화를 피하여 와서 며칠 머물고 있었다. 밤에는 그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낮에는 같이 신을 삼으니 우습기도 하고 위로도 되었다. 옛날부터 난리에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도륙이 일어나지만, 군대가 지나가지 않은 곳은 안전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난리는 방방곡곡과 가가호호에서 모두 일어나서 재앙의 그물과 죽음의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니 그 속에서 피난하려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가?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만약 날개가 돋아나는 재주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우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루는 종씨인 춘일(春一)이 와서 보고 가니 더할 나위 없이 위안이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추석이 되었다. 제사를 모시지도 못하고 객지에서 홀로 명절을 지내는 것은 가장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종제의 집에 가서 여러 친척들과 함께 명절을 지내고 싶었다.
14일에 마수동으로 가니 술과 떡이 많이 준비되어 평소의 명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몇 달 동안 배를 주린 나머지 배불리 먹고 취하였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달빛은 예전과 같은데 인사(人事)는 바뀌었으니 온갖 감회가 가슴 속에 뒤섞여서 까닭 없이 한 줄기 눈물이 두 눈의 사이에서 저절로 흘러내렸다. 금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사람의 일상의 정서이다. 제사를 빠뜨린 선령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며 흩어진 골육들을 어떻게 다시 만나볼 수 있겠는가?
이튿 날 매천(梅泉)의 족형 원룡에게 가니 그도 문을 닫고 집안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원룡(元龍)은 큰집의 둘째아들로 용담공(龍潭公)의 신주를 이 집에 봉안하고 있었다. 아직 대(代)가 다하지 않았으나 시국이 급박하여 산소 아래에 신주를 묻으려고 윤서(允西) 숙질이 짊어지고 창동으로 갔다. 그래서 나도 첨배(忝拜)하였는데, 그 서글픈 마음과 가슴 아픈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서 선친의 묘소에 엎드려서 한바탕 통곡을 하여 답답한 회포를 모두 쓸어내리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다시 개규리로 가니 규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온 식구가 평안하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튿 날에 또 석교(石橋) 감역댁에 갔다. 감역도 여러 차례 비류들에게 트집을 잡혔으나 다행히 적괴 한명순(韓明順)이란 자에게 뇌물을 주고 그때 그때 모면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돈과 곡식은 평화로운 시기나 어지러운 시기를 막론하고 죽음의 도끼요 삶의 출구이다.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율리(栗里)의 친척 이경빈(李景彬)씨에게 들러 밤에 경빈씨의 숙질과 시국 상황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그 동네 이성안(李聖安)의 아들 형제는 본래 불량배였는데 시국을 틈타 적괴가 되어 동네에서 행패를 부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려워했다.
원평(院坪)은 유명한 적의 소굴인데 이곳과의 거리가 10리가 되지 않아서 매일 보고 듣는 해괴하고 참혹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친척 이씨 숙질은 본래 학문과 문장으로 호우(湖右)의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 무리들이 더욱 강제로 같은 무리로 끌어들이고자하여 늘 기회를 엿보아 회유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친척 이씨 숙질은 다른 사람들보다 피난가기가 더 어려웠다. 이튿 날 백치(柏峙)의 친척 형 만원(萬源)씨에게 들렀더니 친척 형의 형제들은 집에 있었다. 그 기쁘게 맞이하는 마음은 다른 때보다 더욱 절실하였다.
이른바 비류들은 또 늑도(勒道)의 풍습이 있었다. 소문을 들으니 방금 비류 500~600명이 늑도를 위해 아호(鵝湖)로부터 흑석(黑石) 근처에 와있다고 하였다. 친척 형님이 나를 이끌고 내당(內堂)으로 들어가서 떡과 고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뒤에 작은 계집종이 밖에서 울며 들어와서, “비류 수백 명이 흑석에서 고개를 넘어 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고하였다. 온 좌석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는 주인에게 고하지도 않고 문 밖으로 나와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비류 수백 명이 과연 산과 들을 가득 메웠으며 이미 동네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즉시 골짜기의 작은 길을 따라 급히 달아나니, 친척 형님이 어느 겨를에 두 손에 떡과 고기를 들고 따라와서 나를 부르면서 떡과 고기를 가져가서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뱃속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가 따라와서 떡과 고기를 주는 것에 감사하였으나 당장 재앙이 닥쳤으니 어느 겨를에 떡과 고기를 받겠는가. 돌아보지 않고 곧장 달아나서 동림의 친구 김군석(金君錫)의 집에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 삽시간에 또 동네 밖에서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서 급히 후원에 올라가서 바라 보았더니 수십 명이 또 이 동네를 침범하고 있었다. 즉시 주인과 함께 각자 흩어져서 도주하여 곧장 한기로 달아나서 앉으니 몹시 숨이 차고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으며, 무너지는 얼음에 맞은 물고기처럼 비실거리는 데다 화살에 맞은 적이 있는 새처럼 겁을 먹고 있었다. 앞길을 바라볼 때 마다 비류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렸으며 광분하는 모습들이 눈에 뚜렷이 보였다. 늑도한다는 소리를 들은 뒤로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겨나서 동네의 여러 친구들과 끝없이 근심하고 탄식하였으나 속만 썩일 뿐 별다른 좋은 계책이 없었다.
이튿 날에 또 들으니, 늑도하는 비류들이 부곡(芙谷) 아래위의 큰 산과 명성동(明星洞) 근처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으며 머지않아 또 한기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누군들 정신 차릴 수 있겠는가. 높이 날아 가버리고 멀리 달아나려고 해도 어찌 가능하겠는가.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앞산의 산꼭대기와 길가에 무수히 많은 비류들이 줄지어 앉거나 늘어서서 주문을 외는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들이 우선 촌가(村家)의 허실을 살피니 동네 사람들 가운데 누군들 솔개에 놀란 병아리처럼 달아나서 숨지 않겠는가. 성첨씨에게 집의 아이를 부탁하여 동네 양반집의 안방으로 피신시켰다. 나는 여러 번 생각해 보았으나 이렇게 모든 일이 어긋나는 곳에서 전후좌우가 모두 재앙의 그물로 가득 차서 도무지 피난할 곳이 없으니 진퇴유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득이하여 친구 이경조(李景祚)씨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경조씨와 두어 명의 친구들은 지내기가 더욱 어려웠다. 좋은 말로 간청하여 점심을 먹여서 무사히 보내주었으니 매우 다행이었다.
오늘의 난리는 비록 무사히 넘겼지만 내일도 틀림없이 난리가 있을 것이니 참으로 갈수록 산이요 고개 넘어 또 고개였다. 이 세상에서 이 몸을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예로부터 난리 중에 목숨을 보전한 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그것은 더러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 이 동비(東匪)의 난리에는 비록 석인(碩人)과 군자가 있더라도 탁월한 재간이 없다면 반드시 무사히 지나가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임기응변할 방책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류들의 겉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도인(道人)이라고 하지만, 도인이란 도덕과 바른 품행을 갖춘 자의 호칭이므로, 의관이 정결하고 걸음걸이가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일을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당당하며 화평한 기운이 얼굴과 등에 드러나야 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저들 무리들 중에서 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의관이 남루하고 걸음걸이가 경망스럽고 말투가 사납고 모습이 용렬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며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니 이를 어떻게 도인이라고 하겠는가. 이들은 비단 패류(悖類)라고 지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화적(禍賊)이고 나라의 역적이다.
대개 동학이라고 자칭하는데 그 학(學)이 무슨 학이며, 또 동도(東道)라고 칭하는데 그 도(道)가 무슨 도인가. 학이란 연원을 강구하고 극기공부를 하여 조리가 분명하고 세상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학이라고 할 수 있다. 도(道)란 심성을 함양하고 자연의 이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심을 억제하며 사악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지켜야만 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비류들의 학과 도는 분수를 넘은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학(學)은 사학(邪學)의 학(學) 자이며 도는 도적(盜賊)의 도(盜) 자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고 적절한 비유이다.
또한, 저들이 꺼려서 먹지 않는 것들이 개와 닭이다. 만약 개와 닭을 기르는 집이 있으면 이것으로 트집을 잡아 공연히 시비를 건다. 그리고 동학을 믿지 않는 집과 이웃하고 있으면 도리어 부정(不精)한 무리로 몰아서 그들에게 근심이나 부족한 것이 있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금줄을 쳐놓고 샘물도 서로 길어주지 않으니 이는 너무 심하게 미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해와 달처럼 밝고 서리와 눈처럼 엄격하게 왜와 양을 배척하여 국가의 대의를 위한다고 빙자하였으니 누가 그들을 따르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왜와 양을 배척하는 것은 고사하고 여리(閭里)를 두루 돌아다니며 남의 재물을 빼앗기를 마치 자기 주머니 속의 물건을 뒤지듯 하여 그 폐단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처음에 왜와 양을 배척하여 국가를 위한다고 빙자한 뜻은 지금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들은 왜와 양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왜와 양을 불러들였으며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반역의 싹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육조(六曹)의 장관과 수령 방백들은 그들 무리 가운데서 모 대장 혹은 모 판서라고 자칭하며 미리 정해놓았으니 이것이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저들이 행하는 일들이 훌륭한지 아닌지를 비록 분명하게 가릴 수는 없지만, 만약 눈으로는 어(魚) 자와 노(魯) 자도 구분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는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혹 삼공(三公)과 육경(六卿) 및 방백과 수령을 맡긴다면 어떻게 그들이 국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살필 수 있겠는가. 이는 세살 먹은 아이도 웃지못할 일이다.
또한, 도라는 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어려운 것인가. 노둔한 자질로는 비록 종신토록 연마하더라도 반드시 그 도를 이룰 수가 없는 자가 열에 아홉은 된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도는 눈 깜빡할 사이에 입도(入道)하였다고 하니 그 도가 오래갈 수 있겠는가. 평범한 일이라도 마음에 있으면 기꺼이 따라서 행하지만, 만약 마음에 없으면 비록 엄한 스승과 현명한 친구가 곁에서 권면하여 성취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마음에 내키지는 않으며 결국 기뻐서 자발적으로 하는 일만 못하다. 더구나 지금 저들의 도는 분명히 반역이며 죽음에 이르는 악습과 패행(悖行)인데 누가 기꺼이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처음에는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위협하며, 만약 끝내 듣지 않으면 주리 등의 악형을 가하여 강제로 가입시킨 뒤에야 그만둔다. 그래서 생산에 종사하는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죄를 지어 목숨을 버려야 할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아! 저 비류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필경 동쪽에서 이가(李哥)의 머슴을 얻고 서쪽에서 조씨(趙氏)의 심부름꾼을 취하였다. 위로는 양반가의 자제에서 아래로는 백정과 광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섞어 놓았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면 서쪽에서 응하고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는 것이 마치 참새의 무리와 같았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또 양반가의 자제들로 말하자면 혹은 이번 일을 당하여 화를 모면하려고 스스로 가입한 자도 있으며, 모진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강제로 가입한 자도 있으니 이는 울면서 쓴 나물을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비록 거기에 이름을 올렸지만 본심을 굳게 지키면서 적도(賊盜)의 악행에 참여하지 않고 결국 도(道)를 등지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이들은 선비의 대의를 잃지 않았으니 그 뜻은 높이 살 만하나 그 사정은 도리어 애처롭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지 않고 어제 저들 무리에 가입하여 오늘 악행을 저지르며 폐단을 만들고 못된 짓을 하여 어리석은 천한 것들과 별다른 우열이 없다면 이는 비단 평소 마음이 불량할 뿐만 아니라 재주까지 부리므로 그 죄는 어리석은 시골의 백성들보다 더욱 무겁다. 그러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나는 누구누구 집안의 자제들이 저들 무리에 기꺼이 들어가서 그것을 잘한 일로 생각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누구라고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같은 반열에 있으면서 어찌 개탄하고 애통해하지 않겠는가.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저들이 비록 어리석은 소치로 이와 같이 행동하였으나 어찌 오랜 친구 사이에 잘못을 따져 꾸짖지 않겠는가.
면천 이북이 비록 호우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금은 거괴(巨魁)의 소굴이 되었으므로 몇 달을 버티기가 어려울 듯하였다. 나는 전에 신평(新平)이 다른 곳보다 조금 낫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 홀로 가서 육안으로 본다면 그 길흉과 이해를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성첨씨와 함께 율리(栗里)로 가서 친척 이씨의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예경(禮卿) 노형과 함께 신평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농사는 비록 풍년이 들었으나 난리 때문에 주막이 드물어서 요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렵게 망각산(望角山)에 도착하자 기력이 탈진하여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었다. 산 아래의 이름을 모르는 최씨 집에 들어가서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탈진하였던 기력이 다시 솟아나며 어두워졌던 눈이 다시 밝아졌다. 이런 난세에 해구(海口)의 쇠잔한 마을에 이처럼 착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에 주인옹에게 술과 밥을 먹여준 은혜에 무한히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바로 작별하고 신평의 모든 산천을 둘러보니 번화한 지역보다는 나을듯하였으나 지역이 바닷가에 닿아 있는 점이 약간 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팔려는 집터도 없고 비록 집터가 있더라도 돈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 지역은 옛날 임진왜란[壬辰亂] 때 김복손(金福孫)의 술수(術數)로써 한 방면의 인민들이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하였던 곳이다. 당시 김복손의 탁월한 재주와 호매한 기상에 견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벽지에 살면서 자질이 천박하여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으며, 난리를 만나서 망각산 아래에 숨어들어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산 아래에 작은 못이 있었는데 임진년 이전에 못 가운데서 순채가 자라나자 김복손과 같은 이인(異人)이 그 땅에서 탄생하였다고 하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수년 전부터 또 그 못에서 순채가 자라자 오늘날의 사람들은 또 그 땅에서 반드시 이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놀랍고 기이하였다.
밤을 틈타 구창(舊倉) 가평(加平)댁을 방문하였다. 족숙 윤구(允九)씨는 봄에 상경하였다가 동요(東擾) 때문에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다만 그 윤구씨의 둘째아들이 집에 있었다. 그가 사람을 응대하는 것을 보니 모든 성숙한 행동들이 전통 있는 가문의 자제라고 일컫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보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족질인 진사 주일(周一), 친구 이주백(李周伯), 족형 응열(應說)씨, 친구 임계현(任季賢), 아호(鵝湖) 민도사(閔都事)도 피난차 다녀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 날에 또 예경 노형과 곧장 한기로 돌아갔다. 연도의 비류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소문을 파다하게 들었는데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니 슬프고 애처로워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밤에 예경 노형 및 주인 사돈의 여러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 잠이 들었다.
이튿 날에 예경 노형과 도사 이계문(李季文)에게 들렀다가 발길을 부곡으로 돌려 집의(執義) 김병창(金炳昌)씨를 방문하였다. 오늘이 마침 중양일(重陽日)이어서 잡과(雜果)와 떡을 싸주었다. 또 홍산(鴻山)의 김진사(金進士)를 만났는데 그는 바로 집안 어른의 둘째아들이다. 집안 어른은 고명한 학식을 지닌 분인데도 지금은 몸을 보전할 방책이 없다고 하였으니 나같이 학식이 얕고 어리석은 자가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방략이 있겠는가. 또 예경과 함께 동림의 친구 김군석의 집으로 가서 잠시 쉬면서 밤을 먹었다. 다시 백치로 가서 친척 동생 이초계(李草溪)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예경과 헤어져서 나는 한호(閒湖)로 돌아왔다. 지나면서 기지(機池)의 사예(司藝) 이헌영(李憲永)씨를 방문하였다. 이씨 어른도 가정에서 사숙한 학문으로 경향(京鄕)의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난세를 만나서도 평소의 의대(衣帶)를 바꾸지 않고 차분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니 그가 수행한 공부를 알만하다. 임경원(任慶源)씨가 지나가다 들러보고 갔다. 조금 뒤에 한 헌걸찬 장자(長者)가 행의(行衣)에 대갓 끈을 착용하고 은연하게 소나무 숲의 작은 길로 걸어들어 와서 대청에 올라 이씨 어른에게 절을 하였다. 이러한 난세에 도복을 착용하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거리를 다닐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그 얼굴을 자세하게 보니 추곡(秋谷) 김숙진(金叔眞)이었다.
이 사람은 본래 나와 이웃 동네에 거주하며 평소에 친밀하게 지냈었다. 어릴 때부터 성장해서까지 포목상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집안의 재력이 조금 넉넉해지자 그의 부친을 감역으로 입사(入仕)시켰으며, 자신은 상업을 버리고 학업을 닦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침잠과 순수한 열정은 선유(先儒)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연전에 전장석(田丈席)에게 수학하였으며, 지금은 그의 언어와 동작이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지금 김집의(金執義)의 집에서 왔으며 바로 율리 이사문(李斯文)의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는 비록 난세에 처하더라도 같은 소리가 서로 화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믿는 이치이다. 나를 만나 기쁘게 맞이하는 감정은 다른 사람보다 더욱 절실하였으나 바로 이별하고 한호로 갔다.
식구들이 많이 불편하다고 하여 집을 사서 살림을 차리고 싶었으나 난세일 뿐만 아니라 빈손이니 어떻게 일을 진행하겠는가. 혼자 답답해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집의 아이가 혼례 때의 망건을 여름에 잃어버려 7월부터 지금까지 경목(景睦)의 망건을 빌려서 쓰고 있으면서 난리 때문에 아직 돌려주지 못하였다. 오늘 친구 박경조(朴景祚)가 찾아 왔다가 갔다. 집의 아이는 갓과 망건이 모두 없지만 지금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새로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태평하여 특별히 출입할 일이 없을 때에도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하물며 낮에는 갓과 망건을 벗을 여가가 없고 밤에는 의복을 벗을 겨를이 없는 이러한 때에 아무 것도 없으니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경조 편에 자세하게 들으니 서산의 비류들이 난리를 부리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적괴 김감찰이란 놈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서 전답의 농작물을 마치 주인이 없는 물건처럼 전부 차지하였으며 약간의 집기들도 모두 차지했다고 하였다. 어찌 이러한 백주의 도적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놈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은 그놈의 자발적인 생각이 아니라 옆에서 도와주고 사주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누구라고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이처럼 변심하기로 환장한 자가 있단 말인가. 지금 이 동학의 소요 때문에 영원히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면 반드시 물아(物我)의 구별이 사라질 것이다.
이른바 가옥과 농작물은 잠시 버려두고 언급하지 않더라도, 비록 금은과 옥백을 산처럼 쌓아 놓아도 나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수개월 뒤에 만약 도리어 바람이 멎고 풍랑이 가라앉아 평상시처럼 태평하게 된다면 비록 10명의 감찰이 우리집에서 살더라도 그들이 편안히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연히 바른 길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비록 매우 놀랍고 분하지만 마음에 개연히 여길 것까지는 없었다.
듣건대, 판서(判書) 박제관(朴齊寬)씨와 도사 서병학이 모두 선유사가 되어 임금의 윤음(綸音)과 흥선대원위(興宣大院位)의 관문(關文)을 받들고 주군(州郡)과 여리(閭里)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비류들에게 칙령(勅令)의 유시(諭示)를 게시하자 부득이하여 입도한 자들이 모두 관청에 하소연하며 배도(背道)하였다고 하였다.
그 윤음과 관문의 신칙을 보니 구구절절이 간절하고 적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비류들은 지금 효유하는 이 시기에 동학에 남아있던가 아니면 그것을 등지는가에 따라 화복(禍福)이 나누어지고 생사가 갈라진다. 그러나 지난 날 못된 짓을 하던 어리석은 무리들이 줄곧 제멋대로 행동하며 이를 절대로 바꾸지 않으려는 마음만을 품고 있으니 정말로 이처럼 심하게 미혹될 수 있단 말인가.
또 저들 무리들이 경통(敬通)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괴수의 문적(文績)이었다. 사람들이 혹 졸개들에게 곤욕을 당하는 일이 있으면 괴수에게 가서 하소연을 하여 경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일에 이해관계가 없다면 졸개들은 그 경통을 힘써 따랐지만 만약 일이 큰 이익이나 혐의에 관련되었다면 이른바 경통이라는 것은 무시하고 무한한 욕을 가한 뒤에 그만두었다. 이것을 헤아려본다면 저들이 말하는 선생의 경통이라는 것은 도리어 노예의 고목(告目)보다 못하였으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족형 경국(景國)씨 형제도 도피하여 도처를 돌아다니다가 찾아와서 정담을 나누고는 다시 정안으로 돌아갔다. 근일에 기미를 살피니, 가을걷이가 한창인 데다 윤음과 관칙을 통하여 효유하였기 때문에 동비들의 소요가 조금 잠잠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문에 이르러 맑은 바람을 쐬는 것처럼 상쾌해 하였으나 어떻게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러 달 동안 홀로 객지에서 지내면서 고생을 하였으니 형제와 친척에 대한 그리움이 갈수록 더 하였다. 그런데 막 좌협으로 가는 길에 마수동에 도착하니 여러 식구들은 안녕하였으며, 공림댁은 얼마 전에 집터를 팔고 중촌(中村)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니 또한 다행이다. 그리고 정씨(鄭氏) 매제는 여전히 종제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튿 날에 기곡(基谷)으로 가는 길에 옹포진(甕浦津)에 도착하여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20~30명의 비류가 마을 뒤의 작은 길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일제히 나타났다. 나는 비록 그 무리들에게 아무런 혐의도 없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평소 심장이 약한 데다 한 차례 곤욕을 치른 뒤라 겁이 나서 나루를 건너지 못하였다. 몸을 낮게 엎드리고 기어서 무너진 제방 아래로 가서 갈대 속에 몸을 숨기고 저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적도들은 바로 떠나지 않고 주막에서 질탕하게 술을 마시고 장 옆에서 앉거나 누워서 주문을 외는데 그 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졌다. 그 하나하나의 소리가 오장을 찢고 구절구절이 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종일토록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약골 인데다 옷을 얇게 입고 오래도록 으스스한 갈대바람 속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팠을 뿐만 아니라 뼈 속을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옛날 오자서(伍子胥)가 초강(楚江)을 건넜을 때 그 추위와 배고픔의 고초가 이와 같았을까? 적도들이 등 뒤에 있는데 큰 강이 앞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해야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큰 길을 버려두고 갈대밭 사이로 희미하게 난 작은 길을 따라 둔관포(屯串浦)로 숨어서 달아났다. 그리하여 간신히 나루를 건너서 어둠을 틈 타 기곡에 도착하였다.
기곡의 여러 댁들은 그런대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이러한 난세에 천만다행이었다. 은필(殷弼) 동생은 그들의 생가에 갔기 때문에 공교롭게 어긋나서 만나지 못하여 매우 섭섭하였다. 그러나 수촌(藪村) 형님과 우옥(禹玉) 조카와 함께 그간 지내온 상황들을 서로 죄다 이야기하였다.
박도일이란 자는 덕포의 거괴로서 이곳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적의 소굴을 차려놓았는데 그 폐단이 다른 지역보다 더욱 심하였다. 그런데다 이 집은 또 대로변의 거처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홍산댁에서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둘째형님의 산소를 참배하고 길을 떠났다. 신창읍(新昌邑)에 도착하여 잠시 쉬며 요기를 한 뒤에 형제점(兄弟店)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농기구와 무기를 짊어지거나 소에 싣고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온양(溫陽) 금곡(金谷)으로 실어간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거괴 중의 한 놈인 이른바 안교선이란 자가 아산(牙山)에서 무기를 빼앗아 오고, 새로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촌가에서 농기구를 두루 거두었다고 하였다. 대개 저들 무리들의 갈 때까지 간 행동들이 모두 역적질이라는 것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는 한 때의 변고일 뿐만 아니라 만고에 없을 큰 변란이며 왕의 군대가 토벌할 뿐만 아니라 하늘이 그것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쓸어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호(畿湖)는 사대부가 많은 고장이어서 산림(山林)의 암혈 속에 반드시 경세제민(經世濟民)할 의리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았으니 혹시 뜻있는 선비가 본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비록 도덕과 재주를 겸비한 인물이 있었지만 때를 기다리면서 나오지 않고 자기 한 몸의 처신만 올바르게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오후에 죽곡(竹谷)의 임참봉(林參奉)댁에 갔다.
고모님의 근력이 무탈하시니 매우 다행이었다. 큰형님은 지난달 초에 야동(冶洞)과 이곳에 오셔서 머무시다가 며칠 전에 다시 덕산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만약 며칠 전에 왔다면 뵐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늦게 온 것이 후회될 따름이었다. 이곳에서 형님의 안부를 들으니 가슴이 갑절이나 더 답답하였다. 이 고장에 와서 보니 동적(東賊)의 난리는 내포(內浦)와 비교하면 마을마다 편안하고 집집마다 평화로웠다. 태평세계를 여기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이튿 날에 임평산(任平山) 어른에게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여화(汝化)씨와 함께 독정(獨亭)으로 가서 임백용(任伯用) 어른을 뵙고 잠시 쉬면서 대추를 먹었다. 또 친구 임성윤(任聖允)을 방문하고 역시 대추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길을 떠나 새 주막에 도착하니 무뢰배들이 10여 명 혹은 수십 명씩 주막의 헛간과 토루(土塿) 위에 군데군데 모여앉아 있었는데 이들도 분명히 적당(賊黨)이었다. 대개 혐의가 있고 없고는 잠시 제쳐두고라도 애당초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우회하여 작은 길을 택하여 가서 날이 저물기 전에 야동에 도착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평안하였으니 비할 바 없이 다행스러웠다.
비록 보통 때라도 오래도록 보지 못하였던 터라 한없이 위로가 되었을 것인데 하물며 난세를 당하여 골육 간에 서로 만났으니 그 감회가 또 어떠하였겠는가. 큰형수님과 어린 조카 남매가 와서 눈앞에서 이야기를 하니 회고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동네에 사는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홍가(洪哥) 한 명이 강제로 동학에 가입시키려고 아침저녁으로 조카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조카들이 지금 곤경에 처해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듣고 몹시 놀라고 화가 났으나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튿 날은 야동에 머물면서 떡을 먹었다. 오후에 유중광(兪仲光) 어른이 다녀가셨다.
이튿날에 두천(斗川)으로 가는 길에 중광씨를 방문하여 잠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두천으로 갔다. 그곳의 여러 식구들도 평안하였다. 생질은 올봄에 정씨(鄭氏) 집안으로 장가를 갔는데 그 집안은 바로 송강(松江), 정철의 후손이다. 창질(昌姪)도 글을 열심히 읽고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있었으니 또한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이날 저녁은 창질의 집에서 닭을 잡고 기장밥을 해서 먹었다.
이튿 날에 친척 유문여(兪文汝)의 집에서 나를 초청하여 아침 밥을 지어 주었다. 나는 문여의 모친과 사종 남매가 되니 이는 인정으로 지어 주는 밥이었다. 오후에 두 조카를 데리고 누님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두천(斗泉)에서 머물렀다.
이튿 날 길을 떠나 야동으로 돌아왔다.
이튿 날에 식구들이 있는 한기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길에서 비류들을 만날 우려가 없지 않았으므로 큰길을 버리고 샛길을 따라 매곡(梅谷)을 거쳐 이암(而巖)에 도착하였다. 커다란 집들이 즐비하였으나 모두 동요(東擾)로 인하여 망가졌으며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어 매우 처량하게 느껴졌다. 곡교(曲橋)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곧장 기곡에 도착하니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은필 동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우옥의 처소에서 유숙하였다. 그 사이에 원집(元集)이 볼일을 보러 유동(柳洞)에 갔다가 왔다고 하였다. 유동은 박괴(朴魁)의 소굴이었다. 그의 처소에는 적도와 속인(俗人)의 것을 막론하고 뇌물이 폭주하여 그 양이 권세가의 집보다도 많다고 하였다. 어찌 도에 지나치지 않으며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이튿 날 길을 떠나 죽동(竹洞)에 이르러 할아버지의 산소를 참배하고 월궁(月宮)으로 가서 승지(承旨)의 선비(先妣)의 영정에 곡하고 온양 누님을 배알하였다. 승지의 여러 형제들은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의 간절히 그리워하는 정을 단지 지친(至親)으로써만 논할 수는 없었으니 전통 있는 집안의 유풍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지나는 길에 양양(襄陽)댁과 오위장을 방문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가규리(加圭里)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곧장 한기로 돌아오니 주인집과 우리집 식구들이 모두 평안하여 매우 다행이었다. 그런데 처자의 안색을 보니 편치 못한 기색이 많이 있었다.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난리중이라고는 하지만 두 집안의 많은 식솔들이 한 집에서 사는 데다 또 집도 협소하였으니 과연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달리 의탁할 곳도 없는 데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도 아니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모르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궁리를 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유동의 화산(花山)댁으로 가서 좁은 집을 잠시 빌려서 살자고 간청하니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옮기기로 작정하였다. 형님께서 한호에 왕림하셨다.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슬픈 감회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형님은 그 사이에 좌협에서 석교(石橋) 이단하(李丹霞0의 집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그 집은 일전에 다녀간 그 본댁이라고 하였다. 형님과 함께 하룻 밤을 지냈다.
이튿 날에 백치로 돌아왔다. 형제와 숙질들이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거리를 떠돌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일시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이날 새벽에 사종질 성우와 집의 아이에게 식구들을 데리고 유동 홍산댁으로 가도록 하고 나도 그 뒤를 따라 곧장 큰길로 갔다. 지금 동학의 소요가 조금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홍주의 병정과 포졸들이 사방에 나열하여 이른바 적괴를 나타나는 대로 잡아간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더욱 나다니기가 어려웠다. 길을 갈 때에 적도(賊徒)와 일반인들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도 걱정이고 뒤로 물러나도 걱정이었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성우는 한호로 되돌아갔다. 곁방에 들어가서 거처하였는데, 앞뒤의 창문이 모두 부서지고 서까래 몇 개도 무너져서 누우면 별이 보였으며 자리 하나 깔 정도에 불과한 온돌이 차갑기가 얼음장 같아 잠시도 용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좋고 나쁨을 가릴 겨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당장 살아갈 방법이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말을 하기가 싫었다. 이른바 이부자리와 옷 보따리는 집의 아이에게 천천히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비록 난리 중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힘들고 고생스러워서야 앞날을 영위해갈 수 있겠는가? 거접할 곳이 없어서 나는 백치의 여러 댁에 가서 숙박을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동쪽 집에서 밥을 먹고 서쪽 집에서 잠을 자는 떠돌이 생활이었다. 나중에는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기가 힘들어서 백치의 여러 댁에서 숙식을 하고 매일 한 차례씩 집에 와보았으니 손님이 드나드는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초계(草溪)댁에서 벼 5말을 보내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나 이는 수레바퀴에 패인 물웅덩이에 1말의 물을 붓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면천 이북에 숭악산(崇嶽山)이 있는데 곧 월곡의 후장(後嶂)이다. 근처의 동학에 가입하지 않은 여러 사람들이 유회(儒會)를 열어서 산 위에 성을 축조하여 농보(農堡)로 삼자고 함께 모의하였다. 그 지역 내의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구름처럼 다투어 몰려 들었으니 이 또한 한 군데 의지할 곳이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은 사리에 밝고 지략이 있는 우두머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여든 사람들은 장수가 없는 병졸이 아닌 자가 없었으니 어떻게 꾀를 내고 계책을 세워 한 지역의 근심을 막겠는가. 더욱 부족한 점은 거괴의 소굴이 바로 그 아래 월곡에 있다는 것이었다. 적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 반드시 방휼지세(蚌鷸之勢)를 형성할 것이다. 만약 곡식을 저장하는데 성공한 뒤에 혹 적당(賊黨)에게 빼앗긴다면, 이는 바로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양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또 저들로 하여금 앉아서 남의 공을 가로채도록 하는 것이어서 그 이해득실을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한호로 간 뒤에 귀서(龜瑞) 형과 함께 담원(澹園)으로 가서 한도정(韓都正) 어른을 뵈었으며 또 교리(校理) 한흥교(韓興敎)와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집은 규질이 양자로 들어간 집의 진외가이자 친척 동생 응구(應九)의 친사돈댁이었다. 이어 농보성(農堡城)으로 가서 그 지세의 높낮이와 넓이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더니, 적의 소굴과 매우 가까운 것이 첫 번째 결점이었다. 성내에 물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결점이었다. 지세가 협소한 것이 세 번째 결점이었다. 해문(海門)과 붙어있어서 독장(毒瘴)과 나쁜 안개가 북쪽으로 향해 있는 후장(後嶂)으로 밀려들어 사람들이 병에 많이 걸리는 것이 네 번째 결점이었다. 또, 성을 쌓을 돌은 큰 것이 거의 드물며, 주먹크기의 돌로 성을 쌓을 경우 그 높이가 1장에 불과하게 된다. 만약 대포를 쏜다면 반드시 우박처럼 흩어질 것이므로 도리어 토성을 단단하게 쌓는 것보다 견고하지 못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결점이었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비록 이렇게 판단하였으나 만약 사리에 밝고 안목을 가진 자가 있다면 어떤 훌륭한 의견이 나올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둠을 틈타 한호로 돌아와서 잤다.
이튿 날에 유동으로 돌아갔다. 집의 식구들은 별탈이 없었으나 땔감과 양식 및 반찬거리가 모두 떨어져서 누렇게 뜬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궁리하였으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난리 중에 화를 피하는 것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우선 배를 채우고 몸을 가릴 대책이 전혀 없었다. 차츰 추운 계절이 다가오는데 차가운 구들에 거처하니 추위에 떠는 병든 아내에게 무엇을 입히며 밥을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 무엇을 먹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곧 자나 깨나 밥 먹을 때나 쉬고 있을 때나 눈썹을 찌푸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비록 또 한호에서 벼 1포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지금과 같이 왕래하는 사람이 단절된 때에 수하에 심부름 시킬 아이도 없으니 이 낯선 객지에서 어떻게 그것을 가져오기가 쉽겠는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보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그림의 떡이 이것이었다. 장작은 더러 사서 때기도 하고, 집의 아이에게 아껴서 쓰도록 하기도 했으며, 부자가 함께 베어서 때기도 하였다. 장작을 베는 일은 초보자가 나무꾼에게 미치기는 어렵겠지만 억지로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짊어지고 오는 일은 장작이 등에 달라붙지 않아서 일어났다가 다시 넘어지고 발걸음을 떼었다가 다시 자빠졌다. 숙련된 기술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애당초 농업에 종사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매번 백치로 가서 여러 댁에서 숙식을 하였으니 이러한 어려운 때에 단지 가까운 친척의 정으로만 논할 수는 없었다. 유동에 와서 우거한 이후로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며 의지할 곳이 달리 없었으며 오직 백치의 여러 친척들뿐이었다. 서로 오가면서 밤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을 함께하고 낮에는 배고픔과 배부름을 함께하면서 시일을 보내고 함께 화란을 겪으며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정의(情誼)가 골육이나 지친과 같았다. 비록 평소 평범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면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난리 속에서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겪은 절친한 친척들의 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의 홍주목사(洪州牧使)는 왕실의 종친으로 북인(北人)인 이승우(李勝宇)였다. 부임한 이래로 동비(東匪)의 세력이 점차 번지는 것을 보고는 날마다 근심하고 노력하였다. 먼저 삼반(三班)의 서리(胥吏)들에게 개를 삶아 먹이면서 배도(背道)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또 뜻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성채를 높이 쌓고 무기를 정비하여 동학의 소요를 방어하여 호우(湖右)의 맹주가 되고자 하였다. 비록 재앙의 그물 속에 있으면서도 종종 포교를 내보내어 동비들을 잡아와서 법에 따라 다스렸다. 이 당시 위축되어 있던 사람들이 누군들 홍주를 주목하여 돌아보며 조만간에 큰 변통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았겠는가.
하루는 이성첨씨가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북촌(北村)의 강(姜)·편(片) 두 놈이 근처에서 기포(起包)하였는데, 만약 그들을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창칼로 도륙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지난 날에 동학을 등졌던 무리들이 다시 적당(賊黨)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 형세는 바람과 우뢰처럼 신속하고 병의 물을 거꾸로 쏟아 붓듯이 순조로워 순식간에 수삼천 명이 모였습니다.
현재 월곡의 본 소굴에서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가 목전에 박두한 것이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집안의 세 숙질이 현재 화를 피할 계획으로 동림의 친구 김씨(金氏)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또 당신에게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뒤로 겨우 깨어났던 정신이 다시 혼미해지고 힘이 솟았던 팔다리의 힘이 다시 빠지며 이 몸을 또다시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성첨씨와 함께 동림으로 가서 귀서 형제를 만나보았다. 저녁에는 집의 아이도 와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유동은 사나운 적의 소굴이고, 갈산(葛山)은 편가와 강가의 졸도들이 거처하는 마을이었다. 갈산에 거주하는 박송도(朴松都)라는 자는 전에 편가와 강가의 종용으로 잘못 동학에 들어가서 접주가 되었다. 그런데 차츰 편가와 강가의 행실이 패역함을 보게 되고 또 지금 기포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들이 역도(逆徒0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쳐서 친구 김씨 집에 숨었다. 그의 겉모습을 보니 또한 그렇게 초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비록 속아서 잘못 동학에 들어가 이름을 의탁하였으나 지금은 이와 같이 주의하고 있으니 그의 뜻을 높이 살만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유동과 갈산으로부터 금속이 부딪히고 총을 쏘는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며, 기포하는 비류들이 좌우의 길에 죽 이어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좌우의 요해처에 모여 앉아 있었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모습이 마치 그물에 걸린 고기나 함정에 빠진 호랑이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았겠는가. 부득이하여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후원에 올라가서 소나무 숲 속의 흙구덩이 속에 숨었다.
삼경(三更)이 지난 뒤에 귀서 세 숙질과 함께 친구 김명석(金命錫)의 집으로 들어갔다. 혹 번갈아가며 망을 보다가 만약 심신이 피로해지면 벽에 기대어 잠을 자거나 서로 무릎을 베고 눕거나 혹은 팔을 베고 잤다. 그런데 동네 가운데서 불빛이 비치더니 원근의 마을을 막론하고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는 바로 비류들이 사람들의 왕래하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겁을 먹고 의심을 하면서 달게 잠을 자지 못하고 선잠을 잤다. 첫닭이 울자 김생원(金生員) 어른이 와서 식사를 하라고 재촉하여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후원의 소나무숲 속에 숨어서 서로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고 길가는 사람들이 엿들을까 걱정이 되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으니 마치 서로 싸우고 난 뒤에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이렇게 간신히 그날을 넘기고 나니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서 안색이 초췌하였다.
초경(初更)이 지난 뒤에 간신히 틈을 타서 다시 친구 김씨의 집으로 들어갔다. 막 저녁을 먹고 있으려니 갈산에서 박송도를 수색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명령조로 주인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이 집에 숨어있다는 낌새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던 것이다. 여러 놈들이 문밖에서 끊임없이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다시 후원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서 각자 안뜰의 울타리 사이에 숨어서 비류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니 이미 한밤중이 지났다. 귀서 세 숙질도 집으로 돌아갔으나 몹시 걱정이 되었다. 닭이 겨우 세 번 울자 국과 밥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친구 김여석과 집의 아이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서 원근의 마을을 살펴보았다.
휘황한 불빛, 개 짖는 소리, 사람 떠드는 소리, 쇳소리와 총소리가 도처에서 낭자하였고, 갈산으로부터 고함소리와 우는소리가 뒤섞여서 요란하게 들려왔으며, 불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는 강(姜)·편(片)이 무리들을 이끌고 그 동네에 들어앉아서 박송도를 찾으려고 송도의 처자를 묶어서 형을 가하고 또 그 집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도는 부득이하여 스스로 적당에게 나아갔으니 그 사정이 또한 딱하였다. 어제 저녁에 송도가 우리들을 보고 순순히 진실을 토로하고는 충고하여 말하기를, “죽기로 도망치시오. 절대로 비류들의 무리에 참여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록 천근하지만 사람을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는 자신의 병은 치료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약을 먹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식경 동안 불구경을 한 뒤에 은현(銀峴) 뒷산의 소나무 숲으로 갔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의관은 밤기운에 모두 젖었고 서리 밟는 소리가 사각사각 났으며 한기가 피부를 찔렀다. 마을을 내려다보니 역시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집집마다 등불 그림자가 무성한 나무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으며 사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마을의 모습을 살펴보니 그윽하면서도 험난하지 않고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궁벽지지 않아서 군자가 살 만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동비들이 사는 곳이 되었으니 매우 안타까웠다.
집의 아이와 여석과 함께 셋이 둘러 앉아 신을 삼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무숲 속에서 여자의 곡소리가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은은히 들려왔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잠시 후에 한 촌민이 얼굴에 병색을 띠고 지팡이를 짚고 신을 삼는 자리 옆에 와서 앉았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자가 대답하기를, “아랫마을에 한 노파가 있는데 식구는 유복자 한 명만 있었으며 나이는 올해 16세입니다. 작년 봄에 장가를 들었으나 가을에 부인이 죽어 모자만이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전에 그 아들을 강제로 동학에 가입시키려고 하였으나 만단으로 애걸하여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어떤 비류 5~6명이 트집을 잡아 일반인들을 묶어서 때리고 붙잡아 갔으며 게다가 소도 빼앗아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슬프게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매우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비록 적도라고 하지만 역시 사람인데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얼마 되지 않아 아랫마을에서 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나무 숲 속에서 몰래 살펴보니 또 어떤 비류 수십 명이 마을에 들어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며 남자·여자·아이를 막론하고 앞산과 뒷산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저들 무리들은 또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을 쳐다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소리를 지르며 장차 달려올 듯하였다. 그래서 혼비백산하여 집의 아이 및 친구 김씨와 함께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급히 몇 걸음을 달아나서 다락산(多樂山)에 올라앉아 바라보았더니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또한 다행이었다.
이 산은 소나무 숲이나 동굴과 같이 특별히 몸을 숨길 장소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그런데 다시 북쪽에서 쇳소리와 총소리가 진동하였다. 놀라서 건너편을 바라 보았더니 당진읍으로부터 수백 명의 비류들이 온 산과 들을 가득 메우면서 빠른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세는 마치 화염이 하늘을 뒤덮은 듯하였다. 또 어떤 쇳소리와 총소리가 갑자기 등 뒤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와서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비류 수백 명이 또 송암(松巖)에서 고개를 넘어 이미 은현의 동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앞뒤에서 동시에 밀어닥치는데 나무도 없는 이러한 벌거숭이산에 앉아 있었으니 재앙이 곧 닥칠 진퇴유곡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옛날에 조조가 화용도(華容道)에서 속아서 패배를 당하였을 때 좌우에서 곤욕을 당한 것이 과연 오늘 내가 놀란 것과 같았을까? 몸을 옮겨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은현으로 난 길에서 수삼 명의 비류들이 고함을 지르며 쫓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서 황급히 유동 뒷산으로 달아나 숨었다. 그곳에서 서거나 앉아서 저들의 동정을 살피니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비록 잠시 마음을 놓았으나 종일토록 이리저리 쫓겨 다닌 터라 기력이 모두 쇠진하고 몹시 기갈이 들었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간신히 그 날을 넘겼다.
초경(初更) 후에 집 뒤의 산으로 올라가서 집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별고가 없는 듯하였다. 그런데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끝내 잦아들지 않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에 두 번 돌아보고 세 걸음에 한 번 놀라면서 무너진 울타리 사이로 잠입하여 허물어진 방으로 들어가니 전신이 혼곤하여 마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였다. 지금은 비록 나를 쫓아오는 적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걸음을 떼어 놓을 힘이 없으니 앉아서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밥이라야 차가운 죽 한 그릇이었으나 부자가 서로 마주 앉아 꿀처럼 달게 먹었다. 이른바 양식은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비단 낯선 지역일 뿐만 아니라 피난을 나온 터였기에 아직 변통을 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벼 2말을 주인댁에서 빌려서 먹었으나 지금 또 다 떨어졌다고 하니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밖으로는 비류들의 난리로 곤란을 겪고 안으로는 쌀과 소금 때문에 걱정을 하였다. 내 이 여린 마음에 한 몸으로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었겠는가? 참으로 매우 답답하였다. 부득이하여 친구 김여석씨에게 가서 간청하여 벼 2말을 얻어왔으나 이것도 수일치 양식에 불과하였다. 오늘 걱정하지 않으면 또 내일 걱정을 해야 하니 종국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집 옆에 새로 지은 빈 집이 하나 있었는데 방에는 문이 달려있지 않고 마당에는 울타리가 없었으며 덩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이튿 날에 집의 아이와 함께 빈 집의 벽장 속에 숨었다. 마음대로 앉고 눕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마치 결박당한 것 같았으며 또 담배를 피우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적도들이 문 밖의 가까운 지역에서 떠들면서 지나가니 간담이 서늘해져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틈을 타서 다시 나와서 화산(花山)의 후장으로 가니 강씨(姜氏)의 여러 친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심곡(深谷)의 임경원(任景元) 어른은 강성교(姜聖敎)와 사돈을 맺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데리고 그 집에 와서 거접하고 있었다. 임무경(任武景) 형제도 산 위에 와 있었다. 서로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와 같이 세상 끝에 윤락한 사람들이었으니 어찌 과거 그들과의 추억과 오늘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감회가 없겠는가. 이때 봉우리마다 사람들이 모여 모두들 짚신을 삼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짚신장이 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요깃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떡과 현미밥을 보자기에 싸서 혹은 허리에 차고 혹은 어깨에 지고 있었다. 그리고 피난살이를 얼마나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떤 이는 하루치 양식을 가져오고 또 어떤 이는 수일분의 양식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참으로 피난의 본 모습이었다. 나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나는 피난살이에 필요한 물자를 집에 두고 와서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할 방도가 전혀 없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미산(峨嵋山)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하늘과 땅은 음침하고 산천은 황량하며 마을은 썰렁하고 행객은 끊어졌다. 도로와 마을에서 마음대로 나다니는 자는 비류들뿐이었다.
이른바 이창구란 자가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국수봉(國秀峰) 아래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은 재물을 탈취하고, 졸개들을 시켜 촌가의 창고를 봉하게 하고, 관청의 창고나 개인집을 막론하고 무기를 모두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비류의 졸개들이 어떤 마을에 들어가면 봉고(封庫)하고 무기를 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소소한 폐단들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위로는 대가(大家)에서 작게는 오막살이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껍데기를 벗겨놓은 모습 같았다. 그리고 봉고로 말하면, 만약 100석을 가진 집에서 그 절반을 봉고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지금 저들 무리들이 봉한 것은 100석을 가진 집에서 그것을 초과하여 200석을 봉고하였다. 그리고 그 200석도 만약 한 곳만 봉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수십 곳을 봉하여 놓았으니 봉고한다는 표를 문에 붙여 놓은 것이 길거리의 점포 벽에 전갈쪽지를 붙여놓은 것보다 더 심하였다. 또 무기를 집안에 보관 한다는 구실로 양반가의 안뜰로 들어오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의복과 철물들을 보이는 대로 가져갔다. 그 밖에도 어떤 물건이든지 막론하고 자기 집의 물건처럼 가져갔다. 이러한 짐승 같은 짓은 비록 오랑캐라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가을걷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난동을 부렸으니 너나 할 것 없이 쫓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을 잡고 추수를 할 수 있었겠는가? 가까스로 추수한 곡식을 들판에 버려두어 새와 쥐들이 갉아 먹었다. 그리하여 태반을 상실하였으니 농사짓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시도 편안히 밥을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타작을 끝낸 약간의 볏섬은 도리어 저들 무리들에게 빼앗겨버렸다. 아, 저들도 땅을 파먹고 사는 백성들인데 농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함께 집안에 화를 초래하고 국가를 어지럽히는 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추위에 떨고 굶어 죽는 지경으로 들어가게 하니 이 또한 슬픈 일이었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날마다 부는 바람이 다른 바람은 전혀 없었고 단지 동풍(東風) 뿐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괴이한 일이라고 늘 걱정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동요(東擾)가 일어날 조짐이다. 이른바 동요는 동풍 중의 대풍(大風)이었다. 여름에 들으니 이른바 비류들이 여느 사람들을 대하면 그들을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7월에 시체가 쌓인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도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름이 아니라 이 시기에 기포하여 여느 사람들을 도륙하려는 흉계였던 것이다.
옛말에 오랑캐[蠻夷]로써 오랑캐를 공격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정말로 조선으로써 조선을 공격하는 근심이 생겨났으니 이것이 도참(圖讖)의 설에 부합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 또 평소에 저들이 하는 말에 만약 아들이 동학에 가입하였는데 아버지가 가입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화를 면하기 어려우며, 만약 동생이 동학에 가입하였는데 형이 가입하지 않으면 그 형도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의지할 곳 없는 같은 무리들을 묶어서 형을 가하여 강제로 가입시키고야 말았으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와 같은 난류(亂類)들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 또 있었겠는가? 대개 비류들이 매일 저지르는 난역(亂逆)이야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어찌 오늘날의 이러한 난역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다시 은현으로부터 떠들썩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몰래 엎드려서 아래를 살펴보니 비류 수십 명이 와서 조고원(趙高原)의 집을 여러 겹으로 에워 싸고 안뜰로 돌진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심을 강제로 얻어 먹고 이어서 화산으로 향하였다. 먼저 화산 명여(命汝)의 집에 들어가서 봉고하였으며 술을 강제로 얻어 먹고 또 소를 강탈하여 갔다. 명여의 모친이 그들을 길 중간까지 따라가서 애걸하여 되돌려 받아왔으니 다행은 다행이었다.
비록 이런 난세라고는 하지만 그 놀랍고 가슴 아픈 것이 이미 말로 할 수 없었다. 또 저들 무리들의 거취를 살펴보니 백치로 향하였으니 반드시 소란을 일으킬 것이었다. 또 100여 명의 비류들이 금학동(金鶴洞)에서 백치로 넘어 들어와서 집기를 거두어서 다시 화산으로 향하였다. 두 곳의 비류들은 가을이 되어 각자 남북으로 날아가는 제비와 기러기처럼 길을 비껴 갔으며 각각 가진 재물들을 서로 빼앗지는 않았으니 이는 같은 소리끼리 서로 상응하는 도리였을 것이다.
저들이 화산에서 한바탕 못된 짓을 하고서 막 은현으로 향하려는 즈음에 아래 봉우리의 길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모여서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깃발을 휘둘러 우리들이 앉아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장차 소리를 지르며 쫓아올 기색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시에 풍비박산이 되었다. 나는 집의 아이와 함께 암혈 속에 숨어서 두 눈만 드러내고 기미를 살폈다.
아, 저 비류들은 우리가 산 위에 피신해 있는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놀라게 하려고 하였으며 실제로 쫓아올 생각은 없었으니 더욱 지독히 애통하지 않겠는가. 비록 창해역사(滄海力士)가 잠복하여 저격하였던 술책이라도 오늘 내가 숨었던 재주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저들 무리들은 결국 조고원의 집에 들어가서 한 식경 동안 소란을 피우고는 또 저녁밥을 강제로 얻어먹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산 위에 있으면서 촌가들이 난리를 겪고 화를 당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조고원의 집은 오늘 다섯 차례나 화를 당하였으며 두 끼니에 내어 놓은 식사도 수백 상에 이르렀다.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처럼 3,000의 식객을 접대하던 수단 없이 창졸간에 이들을 접대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겠는가.
날이 이미 저물어 비류가 없는 듯 하여 다시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집의 아이에게 임기응변하라고 주의를 주어 집으로 보내고 나는 백치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소문을 들으니, 수일 동안 여러 댁에서 잃어버린 것과 욕을 당한 것이 이루 셀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로 이러한 때에 봉변을 당하지 않고 평소처럼 평안하게 지낸 자는 100명에 1~2명도 되지 않았으며 신체와 재산에 모두 손상을 입어서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한 자가 10에 8~9명 이었다. 그렇지 않고 마을마다 안정되고 집집마다 태평하다면 누가 난리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상놈과 천민은 사대부 집안과는 비록 싫어함이나 원망함이 없더라도 본래 얼음과 숯처럼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동요를 제일 먼저 주창한 자도 상놈이었고, 그 뒤에 갈라져 나와서 우두머리가 된 자도 상놈이었으며, 거기에 부응하여 따라간 자들 역시 상놈이었다. 그러므로 혐의의 유무와 재물의 다과를 막론하고 욕을 당하고 재물을 빼앗긴 것이 양반가가 특히 심하였던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대체로 사대부가 이 시기에 살면서 이러한 근심이 없다면, 이는 조상 대대로 선행을 쌓고 덕을 닦는 가법(家法)을 변함없이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돌보시고 조상이 음으로 도와서 비록 난세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재앙을 모면하였으니 이는 보통사람들이 미치기 힘든 것이다. 만약 여느 사람들이 욕을 당하지 않는다면 이는 도리어 양반의 본 모습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말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떠들어 댄다. 그러한 말은 비록 농담이지만 이 세상에 적절한 격언이다.
저녁밥을 먹은 후에 여러 친척들과 함께 뒷산봉우리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도처의 불빛이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쇳소리와 총소리가 우뢰처럼 귓전을 때렸다. 그 참혹하고 슬픈 광경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기포 이후로 마을의 개 짖는 소리와 오락가락하는 불빛이 이어져서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며 낮이 다시 밤으로 이어지고 밤이 다시 낮처럼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겁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적도들이 동네에 들어오지 않아도 마음을 놓고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산 위에 흩어져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밤이 깊은 뒤에 백치로 들어가서 잤다.
이튿 날 새벽 밥을 먹고 다시 여러 친척들과 뒷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사방 아래 세상을 바라보니, 이른바 비류들이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면서 남쪽에서 도적질을 하고 북쪽에서 노략질을 하며 동분서주하였다. 그 기세를 타고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멀리 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면 반드시 적도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며 쇳소리와 총성이 나는 곳에는 반드시 적도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오후부터 어디에서 온지 모르는 수천 명의 적도들이 승전우(僧田隅)에서 송암을 지나 면천읍으로 몰려들어왔다. 그 늘어선 모습이 마치 생선을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어 지어 나아갔는데,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기세가 등등하여 보기에 굉장하였다.
열읍의 서리들은 삼반(三班) 이하 관노와 사령에 이르기까지 적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른바 수령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리들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하여 국법이 해이해지고 상하(上下) 등급이 문란해져서 사람들이 모두들 비웃었으니 수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면천의 서리 유(兪)와 박(朴)은 국초 불굴신(不屈臣)의 자손으로 이 난세를 만나서 이방(吏房)과 호장(戶長)에서 관노와 사령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적도에 물들지 않고 각자 본심을 지키고 각자 자신의 본업을 영위하였다. 그리하여 호우의 사민(士民)들이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비류들이 폐단을 일으키고 고을을 분탕질하는 것이 다른 곳보다 더욱 심하였다.
면천수령은 곧 서산 토동(兎洞)에 사는 조중하(趙重夏)이다.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같은 고향의 지구(知舊)였다 그래서 전에 마침 볼일이 있어 들어가서 만나보았다. 서로 처음 만났으나 오래된 친구처럼 각별하였으며, 정성스럽게 접대하는 정의(情誼)도 전통 있는 집안의 기풍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서로 동요(東擾)의 일로 절절히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그는 나를 위로하며 그 고을에서 화를 피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맹랑하였다.
고을의 서쪽에 사는 유동환(兪東煥)은 바로 본읍의 수연(首椽)이었다. 전에 관아에 들어갈 때 그의 동생 응환(應煥)이 동헌(東軒)에 통자(通刺)하여 그와 함께 출입하였으며 아울러 나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여 주었다. 오늘 산 위에서 다시 그를 만나 함께 난리를 겪고 있으니 또한 옛날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치는 우리집과 마을 하나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식을 듣지 못하면 미칠 것 같고 취할 것 같았다. 이는 평상시가 아닌 난세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산 위에서 종일토록 집안의 동정을 내려다보았더니 큰 탈은 없는 듯하였다. 그런데 우리 부자는 산 위에 피해 있어서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집안에 놓아둔 물건이었다.
집안에 놓아둔 물건들은 단지 이부자리와 옷 보따리에 불과하였지만 적도에게 빼앗길까 걱정이 되어 안뒷간의 콩깍지묶음 속과 빈집의 구들 안에 감추어 두었다. 만약 이것을 빼앗긴다면 온 식구의 추위를 막는 것이 당장의 시급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지금 부서진 배나 깨어진 솥과 같은 나의 처지에서 또 이러한 재앙을 만났으니 앞으로 살아갈 방도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고금의 천하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사는 마을은 또 적의 소굴에 가까워서 지나가는 비류들이 있어도 다른 동네처럼 들어와서 수색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마을의 모습도 쇠잔하고 가옥의 모양도 영성하여 더욱 등한시하며 지나쳤으니 이 또한 다행이었다.
대개 적도들의 움직임과 종적을 살펴보니 여염이 즐비하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마을마다 폐단을 일으켰으며 집집마다 뒤졌지만 만약 촌가가 황량하면 대개 그냥 지나쳤다. 이렇게 본다면 난세에는 부자가 가난한 자만 같지 못하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날이 저문 뒤에 다시 백치로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고 유동으로 돌아갔다. 식구들은 편안히 지내고 있었으나 양식은 또 떨어졌다.
새벽에 집의 아이를 데리고 동촌(東村)으로 가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뒷산의 소나무 숲 속에 숨으니 마치 매에 놀라서 엎드린 꿩 같았다. 동적(東賊)의 곡식을 운반하는 우마가 하루 종일 좌우의 도로에 이어졌으며 오고가는 비류들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날을 보내고 초경이 지나서 다시 친구 김군석의 집으로 들어가서 잠시 저녁밥을 먹었다. 또 간청하여 벼 2말을 얻어 포대에 넣고 집의 아이에게 짊어지게 하여 여석과 함께 비류들이 왕래하는 큰길을 피하고 구불구불한 산골짜기 시내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간신히 유동마을 앞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어떤 놈들 몇 명이 마침 은현에서부터 추격하여 등 뒤의 다섯 걸음 정도까지 따라와서 고함을 지르면서, “거기 가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뒤에서 오고 있던 여석이 번지르르한 말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우리 부자는 놀라서 정신이 나가 급히 아랫마을로 달아나 주인을 모르는 어떤 집 앞에 이르렀다. 좌우를 돌아보니 인가들이 길의 전후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집집마다 개 짖는 소리와 사람소리가 떠들썩하니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황급한 가운데 밤나무 숲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엎드렸다. 최대의 단점은 달빛이 밝아서 흑백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몸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양편으로 숲이 빽빽하여 그곳에 잠시 몸을 의탁하였다.
한 식경 동안 숨어 있다가 개 짖는 소리와 사람소리가 다시 그쳤을 때 몰래 일어나서 조용히 나오니 개 짖는 소리와 사람소리가 다시 떠들썩하게 들렸다. 겁이 나서 얼떨떨한 가운데 부자가 서로 길이 갈라져 버렸다. 나는 도중에 앉아서 오래도록 집의 아이를 기다렸으나 끝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니 나의 초췌한 마음은 더욱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아이는 다른 길로 돌아서 먼저 도착하여 도리어 내가 늦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위안이 되고 기쁜 나머지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여석도 와있었기 때문에 함께 잤다.
이튿 날 새벽 밥을 먹은 뒤에 다시 집의 아이 및 여석과 함께 뒷산의 소나무 숲 속에 숨었다. 그런데 밤부터 비가 오락가락하여 의관이 모두 젖었으며 또 냉기가 몸으로 스며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봉우리 뒤에서 왁자지껄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낭랑한 부녀자의 음성이 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어떤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들을 업고서 잔치에 모인 것처럼 둘러앉아 있었다. 이들은 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혹은 울음소리를 내고 혹은 탄식의 소리를 내었는데 매우 불쌍해 보였다. 사나운 도적들이 있는 마을에서 쇳소리와 총성이 진동을 하였다. 그래서 좀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시초(柴草) 더미 속에 구덩이를 파고 간신히 다리를 덮고 앉았다. 바람과 비가 번갈아 내려 의관이 망가지고 젖었다. 그래서 도당곡(陶唐谷)의 생원 이병대(李秉大)씨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의 작은 주인과는 전에 산 위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점심을 얻어 먹고 젖은 옷을 벗어 걸어 말리면서 다리를 쉬며 한담을 하였다. 이때 동네 밖에서 쇳소리와 총성이 일시에 진동을 하였는데 마치 담장 뒤에서 나는 것 같았다.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급히 나가서 바라보니 비류 수백 명이 이미 동네 어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비를 맞으면서 급히 달아났다. 나무뿌리에 다치기도 하고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골짜기에 거의 구를 뻔했으니 아홉 번 죽었다가 열 번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여석은 비로 인한 습기를 견디지 못하여 그의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부자는 우리집으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비바람을 맞은 터라 몸과 마음이 피로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약간의 의복을 집안에 놓아두면 쉽게 빼앗길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있는 대로 여러 겹을 몸에 걸쳤다. 그런데 지금 몽땅 젖어버려 갈아입을 여벌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하였겠는가. 부득이하여 벗어서 벽에 걸어놓고 이불로 몸을 감싸고 앉아 있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 부자의 겨울옷은 모두 며느리가 바느질을 하여 지어주었는데 지금은 길이 막혀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솜옷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에 추위에 떨고 있어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한기에 있을 때 틀림없이 그것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답답하였다. 또 며느리의 안부에 관해서도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불안한 마음은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이 동적(東賊)의 광풍은 잠잠한 곳이 없었다. 형님과 두 조카도 어디에서 무사히 거주하고 있을까? 혹 정신이 들어서 이 문제에 생각이 미치면 더욱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오늘 저녁은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날씨가 흐리고 비 때문에 눅눅하여 집에서 자려고 이불을 덮고 누웠었다. 그런데 뜻밖에 강중첨(姜重瞻)과 임무경이 방문하여 함께 월한(越閈) 강찬옥(姜贊玉)의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부득이하여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다시 입고 함께 찬옥의 집으로 가서 한 바탕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비가 그치고 날씨가 쾌청하여졌다. 임(任)·강(姜) 두 사람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으며 나는 혼자 그곳에서 유숙하기 위하여 찬옥의 집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미 한밤중이 되었는데 갑자기 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일제히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수삼 명의 비류들이 대문 밖에 와서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고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등불을 밝히고 앉았다. 그러니 어디로 몸을 피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부득이하여 곤하게 자는 척하며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더니, 이 자는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 이봉회(李鳳會)란 자였다.
봉회는 본래 불량배였는데 지금은 괴수를 따라다니며 대장(大將)을 자칭하고 부근의 마을에서 갖은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 자였다. 그의 이름을 익히 들었던 터라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과 혼백이 모두 날아가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이 적(賊)이 상스러운 말로, “저기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자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과연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었다. 부득이하여 잠꼬대를 하고 하품과 기지개를 켜면서 머리를 긁고 일어나 앉았다.
강찬옥은 바로 내 옆에 앉아서 나의 성명과 거주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 자는 흔연히 나의 안부를 물었다. 또 부드러운 얼굴빛과 말로써 시원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게다가 객지에서 고생하는 나의 사정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는 참으로 꿈도 꿀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의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狼子之野心] 나를 처음 대하고서 어떻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내가 비록 행색은 초라하였어도 감히 노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튿 날 새벽 밥을 먹고 또 집의 아이와 함께 아미봉(峨嵋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비류들이 오고가는 광경은 어제의 모습과 같았으며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갑자기 은현으로부터 어떤 사람들 3명이 내가 앉아있는 곳을 가리키며 올라왔다. 옆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들 놀라서 바라보며 막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고 하였다.올라온 그 사람들은 우리들이 흩어지려는 모습을 보고 급히 부르면서, “우리들도 피난 온 사람들이니 놀라서 달아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두 명은 염솔(廉率) 사람이고 한 명은 서산 사람이었다. 모두 친절하였으며 동학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화를 피하여 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 서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쪽의 소식을 자세하게 묻고 그 대답을 들으니 간담이 서늘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으며 앞으로는 더 이상 삶을 도모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지난 달에 대천(大川)에 사는 윤교리(尹校理)와 관동(官洞)에 사는 교리의 사종씨(四從氏)가 함께 선유사(宣諭使)로 내려왔다고 들었으나 그 사실 여부와 거취는 듣지 못하여 마음이 답답한 나머지 깊은 근심이 생겼었다.
지금 전하는 바를 들으니 초하루에 교리 어른과 태안 군수가 함께 비류들에게 해를 입었으나 아직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른바 동적(東賊)들은 태안의 관사와 관동의 교리댁에 불을 질렀으며 그의 아들과 동생 및 당내(堂內) 친척들이 입은 화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러한 전에 없던 변괴가 있단 말인가? 한 집안이 당한 화가 어찌 이토록 심하단 말인가? 초이튿날에는 서산 군수도 해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역심을 품은 무리들이 명리(命吏)를 죽이고 명관(命官)을 살해하며 또 막중한 관청건물과 사람이 사는 가옥에 불을 질렀다.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이 이런 일에 이르자 모든 생각이 재처럼 사그라졌다. 이것 또한 운명이며 시절 탓이니 더 이상 어찌하겠는가?
동학의 난리 이후로 이른바 차력(借力)을 한다는 사술이 성행하였다. 그것은 남학(南學)이라고 불렀다. 애초에 동학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남학에 들어갔으며 동학을 쓸어버린다는 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래서 비류들은 일반인들을 모두 남학에 들어간 사람으로 몰아붙여 도륙을 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남학은 열에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었다. 비록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단지 자기 한 몸을 위한 계책에 그쳤으며 집안을 온전하게 하는 계책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것을 배운들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이우송(李友松)이란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남학의 종주라고 떠들면서 몰지각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돈과 재물을 빼앗았다. 근처의 누구누구 집에서는 재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으며 혹은 재산상의 피해를 입고 중도에 그만둔 자도 있었다. 족숙 감역 어른의 대소가도 남학에 속아 재산을 거의 탕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었다.
또 들으니 재종동생 광숙(光叔)이 밤에 궁촌(宮村)의 냇가에서 비류들을 만나 창칼에 찔려 지금 사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 세 사람이 작별을 하고 신평(新平)으로 향하자 이별의 아쉬움이 없을 수 없었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었다.
오후에 신암(新巖) 뒷길에서 쇳소리와 총성이 땅을 뒤흔들며 들려왔다. 그래서 놀라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비류들이 수 리에 걸쳐 장사진을 펼치고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곧장 백치 앞들로 들어갔다. 무리를 이끄는 자는 윤치상(尹致相)이었다. 그 놈은 본래 불량배로 어떤 출신인지를 모르며 영락하여 근래 백치에 우거하였다. 지금은 적괴가 되어 이창구 밑으로 들어가 근처에서 온갖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지금 또 들어와서 마을 앞에 이르러 여러 겹으로 에워쌓았는데 항오(行伍)나 부대도 없이 단지 철통같이 서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곧 동적(東賊)의 진법이었다.
대체로 진법이란 얼마나 비밀스럽고 변화무쌍한 것인가? 팔문진(八門陣)·육화진(六花陣)·매화진(梅花陣)·장사진(長蛇陣)·육갑(六甲)·육정(六丁)·육임(六壬)·육무(六戊)·어리(魚離)·기정(奇正) 등을 모두 통달한 연후라야 진법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술과 밥이나 축내는 무리들이 물고기 대가리에 귀신 낯짝을 한 오합지졸을 불러 모아놓고 당당한 대군의 술수(術數)를 어떻게 행할 수 있었겠는가? 한편으로 그가 전에 살던 이웃의 인가에 불을 지르고 한편으로 강도정(姜都正) 집의 사랑을 부수었으며 끝내는 양반가의 부녀자에게까지 화를 입혔다. 이러한 짐승 같은 악행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 말을 할 수도 없고 걸음을 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한바탕 못된 짓을 한 뒤에 바로 가버렸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둠을 틈타 집의 아이를 집으로 보내고 나는 백치로 들어가서 밤에 여러 친척들과 모여 앉아 근심하다가 잤다.
이튿 날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또 피신할 계책을 궁리하였으나 날마다 산에 올랐던 나머지 몸과 마음이 모두 고단하여 떨쳐 일어나서 앉을 수가 없었다. 어떤 동적 10여 명이 각자 창을 들고 갑자기 마당으로 들어왔다. 나는 급하게 변통하기 어려워서 대평(大平)댁의 부엌에 몸을 숨겼다가 그들이 돌아간 뒤에 나왔다. 대개 이 동네가 유독 피해를 많이 입은 이유는 첫째는 부도촌(不道村), 동학을 믿지 않는 마을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대나무 숲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들으니 비류들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와서 남아 있던 일반인들을 전부 잡아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서둘러 저녁밥을 먹고 여러 친척들과 다시 뒷산 중턱에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밤이 깊어진 뒤에 초계(草溪) 형제와 함께 소나무 숲에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덮고 자는 이불 위에 흰 서리가 어지럽게 내렸으며 등 뒤에서는 냉기가 몸을 뚫고 들어왔다. 다시 곧장 친척 이씨(李氏0의 집으로 내려가서 온돌 위로 몸을 옮겼으나 오래도록 몸이 풀리지 않으니 이것이 고민이었다.
날이 저문 뒤에 광풍이 잠시 가라앉자 또 집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동정을 살펴 집으로 돌아가니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으나 집의 아이가 겨울옷을 가지러 어제 새벽에 혼자 그의 처가로 갔다고 하였다. 보낸 사람이나 간 사람이나 모두 몰지각하였다. 그러나 책망한들 무슨 보탬이 되며 탄식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며 실로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집의 아이가 떠날 때 도중에 동림에 들리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날이 저문 뒤에 산룡(山龍)에 올라가서 동림을 바라보니 집의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각처의 피난민들이 집에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의 아이를 기다리려고 친구 김씨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북촌(北村)만 바라보았다. 밤이 아직 초경이 되지 않았는데 집의 아이가 과연 옷보따리를 지고 들어왔다. 당시의 기쁜 마음은 마치 하늘나라에 간 아들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게다가 며느리가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 기쁨이야 오죽했겠는가.
유동과 은현 사이에서 쇳소리와 총성이 끊이질 않아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집의 아이는 또 친구 김씨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한밤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온 식구가 기뻐하는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이후로 동림의 친구 김씨에게 입은 은혜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난세에 밥 한 그릇을 얻어먹어도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친구 김씨의 여러 형제와 숙질들을 보면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비단 나에게만 후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을 피해온 수많은 지인들을 모두 차별 없이 대우하는 것이 마치 한 판으로 찍은 듯하였다. 이웃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유풍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높은 뜻을 이어받은 것이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집의 아이에게 집에 있으면서 때에 따라 적절하게 피신하라고 주의를 주고 나는 새벽에 백치로 갔다. 아침밥을 먹고 다시 여러 친척들과 함께 고을 뒤의 자각봉(紫閣峰)에 올라가서 동정을 살폈다. 과연 오래지 않아 한정곡(寒井谷)으로부터 100여 명의 비류들이 물밀듯이 백치로 들어와서 집집마다 수색을 하더니 금학동 고개를 넘어 송암으로 갔다. 그 광경을 본 후에 앉아 있거나 서있었으며 신을 삼기도 하였다. 저녁이 되어 다시 백치로 들어왔다. 초계와 함께 비로소 갓과 망건을 벗고 허리띠를 풀고 버선을 벗고 막 잠을 청하려던 때에 또 아랫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두 손에 갓과 망건 및 옷과 버선을 들고 황급히 몇 걸음을 달아나 뒷동산에 서서 바라다보니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선잠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매우 피곤하고 나른하였다. 난리를 만난 뒤로 정말로 놀란 것 외에 거짓으로 놀란 경우도 많았으니 더욱 맹랑하였다.
이튿 날 밥을 먹은 뒤에 또 여러 친척들과 뒷산에 올라 혹은 신을 삼고 혹은 동정을 살폈다. 오후에 어떤 동적 수백 명이 동네로 들어와서 집기들과 소를 찾아내어 가져갔다. 친구 이주원(李周元) 형제와 유성문(兪聖文)도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놀랐으나 얼마 뒤에 성문이 소를 찾아 돌아왔으니 웃을 일이었다.
이른바 비류들은 매번 석권(席捲)하여 간다고 말하였지만 석권은 고사하고 비록 천지를 말아서 가더라도 이 부도인(不徒人), 徒는 道의 오기들은 빠뜨리고 갔으니, 그들이 아무리 여러 번 다그치더라도 어찌 석권하는 가운데에 흔쾌히 들어갔겠는가? 도리어 냉소만 나올 뿐이다. 이 높은 봉우리에 올라 원근을 바라보니 산의 높이와 험준함을 막론하고 피난민들이 올라가서 숨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산봉우리의 색깔이 겨울나무에 눈꽃이 핀 듯하였다. 이른바 비류들은 읍촌(邑村)과 방곡(坊曲)을 두루 돌아다녔다.
동학교도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장정들은 하나도 집에 남아있지 않았으니 이른바 생산은 누가 담당하였겠는가? 산등성이와 봉우리를 막론하고 모두 피난민들이 밟고 다녀서 풀이 벗겨져 자연적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마당이 생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피난살이가 괴로웠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 이후로 날씨가 줄곧 가물었으며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이는 비단 동적이 날뛰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피난민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 죽지 않도록 하였으니 하늘이 베푸신 은덕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이 백성들을 전부 없애실 뜻은 없는 것 같았다.
수일 전부터 경군(京軍)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끝내 아무런 소식이 없어 매우 답답하였다. 아침부터 덕산의 목시와 홍주의 북창(北倉) 근처에서 화염이 하늘을 뒤덮고 살기가 가득 차고 총성이 진동하였으나 아무도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북창은 곧 마수동의 이웃 동네여서 걱정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집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화산의 뒷산에 도착하니 낯선 사람 몇 명과 강씨(姜氏) 일족이 이미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니 새벽에 경군이 홍주에서 목시로 가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비류들을 격파하고 사람들을 많이 다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비류들이 죄다 흩어졌으며, 북창에 주둔하고 있던 비류들은 소문을 듣고 와해되었다고 하였다. 뛸 듯이 기쁜 감정을 가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조운(趙雲)이 필마단기로 주군을 구하던 충성이 없거나 문천상(文天祥)이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던 충성이 없거나 한문공(韓文公)이 일으켜서 구제하던 수단이 없다면, 사악한 기운을 일소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광란을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세 사람을 구하여 우리 생령들로 하여금 다시 정대공명한 하늘의 해를 볼 수 있도록 한단 말인가? 어둠을 틈타 집으로 돌아와서 잤다.
양식이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궁리해 보아도 다른 계책이 없었다. 월한의 강찬옥 형제는 비록 적도에 가입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은 순수하고 선량한 호인이었다. 그에게 가서 간청하였더니 벼 1섬을 소에 실어서 한호의 사돈 이씨댁으로 보내주었다. 찬옥도 그 무리들의 우익(羽翼)이었기 때문에 무사히 왕래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힘을 써 준 것에 매우 감사하였다.
마침 동림에 볼 일이 있어서 아침에 가서 한담을 나누고 저녁에 큰길을 통해 돌아오는데 유동 뒤 고개의 우묵한 골짜기에서 갑자기 적괴를 만났다. 홀연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하여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떠하겠는가? 부득이 하여 비류들의 관례에 따라 인사를 하고 목시의 일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 적괴가 답하기를,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막 도망쳐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어찌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기지 않았겠는가? 그가 거느리고 온 사람들을 보니 300~400명은 족히 되었다. 이자는 바로 소탐(蘇耽)에 사는 김성오(金聲五)였다. 그는 이미 패하여 달아나던 터라 쇳소리와 총성도 울리지 않았으며 나를 보고도 당당한 기색이 없었다. 난세의 임시변통이 오늘처럼 욕을 보지 않는다면 족하리라.
이창구란 놈은 국수당(國秀堂)에서 수천 명을 거느리고 농보성(農堡城)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른바 윤치상이란 자는 차가운 검으로 농보의 우두머리를 찔러 두목이 사경을 헤매게 했으니 놀랍고 분하였다. 또 백치로 가서 여러 친척들과 앉아서 한담을 나누며 앉아 있었다. 그때 덕산 역촌(驛村)에 거주하는 조씨(趙氏)가 뜻밖에 불쑥 들어왔다. 이 사람은 윤일(允一)씨의 처남이었다. 그는 비류들에게 붙잡혀서 이리저리 따라다니다가 저들 무리들이 막 유동의 맹굴(孟窟)로 들어가서 오늘 밤을 지내려고 할 때 간신히 틈을 타서 이곳으로 도망쳐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초계가 홍주에서 내응한 것을 트집 잡아 내일 이 동네로 들어와서 초계를 붙들어가고 이 동네를 도륙하려 하므로 우선 여기에 와서 알려준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감사하고 또 놀라웠다. 그대로 백치에서 유숙하였다. 적도가 이 동네에 들어와서 유숙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집의 아이의 거취가 궁금하였다.
이튿 날 새벽에 몰래 동정을 살펴 산등성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집 뒤에 도착하니, 개 짖는 소리와 사람소리가 좌우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서 마당의 사립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헤진 울타리의 틈으로 들어가니 비류들이 이웃집에서 자고 있었다. 처자들은 도리어 내가 온 것에 놀랐으며, 집의 아이는 이미 먼저 피신하였다. 다행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다시 울타리 틈으로 빠져나오니 이웃집에서 어떤 놈 하나가 나를 보고는 고함을 지르면서 쫓아왔다. 황망한 중에 허겁지겁 화산 뒷산으로 달아나서 바라보니 더 이상 추격해오지 않았다. 이에 백치로 가서 밥을 먹은 뒤에 여러 친척들과 함께 다시 뒷산에 올라 둘러보니, 유동에서 쇳소리와 총성이 진동을 하였으며 비류들은 이미 화산의 뒷산에 모여 있었다.
아, 저 적도들이 봉우리와 골짜기를 두루 돌아다니며 피난민들을 수색하는 것이 마치 사냥할 짐승을 에워싸는 포수와 같았으니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그 광경을 보니 몸과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 아미산 속에 있다면 끝내는 반드시 잡힐 것이었기 때문에 불산(佛山)으로 달아났다. 의복은 나뭇가지와 가시에 걸려 모두 헤졌으며 힘이 빠진 정강이와 무릎도 나무뿌리와 돌부리에 다쳤다. 게다가 몹시 숨이 차고 목이 말랐으나 물을 구해 마실 수도 없었다. 피난 온 이후에 놀라 겁을 먹고 몸이 고달픈 것이 오늘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
저녁에 동정을 살피면서 들으니 적도들은 이미 떠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초계를 찾아오라는 적도들의 등쌀에 초계댁의 친척 아저씨가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고 하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자는 바로 연전에 홍주의 이방 아전이었던 최동신(崔東臣)으로 지금은 적괴 중의 한 놈이 되어 있었다. 백치에 들어가서 저녁 밥을 먹은 후에 여러 친척들은 모두 집으로 들어갔으나 초계 형제만은 최적(崔賊)이 소란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끝내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의 모친이 저녁 밥을 이고 와서 후원 가운데서 애처롭게 불렀으니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한 날 저녁에 뒷산에 올라 동정을 살피니 농보에서 북창을 거쳐 대천 근처에 이르기까지 불빛이 하늘로 치솟았으나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이튿 날에 들으니 이것은 이창구가 홍주로 잡혀간다는 봉화였다. 이른반 편(片)·강(姜) 두 놈은 본래 이창구를 따라다니던 거괴(巨魁)였으나 아무개의 공명정대한 훈도를 듣고 지난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모여 있던 졸도들을 해산시켜서 먼저 창구의 우익(羽翼)을 잘라버린 뒤에 몰래 이문옥(李文玉)씨로 하여금 노련한 매가 꿩을 낚아채듯이 그를 잡아 묶어서 초토영(招討營)으로 보내어 왕법(王法)으로 처형하도록 하였다. 편(片)·강(姜)의 행적을 논한다면 죄(罪)의 수괴요 공(功)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었다. 또 박덕칠과 이창구는 호우의 거괴로서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폐단을 일으킨 것이 서로 막상막하였다.
지금 창구가 체포되어 비류들은 오른팔이 잘렸으므로 이제부터 비류들의 당당하던 기세가 조금 수그러질 것 같았다. 이것은 백성들의 폐해를 없앤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악의 뿌리 하나를 제거한 것이었다. 춤을 출 정도의 기쁨이 어찌 한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었겠는가? 지난 날 북촌에 모여 있던 비류들은 창구가 처형된 뒤로는 더 이상 모여서 폐단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후로 놀라서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조금 안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곳의 비류들은 여전히 자주 제멋대로 침학하였으므로 영원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초토영에서 면천과 당진 두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유회를 개설하고 마을 사이의 도로 옆에 유막(儒幕)을 설치하여 오고가는 수상한 사람들을 자세하게 조사한 뒤에 결박하여 초토영으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관문의 신칙(申飭)이 매우 엄하였기 때문에 각 마을에 유막을 설치하자 행인들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는 바로 동학교도와 일반인들 사이의 화와 복이 갈리는 시점이었다. 백치의 경우에는 고을로 들어오는 고개에 유막을 설치하고 매일 밤 번(番)을 갈아가며 지켰다. 비록 고생스러웠지만 지난 날 쫓기던 때와 비교하면 태평성대의 좋은 팔자였다.
그러나 서산·해미(海美)·태안의 비류 수 만명이 여미의 수십 리나 되는 긴 계곡에 모여 매일 소를 잡고 또 재물과 곡식을 탈취하였다. 당진의 남쪽과 면천의 서쪽은 대가와 오두막을 막론하고 남김없이 싹 쓸어갔다. 게다가 서산과 태안에 머물러 있던 나머지 부대들은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이 금명간에 당진과 면천을 석권하여 창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므로 여미는 당진과 면천의 재앙의 근원이었다. 어찌 복심(腹心)의 근심이 아니겠는가?
홍주에서부터 일본군과 정병(丁兵)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전혀 군대가 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피폐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목이 마른 채로 구름과 무지개만 바라보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답답하였다. 한편 현재 가야(伽倻)의 동쪽에는 별다른 동학의 부대가 없었다. 단지 해미·서산·태안 서쪽 지역의 독기(毒氣)가 여미 우명(牛鳴)의 땅에 모여 있었으니 그 막힌 것이 터져 헤아리기 어려운 재앙이 순식간에 닥쳐올 것 같았다. 그리하여 사민들의 신음소리가 지난 날 보다 더 심한 듯하였다.
하루는 면천읍에서 사통(私通)이 와서 급하게 열어보았더니, 홍영(洪營)에서 일본군과 병사가 오늘 면천읍에 당도하는데 비류들에게 여러 차례 분탕질을 당한 뒤라 군량 공급에 어려움이 있으니 짚신과 계란 및 쌀을 거두어서 들여보내라는 내용으로 회람시키는 것이었다. 어찌 어깨를 들썩이고 생기가 나지 않았겠는가? 또 어찌 자원하여 즐거이 따르지 않았겠는가? 각자의 마을에서 집안 형편에 따라 요청하는 대로 촌가도 여러 차례 분탕질을 당한 뒤라서 맹꽁이 등에서 털을 깎는 것과 같았다.
이튿 날에 거둔 물건들을 한편으로는 읍으로 들여보내고 또 병정들이 출전하는 모습을 보려고 여러 친척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바라보았더니, 병사들은 오늘 새벽에 이미 여미로 떠났다. 하루 종일 총성이 끊이지 않았고,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메웠고, 살기가 허공에 가득 차서 햇빛이 가려져서 컴컴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승전보를 듣기를 바랐다.
오후에 쌀을 지고 읍으로 들어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알려주기를, “여미에 출전하였던 병정들은 승전(僧戰)아래에 이르러 겨우 한 무리의 군사들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런데 검암(劍巖) 뒷산에 이르러 수만 명의 대군을 보자 겁에 질려 간이 콩알 만해져서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바로 퇴각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이 나가 버렸다. 도리어 지난 날 쫓기던 때보다 더 못하게 되었다. 앞으로 순식간에 화가 닥치게 생겼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얼마 되지 않아 승전우(僧田隅)에서 총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화염과 연기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몇 만명이나 되는지 모를 비류들이 온 산과 들을 가득 메우고 발로 차고 짓밟으며 면천읍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속도는 비바람처럼 빨랐으며 그 기세는 이리와 승냥이 같았다. 이 살벌한 광경을 보았다면 누가 삶을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산송장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또 면천읍에서 처자를 데리고 피난 나온 사람들이 산과 들의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를 보니 위태롭고 애처로웠다.
만약 백치 좌우의 산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금방 화가 닥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집의 아이는 집에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 위기를 알 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곧장 유동으로 달려갔더니 집의 아이는 강성춘(姜成春)의 세 숙질과 함께 함박산(含朴山) 뒷봉우리로 가서 토갱(土坑) 속에 시초(柴草)를 깔고 떨면서 밤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면천에서 20리 떨어진 곳이어서 밤새도록 고함소리와 총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으며 불길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예로부터 난세의 본 모습이 과연 이때의 이 광경과 같았을까?
닭이 겨우 세 번 울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한정(寒井)에 있는 강성춘의 둘째 형님 성근(成根)의 집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 흑석에 사는 이씨가 와서 말을 전하기를, “읍에 들어간 동적들의 일부는 어제 저녁에 먼저 대천으로 갔으며 절반은 읍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읍 부근의 촌가에는 동적들이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저들의 동정을 살피니 면천읍에 주둔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어제 퇴각한 병정들을 추격하고자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대천 땅으로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그럴듯하였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을 믿겠는가? 그래서 성근의 집에서 새벽밥을 먹고 다시 성춘 및 집의 아이와 함께 신암의 야트막한 산의 소나무 숲으로 갔다. 그러나 몸이 매우 피곤하여 잠시 성춘의 일족인 강씨의 집에 들어가서 눕고는 동네사람에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다. 성근은 오후에 돌아갔으며 나와 집의 아이는 저녁밥을 먹은 뒤에 산언덕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전전하면서 집에 도착하였다. 집안사람들은 편안히 지내고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다.
이튿 날에 들으니 면천에 주둔하는 적도들은 모두 떠나갔는데 한 고을을 죄다 분탕질하여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덕산 석교의 단하(丹霞) 이민규(李敏奎)는 그의 품행과 문장이 한 고을의 고사(高士)라고 할 수 있다. 조상 대대로 덕행을 닦아서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 저들 무리들이 지나갈 때에 그가 거주하는 기와집과 100석에 가까운 볏섬을 모두 불태웠다고 하였다. 비록 난세라고 하지만 어찌 이렇게 나쁜 행동을 반복하는 놈들이 있는가? 이는 이단하가 고향에서 처신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길옆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뜻밖의 화를 입은 것이었다. 이른바 비류들이 지나간 곳은 모두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 아픔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족조(族祖) 광우(光佑)는 여미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둘째 아들도 이번에 동적에게 피해를 입었다. 또 혼인할 때가 된 딸을 난리 때문에 날을 잡지 못하고 친구 이원일(李元一)의 아들과 혼인을 시켰다. 그런데 저들 무리들이 혼인하는 날 밤에 소란을 피우고 결국 신방에 든 신랑을 붙들어 가버려서 갓 초례를 치른 꽃 같은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행패를 깊이 따져보면 만 번을 죽여도 무엇이 애석하겠는가? 또 여러 해 동안 수학한 제자가 자신을 가르친 스승에게 화를 뒤집어씌워서 지금 쪽박을 차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는 만고 이래로 듣도 보도 못한 괴변이었다. 흔히 사람이 살면서 존중해야 할 세 가지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거론한다. 정성을 다하여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은 패행과 악습이 있단 말인가?
지금 모인 적도들의 숫자는 한 나라를 대적할 만하다. 한 나라의 왕령(王令)을 내리더라도 이만큼 모으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들이 지금 이렇게 모였으니 만약 한 번 대의(大義)를 일으켜서 왜(倭)를 물리치고 서양(西洋)을 몰아낸다면 조정에서부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아이들까지 누군들 즐거이 따르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칼로 대를 쪼개는 기세나 순풍을 만난 불길 같은 형세가 되어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이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외국의 짐승 같은 오랑캐들로 하여금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반드시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고 끊임없이 칭송하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동쪽의 오랑캐가 감히 동쪽 바다에서 해적질을 못하게 하고, 서쪽 오랑캐가 감히 서쪽에서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북쪽 오랑캐가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막중한 오백년 종묘사직을 영구히 보존토록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지친 백성들도 편안히 지내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 비류들은 처음에는 왜를 물리치고 서양을 물리친다고 떠들다가 결국에는 도리어 조선을 물리치고 스스로 외국의 이적(夷狄)에게 수모를 받도록 하는 것인가? 왕의 군대가 이르는 곳에서 저들은 총칼에 쓰러져 까치밥이 될 것이니, 일의 기미를 살펴보면 이 또한 애통하다.
백치로 가서 여러 친척들과 서로 그 사이에 겪은 놀라운 일들을 전부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함께 뒷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니, 예산의 신원(新院)·산성촌(山城村)·역촌(驛村) 및 덕산의 누산(樓山)·봉계(鳳溪) 근처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 아마도 성패 간에 곡절이 있는 듯하였다. 추후에 들으니, “저들 무리가 바야흐로 목천(木川)을 향하여 떠났는데, 신원에 당도하여 마침 홍주유회의 병정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전투를 하였으나 홍주영관(領官) 김덕경(金德卿)이 불행히 전사하였습니다. 이에 비류들은 곧장 홍주읍으로 몰려 들어갔으며 그 성패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는 매우 놀랐다. 적도들이 평소에 두려워하고 꺼리던 곳이 바로 홍주였다. 그런데 저번에는 병정들이 여미에서 퇴각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번에는 김덕경이 신원에서 전사하는 것을 보았으니, 저들 무리들의 우매하고 완악한 습성으로 보건대 틀림없이 홍주를 얕보고 공격할 계획을 세울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세우려 하고 하루살이가 나무를 흔들려는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대로 백치에서 유숙하였다.
이튿 날에 또 여러 친척과 자각봉(紫閣峰)에 올라 손을 이마에 얹고 홍주를 바라보니, 총성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연기와 화염은 하늘을 뒤덮었으며 살기가 온 천지에 가득 찼다. 오늘 이후로 우리들의 생명은 모두 홍주 전투의 승리에 달려 있었다. 이른바 비류들은 비록 수만 명이라고 하지만 무기도 변변찮은 데다 싸울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걱정할 것은 못되었으나 혹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는 이치도 있으니 어찌 속으로 걱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홍주 전투의 진행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는데 부근 동네에 사는 비류 몇 놈이 큰칼을 차고 산꼭대기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니 틀림없이 홍주에서 도망쳐온 자들이었다. 오후에 또 한 놈이 총과 망태기를 지고 면천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와서 우리들 옆에 앉았다. 그의 기색을 살펴보니 별로 생기가 나지 않았다. 이 자도 역시 홍주에서 도망쳐온 졸개임에 틀림없었다.
화산의 강명보(姜明甫)가 그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를 여러 차례 설명하여 결국 총과 망태기를 빼앗고 위협하여 쫓아 보내자 그 놈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것으로 추측해 본다면 이자는 틀림없이 홍주에서 도망쳐온 자였다. 그리고 그자가 도망쳐와 이처럼 기세가 움츠러들었으니 홍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어찌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 후에 들으니 과연 승리하였다. 어찌 한 나라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미에서 병정이 퇴각한 것과 김덕경이 전사한 것은 비류들의 미끼였으며 홍주는 바로 비류들의 낚시바늘이었다. 비류들이 바로 홍주로 들어갔기 때문에 쉽게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천운이었다. 비류들로서는 이것이 어찌 장작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격이 아니겠는가?
그 이후로 홍영(洪營)의 관문 신칙에 따라 열읍의 각 도로에 유막을 설치하고 각 마을에 유회를 개설하였으며, 유소(儒所)에서 거괴들과 특별히 못살게 한 자들을 적발하여 묶어서 유막으로 보내고 이어 홍영으로 압송하여 왕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 이후로 왕법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민심이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홍주에서 동적을 격파한 이후 또 서산·해미·태안에 유막을 설치하고 거괴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으며 위협에 못 이겨 따라다닌 죄 없는 자들은 모두 죄명을 씻어주었다. 이는 바로 우두머리는 처형하고 추종자들은 풀어주는 도리였다. 그리고 전에 비류들에게 잃어버린 물건은 일체 되돌려 받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도리였다. 또 동학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표(儒標)를 한 장씩 나누어주어 길을 왕래하는 도중에 화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는 은혜를 베풀고 널리 구제하는 도리였다.
전에 길을 다니던 사람들은 만약 적도들의 표(標)가 없으면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도 유표가 없으면 역시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으니 이는 입장이 뒤바뀐 이치였다.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동학을 믿는다고 하다가,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동학을 믿지 않는다고 하니 이는 염량세태(炎凉世態)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세상인심이 여기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서산·해미·태안에서 죄인들을 묶어서 유막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날마다 파다하게 퍼졌으며 홍영 근처에 비류들의 유해가 산더미처럼 쌓여 악취가 코를 찌른다고 하였다. 저 홍영은 비류들의 저승이었다. 유막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 길을 다니기가 지난날보다 더욱 어려웠으니 난세의 변화를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친구 이성실(李聖實)도 잘못하여 유막에 붙들려서 봉곡막(鳳谷幕)까지 압송되었다가 다행히 그의 일족인 도장(都長)을 만나 간신히 화를 면하였으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김감찰이란 놈과 이건성도 처형을 당하였다고 하니 매우 통쾌하였다. 창구가 처형된 뒤로 다시 농보에 유회를 개설하여 응봉(鷹峰)·원봉(圓峰)과 서로 표리를 이루어 호응하였다. 태안에서는 한장리(韓璋履)가 앞장서서 유회를 개설하여 비류들을 남김없이 모조리 처벌하였다. 여미에는 또 서산과 해미의 도소(都所)가 개설되었다. 윤선직(尹善稷)은 지난날에 적괴였는데 지금은 유소의 도장이 되었으니 이것이 민가에서 이야기하는 “떡은 안팎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밤에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살펴보니 사방 유막의 불빛이 토끼굴 같이 늘어서서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었으니 또한 일대 장관이었다. 동학은 유도(儒道)로 망한다는 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초가을에, “갑오년 90일 동안 살기가 가득하니, 검은색을 숭상하는 자는 죽고 문을 아끼는 자는 살았다. 어떻게 그대와 해를 맞이할까?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화초뿐이다”라는 두 구절의 비결이 유행하였는데 이 또한 부절을 맞추듯이 잘 들어맞았다.
안성군수 성하영(成夏永),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 이규태(李圭泰), 맹영재(孟英在)는 모두 서로 연이어 의병을 일으켜서 이곳저곳에서 비류들을 공격하여 초멸시킴으로써 일국의 적도들을 뒤흔들어 싹을 잘라버렸으니 어찌 조야의 큰 복이 아니었겠는가.
며칠 후에 마수동으로 가니 여러 집안들은 화란 중에서도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서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공림댁은 절반은 중촌에 머물러 있고 절반은 서산으로 들어가서 아직 모두 모이지 못하였다. 공립(公立) 형제는 경기(京畿)로 피난을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가락댁 아저씨가 지난달 26일에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슬프고 텅 빈 듯하였다. 그런데 상주가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공립은 과연 그 날짜에 돌아왔다. 이것은 천륜으로 길러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에게 발상(發喪)과 성복(成服)을 하라고 시키고 도회장(都會長)의 표지(標紙)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흑석 뒷 봉우리의 유막에 이르러서 무뢰배들을 만나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서 백치에 머물렀다. 난리를 겪은 후라 구가(九街)와 개리(開里) 두 곳의 소식을 탐문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막으로 가로 막혀 임의로 통행할 수 없어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농보성에 가서 그 일행들을 따라 왕래하고자 하여 먼저 한호로 갔다.
한호에 있는 며느리는 친정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었으며 여러 친구들도 모두 평안하였으니 다행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난리를 겪은 뒤에 친척이나 친구들이나 놀라 겁을 먹고 고생한 것은 피차가 일반이었다. 다만 무사히 화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귀서 형과 함께 농보로 가니 진사 윤예경(尹禮卿) 형과 그의 아들 및 친구 조사문(趙士文) 형제가 와서 머물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새로 만난 것처럼 서로 반갑게 맞이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옛 고향친구여서 더욱 반가웠다. 이들과 함께 오사(梧寺) 이감역(李監役)의 집으로 들어가서 요기를 한 다음 보장(堡長) 김문초(金文初), 이문옥, 친구 윤예경, 친구 조사문, 홍치면(洪致勉)과 함께 홍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연로의 수막(守幕)에서 동정을 살피고 트집을 잡는 것이 순라꾼들이 사람을 잡는 것보다 정도가 심하였다. 만약 믿을 만한 구석이 없으면 낯선 곳에서는 나다닐 수가 없었다. 초경이 지나서 어렵사리 마수동에 도착하여 나는 공립의 집으로 들어가고 여러 친구 일행은 응봉에 들어가서 잤다. 다시 생각해보니 보장과 함께 홍주로 가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틀림없이 그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홍주읍을 지나야 하므로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삼가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수동에서 며칠 머물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동적(東賊)들에게 잃어버린 물건들을 절대로 되돌려 받지 말라는 뜻으로 관의 지시가 내려 이를 엄금하였으나 도처에서 잃은 물건들을 되찾는 일로 소문이 파다하였다. 나도 피난을 나올 때에 여미 금옥(金玉)의 집에서 욕을 당한 일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후에 처음 당하는 욕이었으니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당장 설욕을 하고 물건들을 돌려받아야 했으나 나는 그것들을 돌려받고 설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물건을 돌려받는 것을 보니, 이른바 비류들은 그들의 죄가 크고 행동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돌려받는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오히려 욕설을 퍼부으며 소란을 피웠다. 이는 죄에다 또 죄를 더하는 것이며 미움에다 또 미움를 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확실하게 안정된 시대가 아니어서 후일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만약 지혜롭게 멀리 생각한다면 결코 복수를 하거나 물건을 돌려받아서는 안된다.
이른바 비류들은 죽다가 살아났으며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가 가까이 있으므로 그것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갈수록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단지 입으로 주문만 외지 않았을 뿐, 원한을 품은 것은 못된 짓을 하고 다닐 때보다 더 심하였다. 만약 경장(更張)의 교화가 없다면 이들의 버릇을 바로잡기는 힘들 것이다.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이러한 사태를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치욕을 갚고 물건을 되찾으려 한다면 이는 곧이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며 스스로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이라고 자신을 책망하고 면려하였다.
치면은 홍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형님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먼저 겉봉을 보니 ‘평신(平信), 무사한 소식’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큰 난리를 갓 겪은 뒤에 비록 만금이 있다하더라도 어찌 이 ‘평(平0’ 자를 돈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또 편지의 사연을 읽으니, 비류들이 기포할 때 저들 무리들에게 붙들려가서 며칠 동안 해읍(海邑)의 진중(陣中)에서 곤욕을 치르다가 온갖 방법으로 애걸하여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석교로 가서 이단하·이도은(李陶隱) 숙질과 함께 난리를 겪었으며, 유막으로 길이 막혔기 때문에 홍영(洪營)의 공문(公文)을 얻어서 지니고 지금 겨우 본댁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즉시 가서 배알하고 싶지만 유막으로 길이 막혔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 없으니 혼자서 답답하고 죄송할 뿐이었다.
치면과 함께 한호로 가니 며느리는 그런대로 편안하여 다행이었다. 그리고 친구 이광운(李光運)과 덕인(德仁) 두 형님이 각각 벼 10말 씩을 나에게 베풀어주었다. 이는 뜻밖의 일이었다. 옛날에는 혹 가난한 친구나 빈궁한 일족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경우가 있었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그런 의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이 두 친구는 나에게는 범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의 맥주(麥舟)의 의리가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초보은해야 할 은혜를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아울러 강찬옥이 소를 보내주어서 그것을 실어올 수 있었다. 이것으로 올해 양식은 충분하였으니 매우 다행이었다.
친구들이 간곡히 권하기도 하였지만 난리를 다 겪었으며 즉시 서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뜨거운 국에 데인 자가 부추도 불어서 먹듯이 돌아갈 생각은 십분의 일도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니 우선 급한 것이 밥솥 등속이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유성문·전중원(田仲元)·강화신(姜化信)과 친구 홍치면에게 간청하여 함께 공암으로 갔다. 승전과 여미의 전장터에 도착하니 비린내가 여전히 코를 진동하였으며 산천은 황량하였다. 길옆의 집들은 태반이 불에 탔으며 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광경을 보니 서글퍼졌다.
먼저 신기의 친척 안씨(安氏) 집에 들어가서 족숙 선경(善卿)씨와 족제 울진(蔚珍) 형제를 만났다. 피차 난리를 겪은 뒤였으니 기쁨이 어떠하였겠는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 석천으로 갔다. 전(田)·유(兪)·강(姜) 세 사람과 치면은 정수길(鄭壽吉)의 집에 가서 자고 나는 원집(元楫)의 처소에 가서 묶었다. 전·유·강 세 사람은 수길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는 치면과 함께 원집의 처소에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성하영이 전녹두를 공주(公州) 우금령(牛禁嶺)에서 격파하고 오늘 병정 300명을 인솔하여 막 서산에 부임하였다.
그래서 신관(新官)과 병정들을 먹이기 위하여 어젯밤에 석천에서 소를 잡아서 술과 고기가 푸짐하였다. 나도 몇 달 동안 배를 주린 터라 배불리 먹고 취한 뒤에 솥과 벼를 가지러 공암에 갔더니 삼세(三稅)로 트집을 잡아 전부 억류하여 빼앗아 갔으니 이는 적몰(籍沒)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온갖 욕설과 험담을 퍼부으며 유막에서 행패를 부리기에 이르렀으니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끝내 가져올 수가 없었다. 같은 골육간의 의리는 고사하고 비록 평범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피차 난리를 겪은 뒤에 서로 아껴주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찌 이러한 변괴가 있단 말인가. 이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일이며 평생토록 뼈에 새겨 잊지 못할 일이었다.
헛걸음을 한 전·유·강 세 사람은 먼저 보냈다. 나는 치면과 함께 다시 동산(東山) 김치운(金致雲)의 집으로 가서 김감찰의 아들을 불러놓고 도둑질해 간 농작물을 추심하였다. 마땅히 일일이 돌려받아야 되지만 그의 아비가 죄를 범하여 이미 처형되었으며 또 지난날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공짜로 얻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포용하는 도리에서 그가 요청하는 바에 따라 절반으로 줄여주고 바로잡았으니 어찌 암흑 같은 세상에서 선을 쌓고 덕을 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매우 궁지에 몰린 적은 추격하지 않는 도리이며 남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남을 저버리지 않는 도리이다. 돌려받은 물건들은 모두 김치운의 집에 맡겨두고 나는 치면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여미 이선전(李宣傳)의 집에 들어가서 유숙하였다.
/> 이튿 날에 당진읍에 도착하여 치면과 헤어졌다. 지나는 길에 친구 윤희중(尹喜仲)의 집을 방문하고, 저녁에 한호의 이씨(李氏) 사돈댁에 도착하여 잤다.
이튿 날에 집으로 돌아오니 동아(東兒)는 아무런 까닭 없이 어제 저녁에 병이 나서 누웠다. 그 모습을 보니 매우 답답하고 딱하였다. 그런데 사기(邪氣)가 끼인 것 같아서 중덕(仲德)을 불러다가 사기를 막았다. 며칠이 지나서 증세를 살펴보았더니 더하기도 하다가 덜하기도 하며 전혀 먹고 마시지를 못하는 것이 병세가 가볍지 않아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림의 친구 김씨의 집에 가서 생밤 한 되를 얻어 와서 구워 주었다. 그런데 반찬거리라고는 도무지 젓가락 갈 데가 없었으니 일마다 궁색하였다. 그리고서 4~5일이 지나자 병세가 조금 호전되었으니 그 기쁨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이번에는 집사람이 갑자기 아무 까닭 없이 병이 들어 누웠으니 수족이 묶였다고 할 수 있었다. 본인은 난리를 겪은 후에 차가운 구들에서 고생을 하여 독감이 든 것이라고 하면서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 그 증세를 살펴보면 오한과 발열이 번갈아 들며 전혀 먹지를 못하고 갈수로 더욱 심해졌으며 식은 땀까지 났다. 그래서 혹 기가 허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 의심이 되어 닭기름을 먹였으나 전혀 효험이 없어 참으로 매우 답답하였다. 그래서 약으로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현재 객지에 있어서 수응(酬應)할 사람이 없는 데다 돈도 부족하였으니 어떻게 외상으로 약을 짓겠는가. 부득이하여 강공술(姜公述)에게 간청하여 집의 아이와 함께 사기소(沙器所)의 서국(徐局), 서씨의 약국으로 보내어 약 2첩을 지어서 썼다. 그러나 병세를 살펴보니 더 심해져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 약을 쓰고 싶었으나 빈손이라 더 이상 약을 지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흑석에 가서 오의(吳宜)에게 병의 증세를 이야기하고 처방만 받고 빈손이어서 약을 짓지 못하고 왔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겠는가. 생각다 못하여 약을 지어서 보내라는 뜻으로 처방전과 함께 사람을 마수동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약재가 부족하여 약값 2냥과 인삼 3뿌리를 보내왔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약을 지어서 썼으나 또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다시 삼계음(蔘鷄飮), 삼계탕을 썼으나 역시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다만 한 가닥 실낱같은 목숨만 남았으며 병의 뿌리는 이미 원위(源委)까지 깊이 들어갔으니 낫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나의 운수와 처지를 헤아려보면 결국은 상처(喪妻)를 해야 끝날 것 같았다. 어찌 이러한 재앙이 있단 말인가.
며칠이 지난 뒤에 다시 동아(東兒)가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으니 이는 설상가상이었다. 그는 또 먹지를 못하였으며 찾는 것이라고는 생밤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동림으로 가서 생밤을 얻어 와서 구워주었다. 비록 가업을 이어받아 호화롭게 살던 사람이라도 조그마한 요구를 들어주기가 매우 어려운데 하물며 객지를 떠도는 나와 같은 빈털터리야 말할 것이 있었겠는가. 이들의 병세가 호전된 것은 고사하고 며칠 뒤에는 딸아이가 또 병이 들어 누웠다. 얼음처럼 차가운 반 칸짜리 방에서 환자 3사람이 누워있어 더 이상 용신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기름도 없어서 간병할 방도가 없었다. 백치의 여러 집에서 기름과 반찬 등을 보내주어 간병의 용도로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아비는 물을 긷고 아들은 땔감을 메면서 구차하게 간병을 하였다. 며칠 후에는 집의 아이가 또 병으로 누웠다. 실로 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정말로 미쳐버리고 싶었다.
마수동에 가서 2냥을 꾸어 와서 아호의 심국(沈局), 심씨의 약국에 들러 약을 지어 환자에게 먹였으나 조금도 효험이 없었다. 집의 아이의 병세는 기가 허하여 그렇게 된 듯하였다. 그래서 닭 1마리와 황기(黃芪) 1냥을 달여서 먹였는데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였으나 실로 버티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본래 부잣집의 자식으로 우리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박복한 탓에 2살과 10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큰형님과 둘째형님에게 의지하며 성장하였다. 부모님을 여읜 몸으로 생산에 종사하였다. 그래서 비록 청빈하다고는 하였지만 의복은 남루하게 입지 않았고 식사는 푸성귀만을 먹지는 않았으며 잠시나마 곤궁하였던 적이 없었다.
금년 7월 이후로 쫓겨서 피난을 다니는 재앙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앓는 병이므로 홀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난리를 겪은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잠시 눈 돌릴 틈도 없이 계속 우환을 겪은 사람은 틀림없이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이다. 온 식구들의 병세는 며칠이 지나도 별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았으나 집사람은 전에 비하여 조금 약화되어 다행이었다. 황곡(黃谷)댁에서 닭 1마리를 얻어 와서 황기 5돈을 넣고 달여서 집의 아이에게 먹였다. 며칠 뒤에 집사람 세 모자(母子)는 다행히도 차례대로 병이 나아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딸아이만은 계속 차도를 보이지 않아 보기에 매우 답답하고 가련하였다.
성룡(成龍)이 한정의 강성건(姜成建)과 정혼을 하였는데, 이틀 뒤가 잔칫날이었으며 우례(于禮)도 함께 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곁방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잔칫날에 맞추어 변통할 수 있어야 새색시가 들어와서 살 방을 마련할 수 있으므로 나에게 거처를 옮겨달라고 하였다. 이는 진퇴양난의 일이었다. 어찌 이러한 답답한 사정이 있단 말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으나 나가는 것 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전중필(田仲弼)에게 가서 간청하여 그의 곁방을 얻었다. 그리고 또 초계댁의 가마와 가마꾼을 구하여 남매를 싣고, 또 병든 아내와 자식을 부축하여 추위를 무릅쓰고 화산 뒤 고개를 넘었다.
나 자신의 곤궁한 신세를 돌아보자 까닭없이 두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솟아나고 쓸데없는 못된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혀 실로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어렵사리 중필의 집에 도착하여 여러 환자들을 부축하여 온돌 위에 눕혔다. 따뜻한 방구들과 환한 창과 문이 오히려 유동보다 나았다. 7월 이후에 이리저리 떠돌며 온갖 고생을 겪었지만 어찌 이렇게 극한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아이들은 찬바람을 쐬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모두 다시 드러누웠으니 안타깝고 답답하였다. 그리고 세밑이 멀지 않았는데 남의 집에 있으니 불안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아이들의 병은 차차 차도를 보였으나 원기를 회복시켜 완전히 낫게 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어떻게 하겠는가.
이튿 날에 성룡을 데리고 한정으로 가서 근례(巹禮)를 치르고 돌아왔다. 나는 황곡댁에서 숙식을 하였으나 다만 땔감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도처의 유소에서 지킨다는 소문이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래서 친척 형 만원(萬源)씨와 함께 교동 윤도사(尹都事) 집으로 갔더니 사매(舍妹)는 아무 탈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집도 역시 안팎의 가옥과 문들이 모두 동비의 난에 파괴되어 지금은 소실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니 그 궁색한 모습에 대신 괴로워하였다.
이튿 날 만원씨는 홍주로 가고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룡동(小龍洞)의 도사와 감찰 집에 사람을 보내어 장과 김치를 얻어 왔다. 이는 걸인의 모습이나 다름없었으니 우스운 노릇이었다. 한호의 여러 친구들이 며칠 동안 내방하여 [결락] 서산 수령이 부임한 뒤에 죄를 지은 놈들을 잡아다가 모두 처벌하였다고 하니 통쾌하였다.
어느 덧 섣달 그믐이 되니 좋은 감정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 편히 보낼 수가 없었다. 정월 초 6일에 마수동의 성도(聖道)가 모친상을 당하였다는 부음이 도착하였다. 그래서 가서 조문을 하고 성복한 뒤에 중촌의 공림댁으로 갔다. 공림댁이 새로 차린 살림의 고생스런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친구 이공숙(李公叔)도 동비에게 쫓겨서 작년 가을부터 중촌에 우거하였으며, 친구 이주백(李周伯)도 작년 가을 이후 전곶(前串)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재중숙부님과 함께 주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저녁 밥을 먹고 공림댁으로 돌아와서 잤다.
이튿 날에 집으로 돌아왔다. 근래에 들으니 홍주에서 비로소 군진[五陣]을 파하고 수막(守幕)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 10일에 구가로 가니 형님의 근력은 별탈이 없으시고 가내는 무고하여 매우 다행이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문 뒤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소동(昭洞) 판서(判書)댁에 들렀더니 족숙 참봉어른도 집에 계셨다. 그간의 겪은 일들을 들으니 작년 가을에 서울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도중에 비류들을 만나서 커다란 곤욕을 치른 후 개규동의 조카 집으로 들어가서 함께 화란을 겪었으며, 난리가 잠잠해진 뒤에 홍주를 왕복하는 관례(官隷)가 나와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마침 족제인 진사 천궁(泉宮)이 와서 만났다. 숙질의 간곡한 만류로 밤이 새도록 고기와 떡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닭이 운 뒤에 잠이 들었다.
이튿 날 아침에도 전골, 고깃국, 갈비구이가 나왔으니 고기의 산이요 포(脯)의 숲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의 주린 배로 실컷 먹었으니 어찌 푸성귀만 먹은 속을 고기로 더럽힌 근심이 없겠는가. 식사 후에 길을 떠나 돌아오다가 교동에 들러서 잤다.
이튿 날에 조판윤(趙判尹) 어른을 배알하였다. 또 이단하·이도은 숙질을 방문하였으며, 어두워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내가 무고하여 다행이었으나 또 양식이 떨어져서 걱정이었다. 뜻밖에 마수동에서 반찬과 쌀 3말을 보내주어 그럭저럭 며칠을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일은 높은 누각 위에 버려두고 백치에 오두막이나마 하나 구입하여 그럭저럭 지낼 계획이었으나 수중에 돈이 없었으니 한갓 헛된 생각일 뿐이었다. 이는 늙은 천리마가 구유에 엎드려 있지만 뜻은 천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 번을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하여 3월 10일 옛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윤일씨가 상을 당한데다 또 그 집의 하인이 찾아왔기 때문에 딸아이는 백치에 남겨두고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다시 옛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을 나가 있던 기간은 전후하여 총 9개월이었다. 그간에 겪은 즐겁고 괴로운 이야기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만 하고 그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 채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곧 지각이 없는 목석과 같으니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 나를 도와준 자는 사돈 이씨와 귀서 형이었고, 마지막에 나를 도와준 자는 전중필이었다. 아무 일이 없는 평소에 한 마디 말로써 보살펴주더라도 잊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난세에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줄곧 도와주었던 경우라면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집에 들어가서 점검하니 집안은 공허하였다. 몇 달 동안 이리저리 뒹군 뒤의 그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에 손을 대어 보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솥 등은 열에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새로 살림을 시작하는 어려움은 [결락] 답답한 가슴도 다시 펼 방도가 없었다.
[결락] 갑오년 7월부터 을미년 3월까지 아홉 달 동안 내가 겪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그러나 글로 쓴 것이 말이 안될 뿐만 아니라 구애되는 말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