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4월 [甲午四月]
승지(承旨) 이승우(李勝宇)를 홍주목사(洪州牧使)로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命)을 받들었다. 이때에 호남의 난민이 동학(東學)을 빙자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해서 여러 고을이 소란스러웠다. 홍주도 민요(民擾)가 있었다가 겨우 진정되었으나 여러 해 동안 정공(正供)은 모두 포수(逋藪)가 되었고 온갖 폐단이 생겨서 다스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이승우를 특별히 천거하여 홍주를 맡긴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이공(李公), 이승우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서 나를 불렀는데, 마침 고향집에서 병으로 누워있어 일어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모두 가도록 권하며 말하기를, “화병으로 인한 병은 울적함을 풀어버리면 나을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6일 [十六日]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여 어천(漁川)에 이르러 하룻밤 묵었다.
17일 [十七日]
오후에 성(城), 한양으로 들어갔다.
18일 [十八日]
회동(會洞)에 머물렀다.
19일 [十九日]
회동에 머물렀다.
20일 [二十日]
주공(主公), 이승우이 먼저 남문(南門) 밖에 나가서 머물렀다.
21일 [二十一日]
주공을 쫓아 출발하여 과천(果川)의 갈산점(葛山店)에 이르렀는데, 신영(新迎)하는 관속(官屬)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수원(水原) 남문 밖에 이르러서 유숙(留宿)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진위현(振威縣)에서 점심을 먹고,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아산(牙山)의 곡교시(曲橋市)에서 점심을 먹고, 대흥군(大興郡)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4일 [二十四日]
홍주에 도착하였다.
29일 [二十九日]
주공이 충청감영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