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6일 [五月初六日]
남양(南陽)에 심부름꾼을 보내고, 주공은 관아로 돌아왔다.
초 7일 [初七日]
조정에서 호비(湖匪), 호남의 비도를 걱정거리로 생각하여 청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니 청국이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해 가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참판(參判) 이중하(李重夏)를 영접사(迎接使)로 삼아 제독을 안내하게 하였는데, 제독이 마침 아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물길이 홍성의 내도(內島)와 통해 있었기 때문에 영접사가 도착한 뒤, 바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려왔다. 주공이 편지를 받고서는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주공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공이 내도에 도착하니 영접사는 먼저 아산으로 출발하였고, 청국이 다시 원수(元帥) 섭사성(聶士成)을 보내와서 모두 아산의 백석포(白石浦)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주공에게 답장을 하고, 시(詩) 1수(首)를 영접사에게 함께 바쳤다.
초 10일 [初十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와서 전주(全州)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남의 비괴(匪魁) 전봉준(全琫俊), 俊은 準의 오기이 무리를 모아 날로 기세가 드세져서 여러 고을의 군기를 빼앗고 전주에 이르렀다.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은 겁을 먹고 밤에 도망하였고,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관망을 하였으며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여산(礪山)에 있으면서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전적(全賊), 전봉준이 이에 완성(完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니, 적이 전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12일 [十二日]
내도에서 보고가 왔다. 그 보고에 의하면, “청국군함이 계속 정박하면서 지주(地主), 홍주목사를 보기 원한다”라고 하여, 주공이 바로 출발하였다.
14일 [十四日]
영접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전에 보낸 시(詩)에 화답을 하였다.
17일 [十七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