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막내 아우로 하여금 한양에 올라가게 하였으나 감히 편지를 하지 못하고 구두(口頭)로 승선(承宣) 송언회(宋彦會)에게 보고하였다. 대략 홍주 관아의 소식과 내가 집에 돌아온 연유를 전하였고, 한양의 최근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막내 아우가 내려와서 송승선(宋承宣), 송언회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막 홍주를 향하여 돌아가려고 어머니에게 거취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괘념치 말라. 충절(忠節)을 다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신하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 옳다. 비록 가지고 있는 직함은 없더라도 이미 외람되게 벼슬을 했으니 평민과는 다르다. 또한 홍주목사가 너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덕하니 정의(情誼)상 무시하기가 어렵다. 너는 가서 함께 주선하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명(命)을 받들고 물러나서 배를 재촉하여 돌아왔다. 밤에 바다위에서 묵었다.
초 4일 [初四日]
일찍 내도에 정박했는데, 섬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 흩어져서 그 형편이 참담하였다. 며칠사이에 사람의 일이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하였기에 찾아가서 일의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지난 달 27일에 청나라 군대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소사(素沙)와 성환에서 패하였으며, 패잔군이 여러 고을에 흩어졌고 또한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이 모두 풍학(風鶴)처럼 움직였으며 여러 날이 지나도 진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배에서 내려 걸어서 고생을 하여 신천 이금초(李錦樵)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덕산 대천(大川) 장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홍주에 들어가니 주공이 손을 잡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별한 뒤의 전투 상황을 말하고 더욱이 그 날에 맹서한 글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고립된 성(城)은 방비가 없어 앉아서 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적의 칼날에 치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의(義)를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순영(巡營), 감영 인편에 영접사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그 편지에서 전하기를, “지난날에 성환에서 패하였으나 다행히 모면하여 지금 조정에 돌아왔다. 청나라 병사들이 청주(淸州)를 거쳐 관동(關東)을 돌아 토산(兎山)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주공이 병요(兵擾)를 겪은 뒤에 음우(陰雨)을 매우 걱정하여 장리(將吏)를 통솔해서 성첩(城堞)을 견고하게 수축하고 화포와 창을 수리하였다. 김병돈(金秉暾)을 중군(中軍)으로, 한응준(韓應俊)을 참모로 삼아 성(城)아래 병정(兵丁)을 훈련시켜 미리 대비하는 방책을 세웠다.
이 날 순영에 갔다.
초 7일 [初七日]
내가 빈 관아에 있었는데, 밤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 시끄러운 것이 파리(巴俚)같기도 하고 무당이 외우는 것 같았다. 시장 거리에서부터 성 밖의 교외(郊外)까지 가득하여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밤새 끊이지 않아 괴이하여 시동(侍童)에게 물어보았더니, 시동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동학이 주문을 외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밤마다 점점 더해져서 이교(吏校)와 노령(奴令) 같은 것들도 감염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시 외촌(外村)에서 전해온 것을 들어보니, 난도(亂徒)가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를 불러 모아 패악을 자행하였는데,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남의 말과 가축을 빼앗았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감히 금하지 못하였고, 돈을 빌려준 자는 감히 돈을 돌려받지 못하였으며,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을 당하였다. 그 기세가 더욱 대단해져서 종이 주인을 범하고 아전이 관장(官長)을 핍박하며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능멸하고 수절(守節)하는 과부와 혼기(婚期)가 찬 규수를 겁탈하려 했다고 한다. 허다한 변고를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초 9일 [初九日]
우연히 동쪽 문루(門樓)에 올랐다가 마침 패류(悖類)가 시가(市街)를 제멋대로 다니며 공사(公私)간의 말과 노새를 빼앗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피하고 감히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임(時任) 병교(兵校) 김순흥(金順興)이 그들의 협박 때문에 그만두었는데, 매우 통탄스럽다.
12일 [十二日]
주공이 관아에 돌아와서 길을 가다가 겪은 것을 하소연하였다. 돌아올 적에 공주(公州) 동천점(銅川店)에 이르렀는데, 무리들이 1쌍의 푸른 깃발을 나부끼며 갑자기 다가와서는 몰고 가던 말 3필을 빼앗아 갔다. 그들을 불러서 물어보기를, “너희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도인(道人)으로 접주(接主)의 명령으로 왔다”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희 접주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더니, 저들이 두메산골 한 곳을 가리키며 “저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수레를 몰아가서 보니 산의 중턱에 병풍과 장막을 치고 위에는 6~7명의 두령(頭領)이 앉아있었고 아래에는 수 십명의 무리들이[嘍囉] 둘러싸고 있었다. 공이 수레에서 내려 자리로 가서 일일이 성명을 묻고 나서 질문하기를, “내가 지금 온 것은 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마디 말로 서로 분별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들어보아라. 그대들이 말하는 도를 나는 무슨 도인지 알지 못하나 그 도를 들어보니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화거의(斥和擧義)라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하였더니, “그렇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말이 어긋나는가? 지금 그대 무리들이 하는 짓은 악행이 아닌 것이 없다. 마을이 소란스러워서 백성이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할 수 없고 군읍(郡邑)이 어지러워서 관아에서 그 영(令)을 시행할 수가 없다.
조정의 명리(命吏)는 곤욕을 당하고, 길 가는 상인들은 길이 막혀 있으니, 이것이 보국안민이란 말인가? 거의척화라는 얘기는 이치에 어긋남이 더욱 심하다. 만약 의(義)를 내세워야만 하는 시기를 만나 바른 명분을 세웠다면 식량과 마필(馬匹) 등은 격문 하나 만으로도 몰려들 것이다. 지금 당장 내세울만한 의가 없이 명분 없는 의를 빌려 불의한 일만을 행하였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만약 불의한 죄를 들어 불의한 형벌을 시행한다면 그대들은 장차 어떤 말로 스스로를 변명하겠는가? 그대들은 생각해 보아라. 내가 지금 길을 가는데 말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차 순영에 글을 써서 보고하여 말을 빌려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리를 떠나 편지를 써서 봉(封)하고 떠나려하니 사람들이 제법 동요하는 기색이 있었다. 서로 돌아보며 의논한 뒤에 말을 돌려주고 화해를 권하며 가게 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곤경을 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주공이 관아를 비었을 적에 내가 눈앞에서 본 것을 적어서 보고하고 바로 일어나 그의 손을 끌어 취은루(醉恩樓)의 난간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공은 들어보십시오. 성 안팎에서 개구리가 울고 매미가 우는 소리는 모두 지기시천(至氣侍天)의 주문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탄식하고 배회하다가 망루로 내려가 앉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견해로는 어떻게 다스려야 가능하겠는가? 지금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 일개 주(州)의 목사로 와서 포악을 금지하고 난리를 그치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바로 일을 그르치고 직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송구스럽지 않겠는가? 그대는 생각해보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공이 하신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하게 하나 지금 인심은 흩어지고 세도(世道)는 음험하게 성하여 사류(邪類)가 태동하자 많은 무리들이 따라 일어나서 마치 맹렬한 불과 스며드는 물과 같습니다. 향리(鄕里)에는 정도(正道)를 지키는 선비가 없고 군현(郡縣)에는 법을 세우는 관장(官長)이 없는데, 공께서 어찌 홀로 서서 한손으로 물결을 막고 외로운 등불로 어둠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문정(門庭), 관아의 추종하는 무리들이 조금도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우리의 명령만을 따르게 하여, 물과 불을 사양하지 않게 한 뒤에야 비로소 위엄을 펴고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읍의 관속들 가운데 절반은 이미 동학에 감염되었고 며칠 안에 저들에게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하루속히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조정의 명리로서 한 곳의 난도도 금지하지 못한 채 지금 스스로 물러난다면 위로는 임금께서 맡기신 명(命)을 받들지 못하고, 아래로는 나약하고 못났다는 질책을 견딜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성 아래의 관원과 백성이 비록 동학에 감염되었다고 해도 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뉘우치는 것도 반드시 쉬울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저들 무리에 들어간 것은 어리석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인도하여 교화로 향하게 하면 될 것이니, 어찌 그 방법이 없겠는가? 그대는 깊이 생각해보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혹시 마음을 돌려 우리 쪽으로 오기를 바라지만, 부족한 것은 재물과 곡식입니다. 지금 이곳 읍속들 가운데 먼저 오염된 자들은 모두 포흠(逋欠)을 짊어진 아전들과 급료가 없는 교졸(校卒)들입니다. 만약 그 양식과 급료를 넉넉하게 주어 눈앞의 먹을 것을 위해 그 포흠을 받아내는 것을 늦추어주고 훗날에 탕감해 준다는 뜻을 보인다면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공께서는 이를 어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바로 내 마음과 일치한다. 어찌 재물과 곡식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지금 세금을 낼 돈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수 만냥을 내려가지 않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환자미(還上米) 또한 1,000여 석이 넘는다. 내가 나라의 재물을 나랏일에 쓰는데, 어찌 죄를 짓는 이유가 되겠는가?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그대는 잠자리에 들라”고 하였다.
13일 [十三日]
주공이 일찍 일어나서 관아를 열고 진(鎭)과 부(府)의 관속들을 모두 불러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이른바 지금의 동학은 분명히 기강과 본분을 범한 무리로서 왕법(王法)에 따라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너희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동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나는 너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너희들 가운데 남을 속이는 짓거리를 즐기고자 하거나, 괴이하게도 죽을 때까지 그러한 행동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은 나 또한 어찌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좋아하는 것을 좇아 각자 돌아가라.
만약 이성(彝性)이 없어지지 않아 처음에 비록 잠시 미혹되었다고 해도 지금 바로 뉘우친다면 나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스스로 거듭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너희들은 숨김없이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동서(東西)로 나뉘어 서라”고 하였다.
명령을 서너 차례 내리니 아전과 관노(官奴) 및 사령(使令) 등이 모두 엎드려서 자수하여 말하기를, “소인(小人) 등이 저들에게 들어간 것은 정말로 그 도를 즐거워하고 그 행동을 동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공예(公隷)로서 포흠을 지고 있거나 원망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저 난도는 평소에 서로 관계가 없는 자가 없습니다. 명목이 없는 돈은 그 수효가 많다고 함부로 몽둥이질을 합니다. 사소한 원한도 조금이라도 반드시 비교하여 바로 곤욕을 가하여 명(命)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곤경을 막는 방법을 물었더니 모두 그 도를 배워 그 무리와 함께 한다면 바로 면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구차하게 그 이름을 빌려 잠시 그 화를 늦추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그들의 말을 듣고 용모를 보니 또한 불쌍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한 것은 정말로 진정에서 나왔다. 사람이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뉘우치는 것이 더욱 귀중하다. 너희들은 생각해 보거라. 비류(匪類)에게 이름을 의탁하여 법령을 범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돌려 교화하여 각기 본 업을 지키는 것만 같겠는가? 너희가 뜻밖의 재난을 겪으면 내가 보호해 줄 것이고 너희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하면 내가 구제할 것이다. 내가 지금 법제(法制)를 만들어 난류(亂類)를 뿌리 뽑을 것이다. 나의 지령을 너희는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마을에서 현명한 선비와 호걸들을 선출하여 인솔하게 하고, 진부(鎭府)에서 교졸 100여 명을 뽑아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환미(還米)와 봉하여 둔 세전(稅錢)을 내어 월급으로 주었다.
또한 성 아래 4 개 마을에 명하여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어 수상한 자를 정찰하고 근심과 어려운 일은 가서 서로 돕게 하였다. 창고를 열어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거리와 시장에 방(榜)을 내걸어 마을에 명령을 선포하여, 저들 가운데 패악을 행하는 자는 바로 잡아들이게 하였다. 만약 그 패거리들이 많아 잡기 어려우면 바로 달려와 보고하도록 일일이 조약을 정하였다.
14일 [十四日]
읍내의 백성들이 크게 나쁜 풍속을 바꾸었으나 여전히 옥출곤(玉出崑)과 서봉인(徐鳳仁)이란 자는 끝내 굽히지 않고 사류와 몰래 교류하며 늦은 밤에 주문을 암송하였다. 이에 엄중히 곤장을 치고 형구(刑具)를 씌워 가두었다.
15일 [十五日]
촌민들이 서로 다투어 난도를 결박하여 데려왔다. 난도 중에 힘이 세어 대적하지 못해서 도움을 청하는 보고가 있으면 바로 군졸을 보내 잡아들였다. 이교에게 명하여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었더라도 구애받지 말고 보고하며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지체하지 않도록 하였다.
16일 [十六日]
주공이 성 북쪽의 문루에 앉아 옥에 가둔 난도들을 북을 치며 시장을 돌게 하였다. 그 괴수는 엄중히 곤장을 쳐서 다시 형구를 씌워 가두었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조사하여 모두 풀어주니 시장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8일 [十八日]
이때부터 몽둥이질 하는 소리가 날마다 공정(公庭)을 시끄럽게 하였고, 기찰(譏察)하여 난도(亂徒)를 잡는 군졸이 도로에 이어졌다. 난도가 경내에 들어올 경우에는 바로 심문을 받았다. 그래서 저들 무리들의 동요가 날로 일어나서 성 전체를 유린하는 모습과 같았다. 관속 중에 혹시 의심을 품고 겁을 먹은 자들도 여유가 있고 진정이 되었다.
20일 [二十日]
조정에서 선무사(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호서(湖西)지역을 돌면서 비도(匪徒)를 잘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선무사의 행차가 공주에 도착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왔다. 바로 순사(巡使) 박제순(朴齊純)과 상의하여 임시방편의 정사로 비괴(匪魁) 최시형(崔時衡), 형(衡)은 형(亨)의 오기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있는 그들의 무리 중에서 뽑아 집강(執綱)의 직임을 주어 그들 중에 패악을 저지르는 자를 살피게 하였다. 이에 그 직임을 받은 자는 도리어 그것을 빙자하여 권력으로 여기고 더욱 교만해져 날뛰었다.
26일 [二十六日]
도사(都事) 이정우(李靖宇)가 조만승(曺萬承)을 압송하는 일 때문에 호남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가 겪은 동비의 소요를 듣자 매우 두려웠다.
30일 [三十日]
주공이 비도가 더욱 창궐한데 대비하는 병사가 너무 적은 것을 걱정하여 내게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 저들을 보면 비록 1,000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촌동네의 어리석은 백성들이고, 더욱이 그들이 가진 병기는 단지 여러 고을에서 빼앗은 파손된 총과 형편없는 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훈련시킨 병사 500명을 얻어 예리한 무기를 준다면 반드시 비도를 섬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500명의 정예병을 양성하려면 한 달에 훈련비용으로 거의 수 만냥의 재물이 들 것인데, 지금 읍의 형편상 어찌 조달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성 아래 민정(民丁)을 모집하여 날마다 조련하고, 저들에게 들어가지 않은 포군(砲軍)을 다시 뽑아 번(番)을 나누어 출입시켜 병가(兵家)의 선성(先聲)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형세를 보아 적을 상대한다면 반드시 이기지 못할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주공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