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6일 [初六日]
선무사가 홍주에 도착하여 경내에 있는 이른바 접주들을 불러 모으고 윤음(綸音)을 읽으며 잘 타일렀다. 이때 이름 있는 우두머리를 모두 적을 수 없으나 가장 유명한 자들은, 홍주의 김영필(金永弼)·정대철(丁大哲)·이한규(李漢奎)·정원갑(鄭元甲)·나성뢰(羅成蕾),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禮山)의 박덕칠(朴德七)·박도일(朴道一), 대흥(大興)의 유치교(兪致敎), 보령(保寧)의 이원백(李源百), 남포(藍浦)의 추용성(秋鏞成), 정산(定山)의 김기창(金基昌), 면천(沔川)의 이창구(李昌求)이다.그 가운데 이창구의 무리가 가장 많아서 50,000~60,000명이라고 하였다. 덕산의 한명보(韓明甫)와 한응고(韓應古) 형제는 매우 완강하여 전후(前後)에 걸쳐 잘 타일렀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공이 여러 차례 사람을 이창구에게 보내 한번 함께 볼 것을 요구했는데, 답장은 오만스러웠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초 7일 [初七日]
주공이 이번 소요를 맞아 백성에게 거두는 삼정(三政)과 같은 일은 관례에 따라 시행할 수가 없어 추등(秋等)에서 호포(戶布)를 줄여주는 것과 반료(頒料)에 기민(飢民)을 구제할 쌀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는 일로 선무사에게 논보(論報)하고 각 마을에 전령(傳令)을 보내 호포세를 경감해 준다는 뜻을 알렸다. 창고에 있던 돈 1,400여 냥을 내어 긴급한 용도에 대비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18일 [十八日]
주공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비요(匪擾)가 날로 심해져서 그것을 없앨 방법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참문(讖文)을 만들어 유포하면 저들을 교란시켜 저절로 해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난 괴이한 행동에 가깝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 계책은 매우 훌륭합니다. 병법(兵法) 장감선사편(將鑑選士篇)에 술사(術士) 2명과 무당의 속임수로 망령되게 귀신에 의지하여 적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것에 의지하여 실행한다고 해서 어찌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런데 이 계책을 빨리 실행해야 하는데 맡길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나를 위해 이 계책을 실행할 것이며, 조심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 곳에서 한다면 은밀하게 하지 못할 것 같으니 구실을 대고 한양에 올라가서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19일 [十九日]
태산(泰山)이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어머님이 편치 못한다는 소식이어서 바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막 떠나려고 할 때에 주공이 참문의 일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에 동문(東門) 밖에 나가보니 10리의 길에 행렬이 가득 이어졌는데 모두 비도들이었다. 어떤 이는 살찐 큰 말을 타고 제멋대로 달려서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고, 길을 걷는 자들은 팔을 흔들고 활보하여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매우 날뛰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상복(喪服)을 입고 큰 노새를 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큰 말을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짐을 실은 말 1필이 있었는데 돈을 가득 싣고 따르고 있었다. 그가 이창구라고 하는 자인데 지금 최적(崔賊), 최시형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예산 신례원(新禮院)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점포의 사내놈이 둘러앉아 주문(呪文)을 암송하였는데 밤새 그치지 않았다. 그 사내의 아녀자도 어지럽게 암송하면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사악한 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이와 같도다!
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신창읍(新昌邑)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부예(府隷), 하인가 한양에서 내려오다가 이도사(李都事), 이정우의 편지를 전하였다. 평택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동창진(東昌津)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떠났다. 안시(安市)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물녘에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의 병세가 그 사이에 이미 회복되어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23일 [二十三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당일 회동에 도착했다. 송영감과 참문을 유포하는 일을 상의하고 서로 보며 크게 웃었다.
그 참문에 의하면, “청마(靑馬)는 90에 살기(殺氣)가 많아 검은 것을 숭상하는 자는 죽는다. 옛날 문생(文生)은 어떠하였는가? 해가 나오니 지금 그대와 나아가지 못하고 풀꽃에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다시 출발하여 부곡(富谷)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집에 돌아와서 작은 조각의 나무를 가져다가 도장처럼 만들어 참문을 새겨 수천 장을 찍어내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2개의 길로 나누었다. 하나는 직산(稷山)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호서의 경계까지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강나루를 따라 호서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거쳐서 한산(韓山)과 서천(舒川)의 끝까지 가는 길이었다.
29일 [二十九日]
길을 떠나 학현(鶴峴)에 이르러 이청양(李靑陽)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30일 [三十日]
한강나루를 건너 이경(二更, 밤 9~11시) 쯤에 금초의 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