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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

경영(京營)의 군사와 일본군을 합한 200명이 예산에서 홍주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떠나갔다.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서 별다른 일이 없자 민심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저들은 더욱 거리낌이 없이 관장(官長)을 몰아내고 군기를 빼앗았다. 관망하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어 적들이 나날이 늘어나서 매우 위험하고 두려웠다. 나는 본래 병으로 누워있어 세상 생각이 없었으나 주공에게 나를 알아주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공의 뒤를 따라 온 지가 이미 반년이 넘었다. 마침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나 적이 조만간에 성에 다다를 기미가 있었다. 주공이 등에 땀을 흘리며 맹세하여 이미 성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했으니 그를 보좌하는 자도 당연히 처음과 끝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연로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의리상 그 몸을 사사롭게 하여 남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가 없어 마음이 저절로 산란해졌다.

지금 그만두고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승선 김복한(金福漢)에게 말을 하였더니 복한이 말하기를, “그대의 형편이 그렇지만 지금 전쟁의 조짐이 있는데, 그대가 갑자기 떠나가면 주공은 외롭고 위태로워지고, 주공이 위태로워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면 이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이 성을 지키지 못하면 호우는 무너질 것이다. 어찌 그대가 떠나갈 때인가? 그대가 부모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이미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는데, 백정자(伯程子) 두 사람이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은 교훈이 그것이다. 지금 그대의 거취는 크게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난류를 토벌하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니 어찌 단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에 비유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2일 [初二日]

주공이 상소를 써서 보냈다. 그 상소에 의하면, “삼가 생각건대, 신이 홍양(洪陽), 홍주의 별칭에 부임한지 반년이 되었으나 본래 거칠고 조잡한 성품으로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나 분골쇄신(粉骨碎身)하였으나 아직 티끌만큼의 효과도 없어 성은을 저버려서 임금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뜻밖에도 신을 전라 감사로 제수한다는 명이 멀리서 내려왔습니다. 신이 그 명을 듣고 처음에는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 같아 정신이 없어서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 인간 세상에 있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번병(藩屛)의 직임은 어느 곳이나 중요하지 않겠으며 순선(旬宣)의 재목은 어느 때나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호남의 땅은 본래 중요합니다. 근래의 변고는 평상시와 다릅니다. 비록 기주(冀州)를 다스린 범려(范蠡)와 촉(蜀)을 다스린 장량(張良)이라도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신처럼 용렬한 자가 하루라도 외람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혹시 영록(榮祿), 관직과 봉록을 탐하여 그 자질을 헤아리지 않고, 분의(分義)에 구애되어 그 사사로움을 따지지 않으면서 부임하는데만 힘써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신이 지은 죄는 용서받기에 부족할 것이고 나랏일의 낭패스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아! 비록 어리석고 천하지만 외람되게 은황(銀黃)의 끝에 참여하여 대대로 관리가 되어 임금의 은혜가 골수를 적시고 고마움이 심장과 간에 맺혀 있습니다. 나랏 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스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지금 나라에 일이 있는 때를 만나 오히려 몸을 들어 의를 떨쳐 목숨을 바치지 못했으니 이것은 신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더욱이 어찌 차마 어려움에 처하여 회피하고 속으로 자신을 온전히 할 계책을 생각하며 관례에 따라 사양을 꾸미어 명성을 도모할 방법을 도모해서 거듭 스스로 불충하고 불효한 죄에 빠지겠습니까? 해와 같이 위에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구구한 마음을 하늘과 땅 같고 부모 같은 임금 앞에 한번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어 감히 임금께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덧붙여 참월(僭越)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만번의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임금께서 굽어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간청합니다.

근래에 동도의 소요는 양호(兩湖)에서 가장 심합니다. 호남은 맨 먼저 난리가 일어난 땅으로 지금까지 평정되지 않아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호서는 지난 봄 보은(報恩)에서 해산된 뒤에 소굴이 점점 늘어나고 더욱 퍼져 올해의 변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호남에 비교할 수가 없어 마치 거대한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사나운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동한(東漢)때의 황건적(黃巾賊)과 명(明)나라 때의 유적(流賊)에다가 그 위험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아! 차마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동학의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지 않아 처음에는 이단이나 미혹할 만한 설이 아니었고 잡술(雜術)이나 남을 속일만한 방법이 없었으며, 단지 근거 없는 사설(邪說)이나 은밀히 선동하여 패거리를 모아 적을 만드는 계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일찍 뿌리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렸다면 설령 창궐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아! 임금의 은택이 막혀 아래에서 구할 수가 없고 법망은 성글어서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신은 참으로 어리석으나 일찍이 이것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을 받들어 홍주에 오니 바로 소요가 시작되어 어지러운 때여서 그것을 수습할 방도를 생각하였습니다. 왕령(王靈)에 의지하여 법으로 다스리고 단지 임금의 말씀을 펴서 은혜로 보듬었으며 본분을 어기고 기강을 범한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교화되어 돌아온 자는 이어서 권장을 하였습니다. 실정(實政)을 시행하는데 힘쓰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태하지 않으며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지략(智略)이 얕고 모자라기 때문에 위엄이 크게 행해지지 않아 약간 오래되었으나 아직 효과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 고을에서 감히 직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달 사이에 아전들의 얼굴을 익히고 백성들의 마음을 알아 다방면에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그 유종의 미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신이 이 고을에 연연해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차마 그만두고 가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신의 분수로 말한다면 한산한 곳에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목(州牧)의 직임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중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어찌 감히 스스로 옛날 군자가 대를 버리고 소를 취한 의기(義氣)와 존엄을 사양하고 비천한 데에 거처한 풍모를 모방하여 참월한 상소를 해서 위로는 아버지와 같은 임금을 기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여 불의(不義)에 돌아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과 더할 수 없는 뛰어난 지혜로 신의 뜻에 다른 것이 없음을 살피시고 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신에게서 완백의 직함을 거두시고 다시 홍주목사의 직임을 주어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할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초 3일 [初三日]

각처의 동도가 최괴(崔魁), 최시형의 지휘라고 하며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고 곳곳마다 지렁이처럼 이어졌다. 서산수령 박정기(朴錠基)·태안부사(泰安府使)·신백희(申百熙)·별유관(別諭官) 김경제가 모두 그 피해를 당했다. 해미·예산·덕산 등의 고을에서는 군기를 모두 빼앗겼다. 해미성·덕산·대천·예산·목시(木市) 등지에서 진세(陣勢)를 이루어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 노점을 지켰다가 행인을 잡아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 데려갔다. 경장(京庄)에서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실은 배가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을 모두 빼앗아 쌓아두었는데 마치 산과 같았다. 소·말·종이·무명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

장차 홍주성을 침범할 것이라고 드러내어 말을 하였다. 주공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하룻길 정도 되는 곳에 주둔하고 있어 예기치 못할 근심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성을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이에 장리(將吏)를 불러 모아 각기 방략(方略)을 주고 관병(官兵)을 모집하여 5개의 진영으로 나누었다. 남영관(南領官)에 김명헌(金明憲)을, 동영관(東領官)에 이창욱(李昌旭)을, 중령관(中領官)에 이능연(李能淵)을, 서령관(西領官)에 한상익(韓相翼)을, 북령관(北領官)에 김주현(金周炫)을, 군기감관(軍器監官)에 김관성(金觀成)을 정하였다. 중군(中軍) 김병돈이 군무를 모두 감독하였고, 양향수향(糧餉首鄕) 이규태(李奎泰)가 말먹이용 풀과 땔나무 및 횃불 등을 주관하였다.
오위장(五衛將) 장영식(張永植)은 영내(營內)에서 조달할 각종 물건을 담당하였다. 기관(記官) 이창억(李昌檍)으로 하여금 경향(京鄕) 각 관아와 인근 고을의 모든 문첩(文牒)을 관할하게 하였고 최학연(崔學淵)·이기용(李琦鎔)·김굉현(金宏炫) 등으로 하여금 각각 전담하게 하였다. 이석범(李錫範)·김동현(金東鉉)·김석교(金錫敎)를 군중에서 뽑아 군관의 직임을 맡기었다. 부상(負商) 중에서 재빠르고 재치가 있는 4~5명을 뽑아 여러 곳에 보내어 그들의 동정을 정찰하였다. 유회와 농보군(農堡軍)이 연이어 성원하여 마을의 장정들을 모집해서 번(番)을 나누어 출입하였다. 성안에 늘 지키는 병사들이 700여 명이 되었다.
이에 각 진(陣)에 군제(軍制)를 게시하여 말하기를, “임관(任官)과 자목(字牧)·약사(略事), 군사지휘와 도필(刀筆) 등은 일찍이 군대의 일을 강구해 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이런 때를 만나 하는 일마다 생소하다. 다만 생각해보니, 세상의 모든 일이 의로써 일을 다스리고 믿음으로써 영(令)을 시행하며 형세에 따라 대응하여 기습과 정면공격을 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기율이 있는 후에야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군제를 만들었다. 이에 고시(告示)하니 모두 잘 알아서 군율을 어기지 말라.

一. 지금 병사를 뽑는 것은 호적에 따라 장정(壯丁)을 선발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의병을 모아 비도를 토벌하려는 거사이다. 혹시라도 명분을 어지럽히거나 어기지 말라.

一. 5부(五部)는 각기 영관(領官)을, 초(哨)마다 초장(哨長)을, 군대마다 대장(隊長)을 두어 각자 단속하라.

一. 대열을 지어 서고, 군대마다 서로 마주보라. 제멋대로 대열을 떠나서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웃지 말며 공연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보지 말라.

一. 군무의 크고 작거나를 막론하고 한걸음이라도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것은 장수의 명령을 준거로 삼아 영기(令旗)를 가지고 시행하라. 말로 분부할 때는 절대로 듣지 말라.

一. 각 군대마다 군대이 인정한 깃발에 따라 대오를 이루고 바꿔 섞이게 하지 말라.

一. 추운 밤의 파수(把守)는 번(番)을 나눠 휴식하고 군대마다 차례대로 번갈아 바꾸고, 혹시라도 뒤섞여 편리한대로 골라서 하지 말라.

一. 식사할 때는 북을 치고 식사가 끝나면 징을 울려라. 나가고 멈추는 데 일정하게 하라.

一. 각 진(陣)내의 순군(巡軍)은 번을 나눠 교대로 돌다가 행동이 수상하거나 얼굴이 생소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뒤를 밟아 은밀히 내력(來歷)을 탐문하라.

一. 야경(夜警)을 돌 때에 불조심을 가장 신중히 하라. 만약 혹시라도 조심하지 않아 잘못된다면 먼저 영관(領官)부터 군율을 시행하라.

一. 어느 방향에서 오는 도둑이 있으면, 각기 그 문의 영관은 정찰병이 보고한 것을 은밀히 중군에게 보고하고 지휘를 받으며 혹시라도 먼저 징을 쳐서 소동을 피우지 말라.

一. 군대의 대열을 제멋대로 이탈한 자는 영관이 곤장을 쳐서 다스리고 그 대장은 나중에 중군에게 보고하라.

一. 영관은 군오(軍伍)중에서 가장 건실하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가 따로 적어 중군에 보고하라. 중군은 그것을 받아 기록하였다가 격려하라.

一. 읍촌에서 참전(參戰)을 자원하여 1개의 군대를 감당할 만한 자는 특별히 거두어 쓰라.

一. 허다한 군제(軍制)는 갑자기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를 정비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힘을 모으는 것을 먼저 하라.

명령이 이미 갖추어지자, 주공이 직접 돌아보며 위로하였다. 날마다 2차례씩 하였는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5일마다 1번씩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병사들을 대접하였고 반드시 직접 와서 함께 앉아 먹었다.

장리(將吏)가 들어와 보고하기를, “지금 성을 지키는데는 먼저 양식을 쌓아놓아야 합니다. 형편상 고을의 요민(饒民)들에게 돈과 곡식을 분배해야 조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불쌍하게도 저 촌민은 비도에게 곤경을 당하고 거의 모두 빼앗겼는데, 지금 다시 관에서 거둔다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나는 차마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읍내에 있는 사람들의 곡식은 가져올 수 없고 저들에게 가져오는 것은 내가 시가(時價)로 살 것이다. 반드시 이런 뜻을 먼저 곡식 주인에게 알리고 섬수를 계산하여 조사하라. 아울러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과 함께 군수비용에 쓸 것이다. 또한 가까운 고을의 면에서 올해 세미는 결민(結民)을 지휘하여 능력에 따라 바치게 하되 또한 독촉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고을의 백성들이 이 말을 다투어 암송하고 자원하여 군향미(軍餉米)를 돕는 자를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원하여 바친 군수 중에서 쌀은 176석 13두이고, 조(租)는 575석이며 돈은 5,700냥이고 소는 15마리였다. 그 밖에 술과 떡을 수레에 싣고 날마다 왔다. 그래서 모인 곡식을 창고에 쌓지 못하고 아울러 관아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곡식과 함께 내다가 밖에 쌓았는데 성위로 높이 나오게 하여 비축이 많은 것처럼 드러내었다. 이때부터 각 영營의 문첩이 계속 오고 가서 많이 지체되었다.

초 6일 [初六日]

비도가 결성(結城)에 들어가 그 인부(印符)와 군기를 빼앗았다. 결성 현감은 밤에 달아나서 겨우 몸을 피하였다.

초 7일 [初七日]

금군(禁軍)이 주공을 완백으로 임명하는 교유서(敎諭書)를 가지고 내려와서 동문(東門)에 도착했는데, 군민(軍民)이 막아 들어오지 못하였다. 주공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렵고 당황하여 군민을 타일렀다.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빈관(儐官)에 이르러 공손하게 교유서를 받았다. 이때에 완영(完營)의 문사(問使)도 왔는데, 순군(巡軍)에게 막혀서 오랜 뒤에 들어왔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주공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서로 통보해서 남쪽으로 완영으로 가는 길을 지켜 신연(新延)을 막고 북쪽으로 한양을 가는 역참(驛站)을 저지하여 새로 부임하는 수령을 막았다. 공이 매우 두렵고 근심이 되어 여러 가지로 영을 내려 타일렀으나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이때에 남원의 선비들이 공이 도백(道伯), 전라감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몇 명과 함께 낮에 숨고 밤에 걸어서 간신히 도착하여 공을 뵙고 감영에 도착할 기한(期限)을 물었는데, 의병을 모집하여 중도에서 공을 영접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경영(京營)에서 지금 병정 200명을 파견하였는데, 길을 인도하여 감영에 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이 내게 묻기를,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간다면 의병과 경병(京兵)이 위험을 막고 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이 되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저 호남의 비도는 본래 견딜 수 없는 약탈에서 연유하여 점점 서로 부추겨서 난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게 한 자들입니다. 마음속으로 빼앗을 것을 생각하여도 반역이고, 빼앗지 않아도 반역의 뜻입니다. 협박에 따른 무리들은 오히려 모두 제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자리를 둘둘 말듯이 빠르게 북쪽으로 가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을 모아 경내에 주둔하여 관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공이 1대의 수레로 가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은혜와 믿음으로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을 더한다면 저들도 바로 동천(銅川)에서 말을 돌려준 부류와 마찬가지인데,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을 진압하려고 군대의 위엄으로 크게 토벌을 한다면 그 성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믿고 쓸 만한 것은 바로 의병과 경병입니다. 그러나 의병은 모두 맨손에 몽둥이를 가지고 있어 저 화포와 창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경병은 본래 내가 훈련시킨 자들이 아니고 성격이 거칠고 강해서 다스리기 어려우며 반드시 군율을 많이 어길 것입니다. 엄중히 단속하려고 하면 쉽게 원망을 하고, 관용으로 보듬으려고 하면 그들의 약탈을 막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쓰겠습니까? 1대의 수레로 먼저 가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제가 뒤를 따라 약간의 도움을 드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공이 그렇게 생각하였다.

초 8일 [初八日]

정탐하던 병사가 와서 보고하기를, “비도 수 백명이 지난 밤에 수영(水營)에 들어와서 군기를 모두 탈취하여 배에 싣고 갔는데, 그 행보를 헤아려보면 오후에 옹암(瓮巖)과 광천땅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군(官軍) 중에서 정예병 260여 명을 뽑아 김동현·김석교·이석범 등이 이끌게 하고 군대를 출전시키라고 급히 영(令)을 내렸다. 관군이 적에게 나가 싸우는 것이 오늘 시작되었는데, 공이 칼을 뽑아 단상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했는데 의기(意氣)가 복받쳐서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은혜에 감동하고 군율을 두려워하였다. 기세 좋게 뛰어올라 앞으로 가서 홍주와의 거리가 30리 되는 광천시장에서 적을 만났다. 적이 먼저 산위에 자리를 잡아 지형의 이로움을 얻고 있었고, 우리 군대는 산 아래에 있어 공격하기가 어려워서 주저하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석범이 칼을 뽑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언덕을 뛰어올라가니 뒤에 있던 군대가 한꺼번에 산에 올라갔다. 화포소리가 나는 곳에 맞아 쓰러진 적들이 수십 명이었고, 적들이 일시에 놀라서 흩어졌다. 관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9명의 적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군기를 모두 거두어서 돌아왔다. 대포가 40여문(門)이고 화약이 수천 근이었으며 그 밖에 갑주(甲冑)·활·화살·화전(火箭)·납촉(蠟燭) 등의 물건은 한달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갖추어 성을 지키는데, 기계가 많지 않고 훌륭하지 않아 늘 걱정이었다. 지금 한번에 크게 이겨서 정예한 무기를 많이 얻었으니 어찌 쥐와 개처럼 작고 추악한 비도를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춤추고 사기는 갑절이나 되었다.

초 9일 [初九日]

매성(梅城)의 농보군이 광천에서 패하여 흩어진 적을 추격하여 그들의 돈 500냥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돈 중에서 200냥을 농보군의 군사들을 먹이는 비용으로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의정부(議政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 홍주목사 이승우를 완백으로 옮기도록 명을 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 홍주는 호서의 요충지에 있는데 해당 수령이 미리 방비를 해서 비류가 감히 경내를 침범하지 못하여 인근의 7~8개 고을이 의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기신(耆紳)과 사민(士民)들이 계속하여 그의 유임을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진실로 싸움터에 나간 장수를 바꾼다는 탄식이 있으니 전 홍주목사를 특별히 유임시켜 주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근래에 길이 막혀 집에서 오는 편지가 오랫동안 끊겼다. 홍양이 함락되고 나도 해를 입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남쪽 고향에 퍼져나갔다. 사중(舍仲), 작은 형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바로 내려오다가 중도에 목시의 적들에게 잡혀 뜻하지 않게 결박되어 구타를 당했다. 하룻밤의 곤욕를 치르다가 거짓말을 하여 탈출을 해서 이 날에 도착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적의 형편을 물어보고 제법 상세하게 알아 그들의 허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공이 늘 이 적을 쳐부수려고 했으나 정찰을 하지 못하여 근심을 하고 있었고, 주공을 보좌하는 나도 그들의 위세가 대단한지를 의심하였다. 이 때문에 어려워 한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작은 형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저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주공에게 날을 정해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고, 다시 중군을 불러 적의 형편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11일 [十一日]

새벽에 각 진(陣)에서 건장하고 용감한 군사 500명을 뽑아 밥을 먹이고 장비를 갖추어 중군 김병돈이 인솔해 가서 목시의 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날 새벽에 짙은 안개가 들에 가득하여 지척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관군이 목시에 도착하니 적들이 모두 영루(營壘)를 비우고 민가에 들어가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관군은 혹시 계략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나가지 못하고, 먼저 큰소리를 지르고 화포를 쏘아 위세를 드러내었다. 적들이 갑자기 화포소리를 듣고 조수가 빠지는 것처럼 흩어져서 포구를 따라 도망을 쳤다. 관군도 추격을 할 수가 없어 그 군기와 말 등을 거두어서 돌아왔다.

12일 [十二日]

목시에 출전한 군사들 중에 민가에서 옷을 빼앗아 가져온 자가 많았다. 중군 김병돈이 그 옷들을 모두 거두어서 바치고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장수가 되어 군사들을 단속하지 못하여 군율을 어겼으니 소인의 목을 베어 군사들을 권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새로 모집한 병사들을 모두 통솔하지 못하였다. 지금 은혜와 믿음이 부합되지 못하고 위엄 있는 명령이 세워지지 않아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군율을 어긴 자에게 경계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북문(北門)에서 개좌(開坐)하여 중군을 곤장으로 다스리고 장수와 병사들을 타일렀다. 그리고 노략질한 옷을 모두 가져다가 네거리에서 불태웠다.

13일 [十三日]

매성보(梅成堡)에서 바친 대포 5문(門)은 바로 수영에서 비도에게 잃어버려 옹암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보령현(保寧縣)의 아전과 향임(鄕任)이 향정(鄕丁) 900여 명을 모아 방비할 계책을 세우고 보령현의 비괴 5놈을 잡아왔다. 이보다 앞서 보령의 아전과 향임이 그 군기를 몰래 비괴 이원백의 처소에 옮겨 놓았는데, 이원백이 와서 그것을 바치고 자수하며 말하기를, “본현의 군기를 다른 적에게 빼앗길 것이 걱정되어 감히 가져와서 홍주에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전과 향임이 다시 와서 아뢰기를, “이원백에게 있던 군기를 다시 가져가서 그것을 가지고 지키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한가지 일을 보면 이원백이 자신의 악행을 덮으려고 이향(吏鄕)들과 제멋대로 군기를 주고받은 사실이 휜하게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었다. 진실로 그 죄를 논하여 바로잡아야 하지만 공은 일부러 관대하게 용서하여 불안해하는 자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조정에서 주공을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삼았는데, 병인(丙寅), 1866년에 연안부사(延安府使)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10월 8일에 정부가 임금에게 아뢰어 저보(邸報)가 이 날 홍주에 내려왔다. 군민이 모두 뛰고 손바닥을 치며 기뻐했고 사기는 갑절이나 되었다.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북문에 개좌하여 광천에서 잡은 포로와 각처에서 기찰하여 붙잡아서 가둔 28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나누어 처리하였다. 죄가 무거운 4명은 바로 목을 베어 경계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일단 비도를 다스린 뒤에 감옥에 가둔 자에게 아침밥과 저녁밥을 주었고 풀어준 자에게는 양식과 돈을 주었다.

15일 [十五日]

진영(鎭營)에 전령을 보내 처단하지 않고 옥에 가둔 비괴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 경계하라고 하였다.

16일 [十六日]

비도 수 천명이 합남(合南)땅에 주둔하여 그 기세가 대단해서 관군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17일 [十七日]

관군이 덕산과 대천의 시장에 이르러 적도가 숨겨둔 군기를 찾아내어 모두 가지고 돌아왔다.

18일 [十八日]

작은 형님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19일 [十九日]

순영(巡營), 감영에서 나누어 준 1,000냥을 광천싸움에 나간 장수와 병사들에게 등급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다시 관아의 돈 400냥을 내어 목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덕산에서 연이어 급보가 와서 바로 200명을 징발하여 합남과 원평(院坪) 등지를 순찰하였다. 예산현에서 비괴 유치교를 잡아왔다.

20일 [二十日]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장수와 병사들이 싸움에 나갔다. 연이어 파발(擺撥)이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관군이 덕산·대천·면천·남산(南山)에서 2곳의 적들 사이에 있어 형세가 고립되고 힘이 모자라서 상대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여 300명을 다시 뽑아 보냈다.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합덕(合德)에서 첩보(捷報)가 왔는데 다시 화약을 요청하여 1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운송하게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관군이 합덕에서 진(陣)으로 돌아왔다. 비도 중에 총에 맞아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고, 사로잡은 자는 60여 명이었다. 그들을 5개 진영에 나눠 배속하여 일을 시키고 밥을 먹게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이보다 앞서 이창구를 사로잡을 일로 중군과 은밀히 모의하여 말하기를, “이 놈은 의지가 매우 세고 굽히지 않아 힘으로는 사로잡기가 어렵고 지혜로 잡을 수 있다”라고 하고, 바로 김석교를 보내어 그가 새로 얻은 애첩을 잡아다가 성안의 외지고 조용한 곳에 두고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중히 금하며 그 음식대접을 넉넉히 하였다. 사사로이 오고 가는 편지를 모르는 척하고 막지를 않았다. 그 때에 이적(李賊), 이창구의 일을 와서 얘기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이(李), 이창구가 쓸만한 인재라고 생각하나 그가 고집스럽고 미혹하여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 애석하다. 지금 마음을 돌려 귀화한다면 내가 조정에 천거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비류를 토벌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을 세워 죄를 갚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뜻을 전하여 그를 깨우치게 할 수 없어서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적(李賊)이 면천 숭악(崇嶽)의 농보(農堡)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와서 간절하게 귀화를 원하고 자신의 첩을 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초토사가 기뻐서 허락하여 말하기를, “지금 군사를 풀고 산을 내려오면 바로 네가 요청한대로 해 주겠다”라고 하니, 이적이 약간의 군기를 풀어 신천의 도회소(都會所)에 보내고 사람을 시켜 동학을 버리고 귀순한다는 글을 바쳤다. 공이 넉넉하게 답장을 써서 장려하고 어느 날에 그의 첩을 어느 곳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김창기(金昶基)·이근영(李瑾永)으로 하여금 그의 심복인 강종화(姜鍾和)·편중삼(片仲三)·김영배(金永培) 등 3명을 회유하여 말하기를, “이적을 사로 잡는 날에 너희들은 공범의 형률을 피하기가 어렵다. 지금 이창구가 거짓으로 배도(背道)한다고 하며 자신의 첩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나 초토사가 그것을 허락한다는 뜻도 알기가 어렵다. 너희들이 만약 이 기회에 이적을 사로잡아서 바치고 자수한다면 우리들은 너희를 위해 알선하여 분명하게 보호를 받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영배의 사촌동생인 명배命培가 이어서 권면하니, 3명강종화·편중삼·김영배이 말하기를, “초토사가 과연 우리들을 받아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창기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가 않다. 내가 너희를 위해 먼저 초토사의 맹세를 받아 주겠다”라고 하고, 김명배와 함께 들어가서 주공에게 말을 하여 속죄를 허락하는 글을 명배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였다. 또한 이적에게 말을 전하기를, “3일내에 너의 첩을 보내겠다”라고 하였다. 김창기가 그 첩을 데리고 가니 이적이 정말로 그 날에 산을 내려왔다. 이근영 등이 밤에 그의 방에 들어가 이적을 결박하고 촌민들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압송하여 왔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덕산과 면천에 사는 수천명의 촌민들이 한꺼번에 와서 오히려 이적을 가볍게 처리할 것을 걱정하며 서로 앞을 다투어 말하기를, “이적을 참수(斬首)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고, 눈(雪)을 무릅쓰고 노숙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그 날에 형벌을 시행하였다. 광천에서의 싸움 이후에 3번 싸워 이긴 일과 적괴(賊魁), 이창구의 목을 베어 경계한 일을 일일이 들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23일 [二十三日]

적의 위협이 날로 급박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해미·여미(餘美)·홍주·원평 등지에 지금 주둔하여 10만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석권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마을을 만나면 불을 지르고 사람을 보면 화포를 쏘아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바로 장좌(將佐)를 불러 군대를 보낼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모두 지세(地勢)가 험준하여 가볍게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중군을 시켜 해미성에 있는 적의 형세를 탐문하여 이것을 통하여 군대를 전진시키려고 하였다. 마침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내려온다는 보고가 있어 급히 탐리(探吏)를 예산에 보냈는데, 그 회보(回報)에 의하면, “경군 50명과 일본군 100여 명이 밤에 예산의 신례원에서 묵고 덕산과 대천을 경유하여 바로 면천으로 향했다”라고 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저녁이 지나서 덕산에서 당보(塘報)가 왔는데, 그 당보에 의하면,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의 도동(道洞)에 이르러 처음으로 적과 부딪혀서 한번 싸워 이기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병(京兵) 1명이 면천에서 도망쳐 돌아왔다고 하며 그가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경병과 일본군이 지세의 험준함을 알지 못하고 급히 험하고 막힌 곳에 들어가 적에게 포위를 당했는데 군사의 수효가 매우 차이가 나서 탈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 도망쳐 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라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새벽쯤에 경군과 일본군이 면천에서 포위를 뚫고 밤새 달려서 홍주에 도착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피해가 없었다. 장위영(壯衛營) 별군관(別軍官) 김홍수(金弘秀)는 고향 사람으로 통위영(統衛營) 교장(敎長) 황수옥(黃水玉)과 함께 경군을 이끌고 왔다. 일본군의 보병(步兵)은 교위(校尉) 아카마츠(赤松國封)와 통역관 이이다(飯田)가 군사를 인솔해 왔다. 바로 공해(公廨)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고 일을 의논하였다. 그 때에 면천의 고명(高名)한 선비인 서상리(徐相理)가 난리를 피하여 성에 들어와서 만나 보기를 청하고 적의 형세의 허실을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여미와 원평으로 행군(行軍)하는 길과 산과 계곡의 험준하고 완만함을 그려서 바쳤다. 장좌를 불러 의논하기를, “지금 적이 여미에 주둔하여 군사를 풀어 약탈을 하니 긴급히 공격하여 쳐부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군대가 출동하는 길은 다만 2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바로 원평으로 직접 가는 길이나 이 곳은 험준하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부근에 매복할 데가 많습니다. 이미 적이 그 위를 점거하고 있어서 군대를 드러내어 그 곳에 깊숙하게 들어가 적의 예봉(銳鋒)과 부딪혀서는 안됩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해미를 돌아가는 길입니다. 해미성을 점거하고 있는 적들은 반드시 정예병을 뽑아 모두 여미로 보내고, 노약한 자를 해미에 남겨 놓고는 성원을 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에 우리 군대를 2길로 나누어 하나는 경병과 합하여 바로 해미성을 공격한다면 한번에 깨뜨릴 수 있습니다. 남쪽의 유군(儒軍)을 후군(後軍)으로 삼아 계속하여 달려가서 여미의 뒤로 나가 시끄럽게 북을 쳐서 적이 나가도록 압박한다면 뜻밖이라 감히 군사를 돌려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원평으로 직접 가는 길을 따라 모두 덕산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한쪽의 군대가 일본군과 합세하여 덕산 동남쪽의 들판에 주둔하고 있다가 적의 길을 막고 형세를 보아 합덕·신북·면천 등의 유군을 움직여서 산 위에 각각 의병(疑兵)을 두고 원근에서 서로 호응 한다면 적은 반드시 나아가고 물러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완벽한 계책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적의 군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끝내 의심하고 겁을 먹었다.

일본군은 지난 밤에 포위를 당한 뒤라서 싸울 마음이 없었고, 경병은 그 수가 많지 않아서 일본군의 눈치를 보며 진퇴를 할 뿐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적의 위협이 밤새 이어져 어수선하였고, 사람들이 여미에서 몰려 나왔으며 덕산 큰 길가의 초막들이 모두 불탔다. 100리에 걸쳐 사람의 그림자가 끊어졌고 바람과 학 울음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소란스러웠으며 머지않아 닥칠 근심거리가 되었다. 장수와 아전을 모두 불러 그들을 토벌할 의논을 했으나 경병과 일본군은 성을 굳게 지키는 것만을 훌륭한 계책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아군도 따라서 태만해져 용감하게 진격할 뜻이 없게 되었다.

26일 [二十六日]

해가 뜰 때에 내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창억이 창밖에 와서 말하기를, “지금 막 군대를 출동하였습니다”라고 하여 내가 깜짝 놀라서 옷을 입고 동헌(東軒)에 올라갔더니 초토사는 벌써 먼저 출발하고 없었다. 내가 황급히 동문 앞에 나가서 보니 군대가 이미 열을 지어 행군하고 있었고, 초토사는 길가에 서서 막 군대를 점검하고 행군을 독촉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출군한 이유를 묻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마침 박봉진(朴鳳鎭)이 짐을 꾸려 앞을 지나가기에 내가 그를 끌어 당기고서 묻기를, “지금 출군은 도모하지 않고 나가는데 어느 곳으로 가서 무슨 적을 토벌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니, 봉진이 말하기를, “밤에 예산 유회의 첩보(諜報)가 있었는데, ‘여미에 있는 적의 전위부대가 이미 신례원에 도착하여 예산 고을이 소탕을 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와서 구해줄 것을 급히 요청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갑자기 군사를 징발하여 예산의 군대와 합세하여 협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경병 및 일본군과 상의하여 함께 가는가?”라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중군이 지금 일본군의 숙소에 가서 일을 의논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끝내 기꺼이 따르려고 하지 않아서 중군이 이것 때문에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만약 그들이 끝내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군대의 출동은 경병과 일본군이 따르는 여부로 아군의 행동거지를 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들이 많다고 해도 이미 그들의 허실을 알았는데 어찌 심하게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물러서서, “지난 밤에 병법을 논의한 것은 계책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의심해서 주저하다가 결정하지 못하고서 어찌 갑자기 이웃 고을의 첩보 하나에 단연코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또한 상대를 얕보고 공(功)을 다투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인데, 지금 아군이 여러 번의 승세를 타고 몸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니 적을 가볍게 여기는 기색이 현저하다. 경병과 일본군의 행동거지를 살피지 않고 먼저 올라가 무공(武功)을 휘날리려고 하니 제법 공을 다투고 겨루려는 마음을 품고 있어 혹시라도 소홀히 여겨 잃어버릴 걱정이 있으나 또한 싸움에 직면하여 의논을 확대해서 사기(士氣)를 떨어뜨려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여 잠자코 물러났다.

갑자기 경군과 일본군도 짐을 꾸려 성을 나가 비로소 마음이 위로되고 근심이 풀렸으나 여전히 중군을 보지 못하여 군사상의 기밀을 상세히 알지 못해 혼자 의아해 하고 울적해 있었다. 다시 후군(後軍)의 장령(將領)에게 경계하기를, “혹시라도 먼저 가볍게 나아가지 말고 반드시 경군과 일본군과 일을 함께하라”고 하였다. 관군이 먼저 가서 끝내 경군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산에 올라가서 진영을 갖추는데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이 아군의 빈약함을 보고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모아 둘러쌓는데, 마치 벌이 에워싸고 개미가 몰려들며 뱀이 또아리를 틀고 지렁이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김병돈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기세를 돋우고 병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포를 쏘니 예산의 군대가 갑자기 저절로 무너졌고 관병도 따라서 놀라 흩어졌다. 김병돈이 힘을 내어 수습하려고 했으나 수습할 수가 없었고 포위를 뚫지 못하여 적에 잡혔으나 크게 그들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끝내 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영관 이창욱·주홍섭(朱弘燮)·창섭(昌燮) 형제, 한량(閑良) 한기경(韓基慶), 예산의 유생 홍경후(洪敬厚), 덕산의 의동(義童), 나이가 어린 의병 신태봉(申泰鳳)이 함께 죽음을 당했다. 관군 중에 죽은 사람은 10여 명이 되었고 박봉진과 이석범은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을 만나 군대가 패배한 연유를 설명하고 함께 가서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군이 따르지 않았다.
패배했다는 소식이 이르자 부중(府中)이 두려움에 떨었고 싸움에서 전사한 자들의 가족들이 달려와서 통곡을 하였다. 초토사가 직접 가서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워 복수할 뜻으로 격려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하고 밤이 되어 곧 진정되었다.

27일 [二十七日]

박봉진을 중군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의 여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유학 정기황(鄭基璜)과 조종세(趙鍾世)를 좌군관(左軍官)과 우군관(右軍官)으로 삼아 처음으로 패배한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적의 기세가 승세를 타고 여러 고을에 창궐하여 솥에 물이 끓는 듯해서 수령들이 스스로 지키기를 못하였다. 그래서 대흥 수령 이창세(李昌世)와 예산 수령 이건(李健)이 모두 홍주에 들어왔고, 부안수령(扶安守令) 윤시영(尹始永)은 집이 덕산에 있어서 또한 난리를 피해 들어와 성을 지킬 계책을 상의하였다.

28일 [二十八日]

이른 아침에 나는 장수 몇 사람과 간동(諫洞) 뒤의 고개에 올라가서 적이 주둔한 곳을 바라보니 바로 우리 홍주와의 거리가 30리가 되는 덕산 땅이었다. 산과 들을 뒤덮은 것은 모두 적(賊)들의 기운이었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여 수십리에 걸쳐 있었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쯤에 적의 깃발 하나가 바람에 날리며 달려갔는데, 바로 덕산을 거쳐 길게 이어져서 홍주로 향하였다. 전군(前軍), 전위부대은 이미 홍주의 북쪽 10리 되는 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내가 바로 산을 내려가 성에 들어가서 주공에게 말하기를, “각 문(門)을 지휘하여 그 문의 자물쇠를 단단히 하고 각 진(陣)을 단속하여 나누어서 성첩을 지키십시오”라고 하였다. 다시 서남쪽의 돈대(墩臺)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이 적현(赤峴)에 이르러 2개의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간동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서문(西門)을 향하였다. 일본군 30명이 서문을 나가 외빙고(外氷庫)의 고개에 숨어 있다가 화포를 쏘아 선봉에 선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으나 군사의 수가 적어 상대할 수가 없어 다시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켰다. 적이 동서의 양쪽 산에서 진영을 갖추었는데 새의 날개와 같았고 깃발·북·말·가축 등은 중앙에 모았다. 양쪽 날개의 군대는 쑥대처럼 헙수룩한 머리에 흰 옷을 입고 손에는 병기가 없이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으며 서로 뒤섞여서 대오가 없었다.

향교는 간동의 서쪽에 있었는데, 성전(聖殿)을 지킬 방책이 없어 다만 매우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교생(校生) 오경근(吳景根)·최민지(崔民志)·최학신(崔學信)·방세영(方世永)·방석규(方錫珪)·이만오(李萬五) 등이 재복(齋服)을 입고 묘정(廟廷)에 나누어 서서 지켰다. 적들이 난입하자 소리를 질러 꾸짖으며 한걸음도 떼지 않고 적들의 칼에 모두 죽었다. 아! 원통스럽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니 적이 먼저 동문 밖의 민가 여러 채를 불태웠고 약탈만을 일삼았다. 성의 근처에 있는 인가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서 총을 쏘고 다시 숨어버려 성위의 서있는 군사들은 탄환을 허비하고 1명의 적도 맞추지 못하였다. 주공이 이에 군교(軍校)에게 명하여 청야법(淸野法)을 사용하게 하여 불화살을 많이 쏘아서 성 아래의 건물들을 불태웠다. 대포를 연달아 쏘아 탄환에 맞거나 불에 타서 죽은 적들이 매우 많았다.
갑자기 1명의 적이 대포를 가지고 동문 아래에 와서 위로 쏘아 그 탄환이 서까래를 맞추었으나 서까래가 도로 떨어져서 화포를 쏘았던 자가 바로 죽었다. 문루(門樓) 위에 있던 아군이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에 적들이 다시는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서문의 적들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집 위에 세워 우리를 속여 탄환을 허비하게 하려고 했으나 아군이 이미 그 간계를 알고 있어서 계책을 시행할 수가 없었다. 이 날 밤에 초토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창을 들고 밤새 성을 돌며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화포의 탄환이 비처럼 머리 쪽에 떨어졌고 소매에 떨어져서 누렇게 태우기도 했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시를 멈추지 않고 더욱 격려하니 장졸(將卒)들이 모두 솜옷을 입는 은혜와 함께 술을 먹는 것에 감동하여 거의 추위와 배고픔을 잊어버렸다. 하룻밤을 격렬하게 싸웠는데, 단지 화포로만 하였다.
아군의 대포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일본군이 대포를 잘 쏘아서 반드시 적중하여 조금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으나 저들의 병기는 뛰어나지 못하고 서툰 자들이 쏘고 법도가 없어서 끝내 아군 중에 1명도 해칠 수가 없었다. 또한 성안의 군민은 이미 기율에 익숙하여 밤새 시끄러운 소리가 없었고 닭과 개도 놀라지 않았다.

29일 [二十九日]

아침이 지나서 초토사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동루(東樓)에 올라 간동에 주둔한 적을 바라보니 어제와 비교하여 이미 많이 도망쳤으며 그 대오는 더욱 흩어지고 어수선하였다. 앉거나 일어나서 뒤섞여있었고 손으로 가리키고 돌아보며 당황하는 것이 짐을 꾸려 도망가는 모습과 같았다. 서문의 적은 산허리에 숨어 때때로 포를 쏘았으나 대포 소리에 힘이 없어 반드시 이것은 화약이 떨어져가는 것이었다.
내가 부안 수령 윤(尹), 윤시영에게 말하기를, “저 적들의 기세가 다하고 탄약이 떨어지면 도망갈 것인데, 지금 정예병사 1대(隊)로 성을 나가 공격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군대를 보면 반드시 급하게 달아날 것입니다. 비록 추격하여 모두 죽일 수 없더라도 그들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전부 노획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초토사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바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성문(城門)을 맡아서 지키고 완강히 열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간동의 적은 과연 모두 흩어져서 도주하였고 서문의 적도 차차 해산하였다. 성위의 관병 중에 스스로 분통이 나서 다투어 성을 넘어 내려간 100여명이 1리 정도 추격하여 화포를 쏘아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서문 밖의 민가에서 약탈을 당한 물건은 거의 모두 되찾았다.

이 날에 홍주와 대흥의 유병(儒兵)이 모두 적들이 성을 포위할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구원하러 온 병사가 5,000~6,000명이 되었는데, 홍주의 남산 위에 주둔하여 성원을 하였다. 적들이 도망하여 사로잡은 자도 많았고 이틀 동안 성 아래에서 죽은 적은 대략 600~700명이 되었다.

주석
경영(京營)의 군사 장위영의 부영관 이두황(李斗璜)이 이끄는 군사를 말한다. 죽산부사 이두황은 장위영군사를 이끌고 보은과 세성산을 거쳐 예산 등지의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김복한(金福漢) 홍주출신의 양반유생으로 뒤에 의병장이 되었으며 유림중심의 파리장서사건에도 앞장 섰다.
번병(藩屛) 감사와 병사를 일컫는 말이다.
은황(銀黃) 은인(銀印)과 황수(黃綏)로 지위가 높은 관리를 의미한다.
경장(京庄) 한양에 사는 사람이 시골에 가지고 있는 농장을 말한다.
농보군(農堡軍) 농보는 도둑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논밭 주위에 설치한 보루를 말하는데 민보군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도필(刀筆) 하급 관리인이 아전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금군(禁軍) 궁궐을 지키고 임금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아보던 군사를 말한다.
개좌(開坐) 관원이 모여 일을 보는 것을 말한다.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충청도 해안지방의 농민군을 토벌하는 총사령관격으로, 당시 홍주에 호연초토영을 설치하고 동시에 나주에 호남초토영을 설치하였다.
합남(合南) 합덕(合德)의 남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보(塘報) 척후(斥候)하는 군사가 깃발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적의 동정을 살펴서 알리는 일이다. 여기서는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의병(疑兵) 적을 미혹시키기 위하여 가장한 군대를 말한다.
윤시영(尹始永) 1차봉기와 집강소기간 전라도 수령들은 대부분 임지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부안군수 윤시영은 뒤에 임지를 떠났다하여 견책을 받았다.
청야법(淸野法) 들판의 집과 양식 우물을 모두 없애고 철수하여 적의 근거지를 없애는 전술. 헌 건물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꾸는 수법을 썼다.
솜옷을 입는 은혜 협광지혜(挾纊之惠): 위로를 받아 감격하여 추위를 잊는 것을 말한다.
술을 먹는 것 투료지음(投醪之飮):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술을 강물에 풀어 백성과 함께 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군민(軍民)과 함께 고락(苦樂)을 같이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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