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때때로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가르치지 않아서 기율이 없었으나 은혜를 베풀고 위로하는 데에 부합되었다. 큰 난리를 겪어 부형(父兄)의 원수를 만나고 약탈의 화를 입은 자는 모두 이를 갈며 복수하였다. 일단 저들을 만나면 그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살육만을 하여 종종 뜻하지 않게 총에 맞거나 찔리는 자가 있어 인심이 도리어 다시 어수선해졌다. 불안한 자가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었다. 초토사가 이것을 매우 우려하여 방(榜)을 내걸어 영(令)을 내려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죽일만한 죄악이 있는 자라도 관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사사로이 손을 대는 자는 상명(償命)의 형률을 시행할 것이고 관이 죄를 판결할 때도 주모자는 죽이고 종범(從犯)은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규정으로 삼을 것을 두루 이웃 고을에 알렸다.
초 2일 [初二日]
반계(磻溪)의 유병 200명과 유곡(酉谷)의 유병 200명 및 보령의 향병(鄕兵) 250명이 왔기에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갈산 등지에 나누어 보내어 소굴에 아직 남아있는 유명한 적괴를 잡게 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계속해서 전진하여 결성의 공수동(公須洞)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바로 처음부터 비도가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었다. 군사들의 마음이 도착하자마자 분노하여 바로 불을 질러 죽이고 빼앗아 모두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초토사가 그것을 듣고 바로 전령을 보내어 병사를 거두었다.
초 3일 [初三日]
도망하여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이 예산땅에 물러나서 여전히 모여 해산하지 않았다. 대흥의 유군이 가서 쳐부수었다. 이때에 일본군 1진(陣)이 금영(錦營)에 주둔하고 있다가 정산의 괴수 김기창을 토벌하였다. 완적(完賊)에 빌붙은 자들이 모두 패하여 흩어졌으나 사방에서 적의 위협이 여전하여 어수선했기 때문에 지킬 대비를 더욱 엄중하게 하였다.
초 4일 [初四日]
탐문한 보고가 연달아 왔는데, “도망간 적이 점점 해미에 들어와 점거하여 다시 일어날 상황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나아가 쳐부술 것을 의논했으나 그들이 점거한 곳이 험준하고 멀어서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서상리가 바친 지도를 장수와 아전에게 내어 보이고 병사를 3길로 나누는 계책을 세웠다. 예산에서 적을 쳐부순 상황과 성 아래에서 적을 물리친 연유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초 5일 [初五日]
유언비어가 다시 일어났는데, 적들이 밤에 성을 약탈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때때로 서로 유언비어를 말하였다. 초토사가 직접 돌아다니며 잘 타일러서 진정시키었다.
초 6일 [初六日]
천안(天安)의 의병장(義兵將) 감찰(監察) 윤영렬(尹英烈)과 출신(出身) 조중석(趙重碩)이 병사 400여명을 인솔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배를 타고 아산포(牙山浦)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당보(塘報)에 의하면, “순무영(巡撫營) 별군관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병사 1,800명을 이끌고 덕산의 가야동(伽倻洞)에 와서 묵고 내일 해미로 진격할 것입니다. 의병 진영에 격문을 보내 함께 진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군이 초토사에게 내린 유서(諭書)와 부월(斧鉞)을 가지고 왔다. 또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온 군사들이 그 영광을 축하해 주었다.
초토사가 참모관(參謀官)과 별군관을 추천하여 보고하려는데, 나를 뽑으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공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외로운 성을 지켜서 오늘이 있게 한 것은 단지 정성을 다하고 공평하게 사사로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서입니다. 지금 장수를 추천하는 날에 저를 거기에 채운다면 누가 공정하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지금이 나아가기를 구하고 몸을 도모할 때가 아닙니다. 명공(明公), 홍주 목사께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튼튼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무기를 잡고서 몸으로 칼날을 무릅쓴 자를 먼저 천거하고, 다음에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군량을 도운 자를 들어 장수에 둔다면 저들이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공을 위해 죽어 하루가 안되어 적을 평정할 것입니다. 나랏일이 끝나고 민생이 편안해지면 저는 영예에 있어 여기에서 지극할 것입니다. 지금 어찌 때를 타고 영예를 도모하는 것을 벼슬길에 나아가는 수단으로 여겨 명공으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따른다는 의심을 받게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낯빛을 바꾸고 칭찬하였다. 결성에서 박태건(朴台建)을 잡아서 바쳤는데, 바로 수영의 군기를 훔칠 때에 주모한 우두머리였다.
초 7일 [初七日]
죽산의 병사가 해미로 전진하였고, 천안의 병사는 광석(廣石)을 경유하여 해미의 북문을 공격하였다. 관병 100명이 앞을 인도하고 150명은 군관 정기황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하여 덕산과 대천을 거쳐 여미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일본의 육군 대위 야마무라(山村忠正)가 병사 200명을 이끌고 아산에서 들어왔다.
초 8일 [初八日]
의병 진영의 첩보(牒報)에 의하면, “죽산의 병사가 먼저 해미성을 공격했는데, 적이 바로 무너져서 흩어져 서산의 도비산(道飛山)에 물러나서 주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반계의 병사를 불러 관병과 합친 300명을 박봉진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서산의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일본군 소위(少尉) 아카마츠가 공주를 향해 떠났고, 야마무라는 해미로 갔다. 죽산의 병사들이 서산에서 돌아왔다. 순무영 별군관 이창직(李昌稙)이 병사 30명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순찰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죽산의 병사들이 하루를 묵고 공주로 갔는데, 온갖 병사들의 폐단이 성에 가득하여 시끄러웠다. 관리가 나아갈 수 없었고 점인(店人)들이 모두 피신하였다. 그들이 떠나갈 때에 밥을 먹고 난 뒤의 그릇과 잠을 잔 곳의 돗자리를 모두 걷어 가지고 소와 말에 실었다. 병사들은 베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약탈한 물건이었다. 홍주의 관병이 그것을 보고 모두 분개하고 미워하며 서로 공격할 것 같았는데 초토사가 엄중하게 명령하여 탈이 나게 하지 말고 좋은 말로 보내게 하였다. 시장의 가게에서 빼앗긴 그릇 등의 물건들은 이창억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기록해서 빠짐없이 값을 치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아전과 백성이 더욱 가깝게 여겼고 다른 곳에서 온 군대가 고을을 지나가도 원망하고 거스르는 뜻이 없었다.
합북(合北)의 유병이 비괴 이병호(李炳浩)를 잡아서 바쳤다.
11일 [十一日]
남포(藍浦)의 방어소(防禦所)에서 보고하기를, “비도가 지금 홍산(鴻山)을 점거했으니 하루가 가기 전에 그들을 토벌하여 죽임을 당하는 여러 군(郡)을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장리를 보내어 그들의 허실을 정탐하였다.
12일 [十二日]
박봉진이 서산에서 개선하였는데, 비괴 최동신(崔東信)·문학준(文學俊)·박춘석(朴春石)·옥출곤을 잡아왔다.
13일 [十三日]
적괴 이병호와 최동신 등을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덕산 수령 조두환(曺斗煥)과 해미 수령 이일(李鎰)이 모두 군무 때문에 왔다. 남포의 전 승지 임상호(任尙鎬)가 밤에 남쪽 연안 적의 위협 때문에 보고하기를, “양호의 적이 연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어제 한산을 침범하였습니다. 남포의 위급함이 조석간에 달려있으니 병사를 보내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초토사가 관병이 멀리 출정하면 민폐가 심하여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패하여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이 호남의 적과 연계하여 남쪽 연안을 침범하여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그 기세가 반드시 대단해져 북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 고을에서 웅크리고 관망하던 자들이 반드시 호응하여 저절로 지난날의 서산과 태안을 석권했던 형세를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성 아래의 일도 이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빨리 관병을 보내고 보령 수영의 둔병(屯兵)도 남포와 서천에 내려 보내 그 요충지를 지키고 그들의 동정을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성대해지기 전에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14일 [十四日]
초토사가 남정(南征)을 결의하고 본영(本營)의 총수(銃手)와 창수(槍手) 150명을 뽑았다. 여러 고을에 전령을 보내 동시에 모두 거병(擧兵)하여 남포에 가서 지키게 하였다. 보령 수령 이교철(李敎哲)·해미 수령 이일·청양 수령 정인희(鄭寅羲)·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등이 모두 와서 함께 군무를 의논하였다. 이때에 경영에서 온 장병들이 많은 약탈을 일삼았다. 순무군관(巡撫軍官) 이창직은 주군을 두루 다니면서 순찰을 빙자하여 평민을 침탈하였고, 억지로 비도의 죄목을 씌우고 뇌물을 요구하여 소요를 겪고 겨우 진정된 백성이 놀라고 두려워서 안정되지 못하였다. 초토사가 바로 패악을 들어 순무영에 조목조목 보고하였다.
15일 [十五日]
일본군이 해미·서산·태안 등지를 돌아보고 소위 제등온(齊藤溫)을 홍주에 남겨두었다.
16일 [十六日]
처음에 성을 지킬 때에 내가 비도를 토벌할 만한 상황을 외람되게 조목조목 논하여 승선 송언회에게 편지를 하였다. 송(宋), 송언회이 그것을 적어 총상(摠相)에게 보여주었는데 총상이 듣고 나를 쓸만 하다고 여겨 이번달 11일에 임금에게 본진(本鎭)의 영장(營將)으로 삼을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여 영장의 관직을 제수하니 사조(辭朝)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저보(邸報)가 오늘 내려오니 영광스러우나 황송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진영(鎭營)의 장리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신례원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도 포상을 받았는데, 김병돈에게는 군무참의(軍務參議)를, 이창욱과 주홍섭 형제에게는 군무주사(軍務主事)를 주었고, 한기경에게는 정려(旌閭)를 베풀었다.
순영(巡營), 공주감영에서 보고가 왔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완비(完匪) 전봉준이 공주를 침범하였고, 김개남은 청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전적(全賊)은 패배하여 논산으로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남포에서 파발(擺撥)이 오고 연이어 급보가 있어 안면도(安眠島)의 병사 150명과 본영의 병사 50명을 더 뽑아서 보냈다.
17일 [十七日]
남쪽으로 토벌을 나간 관군이 보고하기를, “어제 비인(庇仁)의 판교(板橋)에 진군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8일 [十八日]
예산의 의병소(義兵所)에서 비괴 박순칠(朴順七)을 사로잡아서 보냈다. 기교(譏校) 김석교가 최태진(崔台進)을 포박하여 바쳤다.
19일 [十九日]
합덕의 유병 180명이 왔기에 서천에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초토영 참모관 박홍양(朴鴻陽)도 창군(槍軍) 50명을 인솔하여 비인과 남포에 가서 돌아보았다. 이 날에 전임 관리와 교대하고 바로 그 날 밤에 5개 진(陣)을 돌며 돈 100꾸러미를 나누어 주어 강에 술을 풀어 고락을 함께 한다는 은혜를 내보였다.
20일 [二十日]
초토영의 감결에 따라 전후(前後)에 걸쳐 자백을 받고 감옥에 가둔 비도 163명을 그 죄의 경중에 따라 구분하여 총을 쏘아 죽인 자는 40명이고 풀어준 자는 115명이었다. 태안의 거괴 김낙연(金洛璉)은 목을 베었다.
22일 [二十二日]
박홍양의 첩보에 의하면, “완비(完匪)가 경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서 아군이 추격하여 수십명을 사로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수성군(守城軍)이 남쪽으로 많이 출전하였기 때문에 성을 수비하는 것이 허술해졌다. 그래서 합덕의 병사 230명을 징발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초토영의 감결의 지시에 따라 옥에 가둔 비도 14명을 등급을 나누어 처리하였다.
24일 [二十四日]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순무영 군관을 겸임하여 경병을 이끌고 공주를 순찰하였다. 한산과 서천 등지에 이르러 비도를 격퇴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철수를 하였다. 초토사가 본영(本營)에 말하기를, “남쪽으로 원정을 나간 군대가 부대를 정돈하여 환호성이 진동하고 기쁜 기운이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장졸이 여러 날 동안 노숙을 하여 혹시라도 병이 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음식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는 것을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리 보고를 듣고 기다렸다가 경계에 직접 나가 맞이해서 비록 솜옷을 입혀주는 것처럼 할 수는 없더라도 다만 술을 풀어 먹게 하는 것은 보일 수 있다.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한 뒤에 군물을 갖추어 북을 치고 인솔하여 돌아오라”고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남문 밖 오리정(五里亭)에 나가 남쪽으로 원정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남산 10리에 나가 남쪽에 원정을 나간 군대를 맞이하여 위로하고 돌아왔다.
27일 [二十七日]
초토영이 5명의 죄수를 압송하여 공초(供草)를 받아 논보(論報)하였는데, 그것에 대해 회제(回題)하기를, “죄인의 공초를 참작해보니, 전혀 범행한 것이 없다. 만약 형을 가하여 엄중히 문초했다면 어찌 감히 이처럼 소홀하겠는가? 엄중하게 형을 가하여 자백을 받아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시 보고하기를, “영장(營將)의 자질이 본래 우매하여 일의 실상을 조사하는 것에 서툴고, 성품도 나약하여 신문(訊問)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죄수들에게 받은 공초는 핵심을 분명히 하여 실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엄하신 제교(題敎)를 받으니 매우 송구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죄수의 자백이 만약 그 죄가 현저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사안이 아니라면 처음에 평문(平問)을 하고 5청(五聽)을 참조하여 죄인의 말 중에 그 단서를 얻은 뒤에야 죄인의 죄상을 깊이 규명하는 것을 모색하여 비로소 진범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죄안(罪案)을 만드는 데에 급급하여 바로 지나친 형을 가하면 어찌 혹시라도 거짓으로 자백하여 진실을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겠습니까? 지금 여러 죄수들을 보면, 박원배(朴元培)는 연이어 엄중히 문초(問招)를 했으나 한마디도 자백하지 않아 전혀 실정을 알지 못했고 이미 그를 잡아둘 수 있는 진장(眞贓)이 없습니다. 정말로 악명(惡名)을 억지로 더하기가 어렵습니다.
박수선(朴水先)과 서춘성(徐春成)은, 기찰포교(譏察捕校)의 보고에 의하면, ‘접주(接主) 손치재(孫致才)가 이위원(李渭原)의 집에 도망가서 숨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밟아 그 집에 가서 보니 손한(孫漢), 손치재은 이미 도주하였습니다. 이씨네 집주인이 종 2명을 지목하여 저 놈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잡아왔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기찰포교의 보고도 의심스럽습니다. 손적(孫賊), 손치재이 이씨 집에 숨었다는 것을 알고 잡지 못했는데 어찌 그 주인은 놓아주고 주인의 말만 따라 의심을 받은 종을 잡아옵니까? 지금 만약 그 실정을 파헤친다면 일은 커져 쉽게 널리 퍼지고 종 2명에게 지나치게 형을 가해 적을 잡을 종적을 찾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웅이(姜雄伊)는 정행선(鄭行善)의 접솔(接率)로 그의 지시를 듣고 재물과 가축을 빼앗는 곳에 따라갔다고 자백했습니다. 한금달(韓今達)은 말을 잘 둘러대고 벗어날 계책만을 찾으나 양반가의 땅문서를 별 어려움이 없이 빼앗은 것은 이미 그의 공초(供招)에 나와 있어 다른 행패는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2놈에게 먼저 해당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전형(典刑)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산의 선전관을 지낸 이병재(李秉在)는 지독하게 비도의 화를 입어 가산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심지어 사판(祠版), 신주이 변고를 겪고 관고(官誥), 교지는 잃어버렸다. 그 참담하고 치욕스러움에 사람들이 모두 매우 놀랐다. 그 괴수(魁首) 한철록(韓喆祿)과 김치성(金致成)은 초토영에서 염탐하여 잡아서 본영(本營)에 보내왔기 때문에 자백을 받아 논보하고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이 때에 각 고을과 마을에서 비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이 모두 보복을 하려고 다투어 잡아와서 서산과 태안의 거특(巨慝), 우두머리으로 지목하거나 홍주에서 성을 침범한 수창자(首倡者)로 지목하여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나 처벌할 때에는 늘 사실과 어긋났다. 만약 신정(訊政)의 문란함을 특별히 조치하지 않는다면 뜻밖의 재앙을 겪은 억울한 백성을 거의 안정시킬 수 없어 반드시 떠돌게 될 것이다. 초토사에게 말씀을 드려 여러 고을에서 잡아서 바친 자들은 해당 고을에 돌려보냈고 각 마을에서 압송해 온 자는 조사하여 다시 해당 마을로 하여금 논보하게 하였다.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반드시 증거를 가지고 대면하여 물은 뒤에 판결을 하고 사사로이 체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법망에서 빠진 유명한 거괴는 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29일 [二十九日]
이때에 경박하고 추잡한 무리들이 교졸을 사칭하여 마을에 출몰하면서 민간에 근심을 끼쳤다. 이에 관할하는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 말하기를, “영문(營門)의 교졸들이 외촌(外村)에 근심을 끼치고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는 것은 비록 평상시라도 이미 없애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폐이다. 더욱이 이런 난리를 겪은 뒤에 혹시 일 때문에 나가서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하거나 교졸을 사칭하여 기회를 이용해서 토색질을 저지른다. 이것을 만약 특별히 금지하지 않는다면 난리 뒤에 겨우 사는 백성이 어찌 견디겠는가? 이것이 초토영에서 조목조목 나열하여 관문으로 일러 경계하는 이유이다. 본영(本營)에서도 특별히 단속하여 그 폐습을 없앨 것이다.
소위 영속(營屬)은 본래 산란하여 기율이 없는 무리로 갑자기 규정을 만들어 다스리기가 어렵다. 또한 혹시 비도(匪徒)의 남은 무리들이 영속을 사칭하고 저녁에 외로운 마을에 칼을 들고 행패를 저지른다는 얘기가 종종 들리는데, 이것이 과연 정말인가? 지금부터는 비록 진짜 교졸이 공문을 가지고 나온 자이더라도 만약에 본관(本官)에게 공문을 보내지 않고 먼저 체포하는 자는 그 마을에서 잡아 두고 관에 보고하여 분부를 기다려서 거행하라. 만약에 공문이 없이 소란을 저지르는 자는 진짜 가짜를 막론하고 난류이니 모두 결박하여 본관에 잡아 들여서 금지하는 방도로 삼을 것이다. 또한 관문을 받는 곳에서 본읍 이속(吏屬)의 간악한 꾀와 허위 보고 때문에 기꺼이 잡아 보내지 않으려는 폐단이 있어 영읍에 불화가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보증하기 어렵다. 늘 이런 일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만약 각자 그 도를 다하고 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관은 걱정할 일이 없고 백성은 믿고 안심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관문으로 민간에 영(令)을 내려 타일러서 지키도록 하고, 감영의 비밀 명령에 따라 기찰하여 잡는 자에게는 그 때에 이르러 특별한 지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0일 [三十日]
적의 위협이 조금 그치어 성의 수비를 막 풀고, 남문 밖에서 크게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번(番)을 교대하는 촌민을 해산하여 보내고 영부(營府)의 관속만으로 나누어 각 문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