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1일 [十二月初一日]
초토사가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에 배례(拜禮)를 하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 선비의 상견례를 행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뛰어난 자를 뽑아 재실(齋室)에 거처하여 책을 읽고 5일 동안 강(講)을 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선비에게 땔나무·쌀·기름·소금을 제공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배분했다. 그래서 선비의 기세가 더욱 진작되었다.
초 5일 [初五日]
이보다 앞서 향인(鄕人) 유기석(劉基錫)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었는데, 동도가 일어날 때에 억지로 가입시키려고 하니 유(劉), 유기석는 바로 거절하고 도리어 동도를 역류(逆流)로 지목하여 크게 그들을 거슬렀다. 그들이 기병(起兵)하여 성을 침범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류가 유기석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중에 이흥수(李興水)라는 자가 남보다 먼저 칼로 베어야겠다고 하니 유기석이 크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적(李賊), 이흥수을 기찰하여 체포해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초 8일 [初八日]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평민을 침탈하였다. 가는 곳마다 인가의 자산을 남김없이 약탈하였다. 초토영에서 잡아 옥에 가두고 순무영에 논보(論報)하여 그 회제(回題),에 따라 북문에서 목을 베었다.
초 9일 [初九日]
결성 화산(花山)의 승선을 지낸 이설(李偰)이 그 촌민을 감독하여 월산(月山)에 보루를 쌓고 초토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저의 생각으로 지금의 계책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병사를 가려 뽑는 것이고, 둘째는 보루를 수축하는 것입니다. 병사를 뽑은 뒤에 토벌을 할 수 있고, 보루를 수축한 뒤에 방어할 수 있습니다. 병사는 정예에 있지 많이 징집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병사 10,000명이 모여도 정예 수천명을 모집한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병사를 가려 뽑은 뜻입니다. 쳐다보고 공격하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내려다보며 물리치는 것은 계란을 누르는 것처럼 쉽습니다. 평지의 금성탕지(金城湯池)는 산성(山城)에서 총알을 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보루를 수축한 뜻입니다. 근래의 일로 본다면 관군은 모두 가르치지 않은 백성입니다. 이것은 시장사람을 몰아가서 싸우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적도도 일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고 적이 적으면 적이 패하고, 우리가 적고 적이 많으면 적이 이기니 승패의 운수는 단지 병사들의 많고 적은 데에 있고 병사들의 강하고 약한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산에서 손해를 본 것은 적이 많고 우리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쳐들어오는 날에 관군이 비록 많았어도 겁을 먹고 나아가지 못했고 일본군은 비록 적었어도 힘을 쓸 수 있었습니다. 병사를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은데서 쓰임새가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한번 이긴 것이 비록 다행스럽다고 해도 이웃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은 병사는 혹시 토비(土匪)에게 쓸 수는 있으나 어찌 외구(外寇)에게 쓸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두려워하며 한심스럽게 여긴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병사를 가려 뽑는 것을 시급하게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성을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근래에 여러 고을이 성을 지키지 못하고 함락된 것은 사람의 계책이 훌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에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홍양의 성을 지킨 것을 살펴보면, 특별히 단속하고 연락할 곳과 험준하고 막혀서 근거할 땅이 없습니다. 평지에 넓은 들판이고 사방에 막힘이 없어 만약 적도에게 수 만명을 인솔하게 하여 요충지를 나누어 점거하여 밖에서 구원할 길을 끊어버리고 반드시 싸우지 않고 오래 끌었다면 승패의 운수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적이 하루의 계책이 없고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저절로 흩어져 도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은 토비는 막을 수 있어도 외구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보루의 수축을 급하게 여기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병사를 뽑는 것은 바로 옛날에 선봉(先鋒)을 선발하던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봉을 뽑지 않은 군대는 반드시 패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당의 태종은 정예병 수천명을 뽑아 모두 검은 옷에 검은 갑옷을 입혀 그들을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삼았는데, 선봉이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었습니다. 송나라 때에 악비(岳飛)·한세충(韓世忠)·유기(劉錡)같은 사람들은 함께 할 만한 자가 거의 없었으나 상대를 만나면 반드시 승리했던 것은 정예병사 때문이었고, 유인(劉麟)이 70만의 군사를 가지고 회수(淮水)가에서 패배했는데, 그것은 민병(民兵)때문이었습니다. 선봉을 뽑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사람 중에서 겁쟁이는 10명 중에 9명이고 용감한 사람은 10명 중에 1명입니다. 그들이 평소에는 함께 대오를 이루어 한결같아서 구분할 수 없지만 강한 상대를 만나면 겁쟁이는 먼저 무너지고 용감한 자도 달아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형세가 마치 성난 파도처럼 서로 이끌어서 모두 무너지면 비록 맹장이 있어 그들을 나아가게 해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관군과 유병의 숫자를 살펴보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 건장하고 용감한 자를 뽑으면 100명 중에 10명, 1,000명중에 100명을 반드시 얻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또한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유학(幼學)·한량(閑良)·공사천(公私賤)·관속(官屬)·재인(才人)·승도(僧徒)·백정(白丁) 등을 막론하고 용감하고 건장한 자를 모집하여 각각 몇 사람을 추천하게 하는데, 그 고을의 크고 작은 규모에 따라 100명이나 50~60명 또는 20~30명으로 하고 면천(免賤)하여 그 몸을 영화롭게 하거나 후한 상으로 그 뜻을 격려하십시오. 일일이 불러서 그 모습을 먼저 살펴보고 그 힘을 시험해 본 뒤에 기예(技藝)를 가르치십시오.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수천의 정예병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선봉으로 삼아 먼저 올라가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에 쓴다면, 옛날에 배외군(背嵬軍)이라고 하던 것도 이들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까마귀가 모인 것처럼 훈련되지 않은 병사는 망을 볼 때에 쓰거나 과시하여 적의 의심을 도모할 때에 쓸 수가 있어도 어찌 충돌해서 적을 꺾어 함락시키는 데에 쓸 수가 있겠습니까? 싸움은 형세로 승리하고 병사는 사기에 따라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 형께서 이것에 유의하신다면 나라와 군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보루를 수축하는 것은 바로 옛날에 험준함에 근거하여 청야 전술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는 지형의 이로움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아성(亞聖), 맹자과 같은 재주로 전국(戰國)시대의 세상에서 늙었는데, 어찌 보고 후세에 교훈을 남길 것이 없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바다의 귀퉁이에 치우쳐있고, 산천이 험하고 막혀있기 때문에 용병하는 방법에 있어 공격하여 얻는 데는 못하나 지키는 데에는 뛰어납니다. 지키는 방도는 산성(山城)만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에 적이 침입하여 갑자기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선산(善山)의 백성들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지켰고, 문화(文化)의 백성들은 구월산성(九月山城)을 지켰습니다. 권원수(權元帥), 권율가 독성(禿城), 독성산성을 지켰고, 학관(學官) 안정란(安廷蘭)은 유민(流民)을 이끌고 인천(仁川)을 지켰습니다. 산성이 방어에 효과가 있음을 이전의 교훈이 이와 같습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제후가 싸우면 그 땅은 싸움터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수선한 때를 맞아 백성이 모두 피난하여 흩어지면 마을은 비고 사람과 연기가 끊어져서 병사의 형세는 더욱 고립되어 관은 스스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미리 험준함에 의지할 곳을 만듭니다. 변고를 듣고 부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이끌며 식량과 재물을 운반하게 하여 들판을 비우고 기다린다면 백성은 흩어지지 않고 끝내 믿고 의지하며 공사(公私)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굳게 지킬 것입니다. 비록 100만의 강한 적이라도 하나의 작은 보루를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대개 홍양 경내에 보루를 쌓을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충지를 만들어 보호할 만한 것은 월산만한 곳이 없고 가까이에 위치하여 구원을 알릴 수 있는 곳은 용봉(龍鳳)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두 곳은 실로 홍양의 보장(保障)으로 결코 등한시 할 곳이 아닙니다. 비유하면 도성의 남한산성·북한산성과 같습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이 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 곳의 보루를 쌓는 일은 바로 우선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옛 보루가 있던 곳은 그 터를 수축하고, 보루를 쌓을만한 곳은 새로 만들어야 관은 지킬만한 방도가 있고 백성은 흩어질 걱정이 없습니다. 곳곳마다 서로 바라보며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돌처럼 널려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홍양에 있어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막고 자식과 동생이 아버지와 형을 보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세(聲勢)가 서로 호응하고 명령이 소통할 수 있어 성공의 계책은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형께서 유념하신다면 나라와 군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 형님은 지금 세상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기가 비록 피부를 물어도 쥐는 실제로 맛있게 먹고 여우는 안색을 바꾸거나 고래는 머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어진 사람과 군자가 불행하게도 이런 때를 만나 어찌 운수와 운명에 맡기고 모른 척하며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이 만약에 어려움에 닥쳐서 회피하여 몸을 온전히 하고 집안을 보호하는 것에 마음을 쓴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고 제갈공(諸葛公)이 직접 고생을 다하고 악무목(岳武穆)이 등에 땀을 적시며 은혜를 갚은 것을 스스로 기약하여 대의를 세상에 펴고자 한다면, 병사가 아니면 토벌할 수 없고 성이 아니면 지킬 수 없습니다. 선봉을 뽑고 보루를 수축하는 것이 실제로 오늘에 시급한 일입니다.
국가가 편안하여 즐긴 것이 이미 오래되어 군제가 해이해져 흙처럼 무너질 재앙이 조만간에 닥칠 것이지만 일을 맡은 사람은 어리석어 알지 못하고 사람은 알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통곡하고 눈물이 흐릅니다. 계속하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지만 멈춰지지 않습니다.
형님이 저의 생각을 선택하여 채용할 뜻이 있다면 선봉을 뽑는 방법과 보루를 수축하는 제도도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또 제가 정성을 다하려는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군율을 엄중히 하는 것입니다. 군법은 반드시 일정한 규정이 있어 은혜로 맺으면 오기(吳起)처럼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고 법으로 처단하면 제갈량처럼 친구를 참수합니다. 모든 일에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군율이 엄하다고 합니다. 군율이 엄하면 차마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군율을 엄중히 하지 않고 은혜만을 주로 한다면 병사는 나와 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끓은 물에 나아가게 하고 불을 밟게 하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곽자의(郭子儀)가 관용으로 병사를 다스린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때가 같지 않고 형세가 다른 점이 있으니 형께서는 재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9일 [十九日]
초토사가 금마천(金馬川)에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직접 전사한 장병과 순절한 사람에게 술을 부어 제사를 지냈다. 또한 사람을 보내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고하고 죄를 지어 죽은 사람을 불러 안심을 시켰다. 김병돈을 제사지내며 말하기를, “내가 살리려고 하였고 적이 죽이려고 한 것을 사람들은 알 것이다.
임금 섬김을 충이라고 하고 어미 섬김을 효라고 했으니 달리 무엇을 비교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주홍섭 형제를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아! 2명의 주씨 형제는 누가 더 나은지를 알기가 어렵다. 어찌 애주(愛蛛)의 정을 잊어버리겠는가”라고 하였고, 한기경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네 아비가 너를 부르니 붉은 대추(棗丹)가 있고, 네 어미가 너를 기다리니 색동옷(班衣)이 있네. 붉은 작설(綽楔)이 너의 집안을 빛나게 할 것이니 너는 와서 임금의 은혜를 받으라”고 하였다.
병사들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자식을 기다리려고 마을 어귀에 가고 형님을 보러 산등성이에 올라가며 아내는 울부짖고 어린 애가 우는 것이 내 옆에 있는 듯하다. 나라에서 은전(恩典)을 베풀 것이니 죽고 사는 것에 유감을 갖지 말고 너의 혼령은 각각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창욱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예산에서 잃어버린 것을 홍주에서 거두어서 산 자가 화를 면했으니 죽은 자의 공이다”라고 하였고, 교생(校生) 6명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자리가 우뚝하니 누구나 알고 높이지 않겠는가? 이 적들이 모르고 이 문을 감히 침범했는데 너희 6명이 없었다면 누가 성인의 관(冠)과 선비의 의복을 지키겠는가? 선비는 죽었어도 바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유기석을 제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진실로 죽음에 합당하여 그 꾸짖음에 위엄이 있고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았으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라고 하였고, 죄를 지어 죽은 사람을 불러서 타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바로 귀신이고 귀신은 사람보다 영험하다. 귀신은 다시 생각해보아라. 하늘이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스스로 죽지 못하고 누가 죽였는가? 아! 너희들아, 내 마음이 정말 슬프다”라고 하였다.
20일 [二十日]
조정에서 판서(判書) 박제관(朴齊寬)을 파견하여 호서를 선무했는데, 이 날 홍주에 도착했다.
27일 [二十七日]
치사면(雉寺面) 신리(新里)의 옥사(獄事)를 초토영에 논보하기를, “분부해서 도달하여 받은 감결에 고남(高南) 아랫마을에 사는 이성진(李成振)의 발괄(白活)에 의하면, ‘그의 아비가 애초에 동도에 물들지 않았는데, 10월 그믐에 덕산땅에 갔다가 치사 신리의 윤덕배(尹德培)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덕배를 지금 잡아들여 법에 따라 처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죄인 윤덕배를 회동하여 장자(狀者)를 압송해서 상세히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하게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윤덕배를 바로 잡아들여 일찍이 이성진의 아비와는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어떻게 때려서 죽는 데까지 이른 연유를 엄중히 조사하고 세밀하게 물었더니, 죄인이 말하기를, “저는 성진의 아비와는 평소에 얼굴을 알지 못하는데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지난 10월 그믐은 바로 동적(東賊)이 성(城)을 침범했다가 패배하여 흩어지는 때였습니다. 제가 사는 치사면의 유회 회원들이 초막을 설치하고 지켰습니다. 도망가는 동학의 무리를 만나면 바로 검문하여 죽이거나 잡아서 초토영에 바친 자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유회에 참여하여 분명히 목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마침 어떤 노인이 황급히 뛰어 지나갔는데, 유회의 회원 한사람이 잡아서 물어보니 말이 모호하고 행색이 수상하였기 때문에 그 짐을 뒤져보았더니 동학표(東學標) 2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의 분노가 일제히 폭발하여 한 목소리로 죽여야 한다고 하고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찼는데 어찌 그 성명을 물어 볼 겨를이 있으며 누가 그의 거처를 알겠습니까? 그래서 죽게 되어 바로 땅에 묻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홍천(洪天), 天은 川의 오기 지동(池洞)에 사는 김공실(金公實)이 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 동네에서 죽여서 묻은 자가 혹시 고남의 이씨 노인인가? 지금 그의 아들 성진이 아비의 시신을 찾으려고 가까운 마을에서 사방으로 찾고 있다. 설령 그것이 확실한 지를 알지 못하고 알려 주더라도 혹시 맞으면 성진의 입장에서도 하나의 좋은 일이다’라고 하기에, 저는 어리석은 생각에 일이 생길 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방하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성진이 땅을 파서 진짜 자신의 아비임을 확인하고 시신을 지고 갔기 때문에 처음으로 그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진이 공실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아비가 저에게 맞아서 죽었다고 하며 저를 주범으로 여겨 영문(營門)에 고발을 하였으나 이것은 적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곳에 있던 사람이 적류(賊類)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때리려고 하지 않으며 누구나 죽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은 자의 죽음은 실제로 사람들이 난당을 함께 없애려는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 저의 이름만이 주모자로 거론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분명하게 조사하여 논보해서 뜻밖의 화를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공실을 바로 잡아오려고 하니 소장을 낸 이성진이 김공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자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잡아들여 조사하였더니, 김공실이 말하기를, “이성진의 아비가 신리에서 죽은 일은 들어서 알고 있으나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난 11월에 신리를 가는 도중에 이성진과 4~5명이 그 아비의 시신을 찾으려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녔기 때문에 저는 저 윤덕배를 만나 성진이 시신을 찾는 일을 이야기하고 만약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혹시 너희 마을에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하였더니, 윤가(尹哥)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어찌 걱정하겠는가? 시신이 있는 곳을 이미 알고 있으니 네가 알려주라. 하필 나에게 묻는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정말로 알려주었습니다.
성진이 시신을 찾은 뒤에 도리어 저를 의심하고 그것을 알게 된 연유를 따졌기 때문에 윤가를 통해 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진이 이것으로 윤가를 주모자로 삼은 것이지 실제로 제가 정녕 증거를 내세워 준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네가 성진의 친척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시신을 잃어버리거나 찾는 것은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신리의 주민이 아닌데 남의 동네에 일이 있거나 없는 것을 네가 어찌 간섭하는가? 왕래하며 일을 찾아 농간을 부리고 사단을 야기하니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너는 이가(李哥), 이성진에게 시신을 찾은 것을 공으로 삼아 사심이 있고 해당 마을에는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공갈을 치며 토색질을 했을 것이다. 마음을 먹고 모의를 한 것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하라. 또한 네가 성진 아비가 신리에서 죽어 어디에 묻었는지를 누구로부터 알게 되었는지를 한 마디 한 마디 바른대로 자백하라”고 하였더니, 김공실이 말하기를, “이가에게 정말로 조금도 사심에 구애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리 마을에서 호(戶)마다 2두(斗)의 조(租)를 받았고, 이번 일은 저의 장인 하여범(河汝凡)이 신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바로 하가(河哥), 하여범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신리 마을의 상하노소(上下老小)가 모두 와서 전후의 사실을 등소(等訴)하였는데, 윤덕배의 공초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신리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직접 때렸다고 하며 서로 다투어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그 일을 진술하기를, “지난 10월 그믐은 바로 어떤 때입니까? 저 사방으로 흩어진 적을 사람들이 잡아 죽였습니다. 어리석은 저 성진의 아비는 바로 늙고 패악한 퇴물로 망령되게도 평탄한 길을 한가롭게 걸을 계책을 내고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일부러 어겼으며 비도의 표를 얻어 몸을 보호하는 부적을 만들었습니다. 유군을 만나 잡혀서 그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갔는데, 사도(邪道)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니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만약에 신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는 의를 알아 그 표를 가지고 가서 그 목을 바치고 그 곳의 일을 바로 보고하게 했다면 공을 논하여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찌 오늘의 송사가 있었겠는가? 지금 이 작은 잘못으로 난리 중의 마을사람들을 심하게 추궁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짐 속의 표는 지금은 검증할 곳이 없어 의심할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유막에서 사람을 보고 검문한 것은 바로 통행하는 규정으로 선비를 보호하고 비도를 토벌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세상의 일상적인 실정입니다. 성진의 아비만 절대로 검문하지 않을 리가 없고 죽일 만한 행적이 없다면 반드시 보호할 유도(儒徒)인데 어찌 악의를 가지고 가담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고 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로 헤아려보아도 의혹을 깨뜨릴 수 있으니 가식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성진에게 말을 한다면 사람의 자식으로서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에 누군가가 때렸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고발한 것은 당연하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늙은 아비의 무모한 행동을 만류하지 못하여 위험한 곳에 들어가게 했고, 이후에는 원수의 물증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실정에 가깝지 않아서 모두 그 말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 말로 한다면, 예로부터 병란 중에 뜻밖에 죽음을 당한 자가 어찌 한정되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참을 지나 의심스런 처지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금 성진의 아비는 반드시 죽을 처지를 자초했고 또한 죽일만한 단서가 있어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송사의 실정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십시오. 이 송사의 발단은 전적으로 김공실이 야기시킨 데에서 연유했으나 다행히 이웃마을에 일이 있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남을 위해 시신을 찾아주어 대략 덕색(德色)이 있을지 염려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호마다 조 2두의 재물을 거두고서도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여 다시 어리석은 백성에게 화를 전가하고 법을 훼손하려고 했으나 그 간사한 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기꾼은 징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진옥(鎭獄)에 가두시고, 윤덕배는 비록 주범으로 지목받고 증거를 알려준 무고(誣告)를 받았으나 마을 전체의 일인데 죄가 편중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는 처분을 기다려 거행할 것이고 모두 그대로 옥에 가둬두며 연유를 첩보합니다.
29일 [二十九日]
초토사가 본영(本營), 초토영의 장관(將官)과 각 고을의 유회장(儒會長)·농보장(農堡長)·소모관(召募官)· 의병장·전망인(戰亡人)·절의인(節義人)·열행인(烈行人)의 공로(功勞)와 사실을 따로 갖추어 성책해서 논보하였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군부장관 (軍部將官)
영장(營將) 홍건(洪楗)·전 영장(前 營將) 한택구(韓澤屨)·토중군(土中軍), 향병의 지휘관 박봉진(朴鳳鎭), 별군관(別軍官) 전 군수(前 郡守) 이주승(李周承)·유학(幼學) 정기황(鄭基璜)·조종세(趙鍾世)·서상신(徐相臣)·정한조(鄭翰朝)·출신(出身) 송태현(宋台顯)·최낙규(崔洛圭)
참모관(參謀官) 전 중군(前 中軍) 박홍양(朴鴻陽)·전 도사(前 都事) 한응준(韓應俊)·전 영장(前 營將) 장정식(張定植)·유학(幼學) 이종원(李鍾遠)·이두종(李斗鍾), 종사관(從事官) 전 도사(前 都事) 윤자혁(尹滋赫), 대솔군관(帶率軍官) 전 오위장(前 五衛將) 표구석(表龜錫)
양향관(糧餉官) 좌수(座首) 이규승(李奎承), 영선감관(營繕監官) 전 오위장(前 五衛將) 장영식(張永植), 오진영관(五陣領官) 김상범(金商範)·김종헌(金鍾憲)·김주현(金周炫)·한상익(韓相翼)·이능연(李能淵), 순초군관(巡哨軍官) 이석범(李錫範), 기교(譏校) 김석교(金錫敎)
수성감관(修城監官) 최동훈(崔東薰)·이흥조(李興朝)·한덕용(韓德鏞)·최응순(崔應淳)·출신(出身) 이희원(李熙元)·이영식(李永植)·유상묵(柳相黙)·이희겸(李熙謙)·이계춘(李啓春)·박춘식(朴春植)·한영륜(韓永崙)·심은서(沈恩瑞), 선계감관(繕械監官) 이응로(李應老)·호장(戶長) 김관섭(金寬燮)>
기관(記官) 이창억(李昌檍), 형리(刑吏) 최학연(崔學淵).
유회장(儒會長)
전 승지(前 承旨) 정헌조(鄭憲朝)·전 군수(前 郡守) 김세희(金世熙)·전 현감(前 縣監) 이기호(李基鎬)·전 군수 이주승(李周承)·전 학관(前 學官) 이능순(李能淳)·전 오위장 박영시(朴永蓍)·진사(進士) 조문영(趙聞永)·전 참군(前 參軍) 조주현(趙周顯)·전 오위장 김영한(金永漢)·출신(出身) 오주영(吳冑永)·정인호(鄭寅好)·유학(幼學) 이장헌(李章憲)·이근학(李根學)·임익현(林翼鉉)·윤용유(尹容裕)·서인보(徐仁輔)·이건영(李建永)·심광택(沈光澤)·정기황(鄭基璜)·정순해(鄭舜海)·이상우(李相宇)·김상중(金商重)·박순환(朴舜煥)·최의영(崔義榮)·안창식(安昌植)·송진옥(宋瑨玉)·김병희(金秉熹)·채상만(蔡相晩)·김복동(金福東)·전 학관 이규응(李奎應)·출신 남건희(南建熙)·유학 홍관후(洪寬厚)·윤선직(尹善稷).
농보장(農堡長)
전 현감 민기호(閔岐鎬)·전 학관 이규응(李奎應)·진사 표학수(表鶴洙)·유학 황영수(黃英秀).
소모관(召募官)
진사 이장규(李章珪).
의병장(義兵將)
전 현감 이시우(李時宇).
전망인(戰亡人)
증 군무참의(贈 軍務參議) 김병돈(金秉暾)·증 군무주사(贈 軍務主事) 이창욱(李昌旭)·주홍섭(朱弘燮)·주창섭(朱昌燮)·정려(旌閭) 한기경(韓基慶)·유학 홍경후(洪敬厚)·이종국(李鍾國)·동몽(童蒙) 신태봉(申泰鳳)·태안(泰安) 전 감찰 김계련(金啓連)·한량(閑良) 이명숙(李明淑)·포수(砲手) 김우련(金佑連)·박신근(朴信勤).
절의인(節義人)
홍주 유학 유기석(劉基錫)·덕산 전 도사 황종원(黃鍾元)·해미 유학 김상화(金商華)·예산 전 오위장 김명황(金命璜)과 그의 아들 한정(漢廷)·서산의 아전 송봉훈(宋鳳勳)·홍주 교생(校生) 오경근(吳景根)·최민지(崔民志)·최학신(崔學信)·방세영(方世永)·방석규(方錫珪)·이만오(李萬五).
열행인(烈行人)
홍주 고(故) 학생(學生) 유진뢰(兪鎭雷)의 아내 이씨·송종록(宋鍾祿)의 아내 정씨(鄭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