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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군부의 장관·유회의 회장·의병장·소모관·전몰자·열행인의 제목에 대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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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장관·유회의 회장·의병장·소모관·전몰자·열행인의 제목에 대한 보고 [報軍部將官會長及義兵召募戰亡烈行人題目]

군부장관 영장 홍건
계책을 다하여 벽루(壁壘)의 모양을 바꾸어 성을 지켰다. 어머니의 병환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2명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비유를 인용할 수 있다. 그 자리에 나아가 융무(戎務)를 보아 비로소 천리마(千里馬)의 숨겨진 뜻을 폈다.

전 영장 한택구(韓澤屨)
처음에는 담담하게 일이 없는 듯하다가 끝내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부절(符節)을 지니고 가서 위무(慰撫)를 다했으니 공적에 따라 보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갑자기 병으로 교체가 되니 모두 그가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중군(中軍) 박봉진(朴鳳鎭)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확실하고 조심스러우며 근실하였다. 예산에서 패하여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포위를 뚫고 혼자 탈출하였다. 해미성에서 선봉이 되어 승리했으나 공을 사양하고 그것을 자처하지 않았다.

별군관(別軍官) 이주승(李周承)
방략이 넉넉하고 명성이 일찍 드러났다. 유음(諭音)을 펴서 비도들을 귀화시키고 오랫동안 고생하며 면을 돌아 유회를 창도하여 저 강한 적을 상대하고 떨쳐 일어나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별군관 정기황(鄭基璜)
처음에 유장(儒長)이 되어 인심을 동요시키는 소문을 진정시켰다. 늦게 좌막(佐幕)에 임명되어 마침내 여러 번의 전공(戰功)을 세웠다.

별군관 송태현(宋台顯)
군무를 잘 알고 과감한 용기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왕사(王事)에 힘써서 부탕도화(赴湯蹈火)의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별군관 최낙규(崔洛圭)
책략들을 모두 수행하여 막부(幕府)의 속관(屬官)이 모두 추대하였다. 치밀하고 상세하게 공무를 처리하여 군읍의 선비가 모두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하였다.

참모관(參謀官) 서상신(徐相臣)
억지로 막료(幕僚)을 응낙하여 고상한 선비의 기상을 더럽히는 것 같았으나 묵묵히 장막(帳幕)의 계책을 운용하여 아낙네가 치밀하게 도모하는 것을 보는 듯하였다.

참모관 정한조(鄭翰朝)
적의 동정을 정탐하여 안으로 기포(譏捕)하는 방법에 도움을 주고, 유군을 인솔하여 밖으로 성원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참모관 박홍양(朴鴻陽)
무예가 출중하고 일처리가 뛰어나서 적의 기밀을 기찰하였다. 직접 정찰을 나가 1달 동안 고생을 하며 1개 성(省)에서 도적의 뒤를 밟아 체포하였다.

참모관 한응준(韓應俊)
병학(兵學)에 정통하고 당시의 깃발 색깔을 바꿨다.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반년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괴로움을 겪었다.

참모관 장정식(張定植)
부절을 맞춘 것처럼 계책을 세운 것이 어긋남이 없었고, 재물을 내어 군수를 보태어서 군중(軍中)이 호경지탄(呼庚之歎)을 면하였다.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경내(境內)에 장정(壯丁)을 조사하는 수고가 없게 하였다.

참모관 이종원(李鍾遠)
유회를 이끌고 격문을 전하여 이웃 군의 사람들 중에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루터의 길을 끊고 배를 침몰시켜서 이웃 성省의 적이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참모관 이두종(李斗鍾)
막료를 응낙하고 지혜를 내어 계책을 도와서 늘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성(城)이 위태롭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구원하고 1대(隊)를 담당하였다.

종사관(從事官) 윤자혁(尹滋赫)
저 양호의 교차하는 곳에 비도가 가장 극성스러운 것을 보고 포의(布衣)를 입은 일개 선비로 몸을 떨치어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고을의 유회가 뒤를 따랐고 경내를 나간 관군이 모두 앞을 다투었다.

종사관 조종세(趙鍾世)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이 군사의 계책을 도와 먼저 승패를 정했는데 손바닥에 보여주는 것처럼 확실하였다. 적의 동정을 정찰하여 요충지를 잘 알았다.

종사관 표구석(表龜錫)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군향(軍餉), 군량을 돕고 단지 그릇을 기울여 남기는 것이 없었다. 서명좌막(署名佐幕), 막료으로 돌과 화살을 무릅썼으며 공로가 있었다.

향관(餉官) 이규승(李奎承)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여 실제로 훌륭한 아녀자와 같은 손길이 있었다. 먹을 때마다 반드시 배부르게 먹여서 병사들의 환심을 깊이 얻었다.

영선(營繕) 장영식(張永植)
온 성내의 집이 기다렸다가 횃불을 들어 5개 진(陣)의 병사들이 추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오진영관(五陣領官) 김상범(金商範) 등 5인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촌정(村丁), 장정을 5개 부대로 나누어 그들을 교습(敎習)하는데 늘 고생을 하였고 늘 갑옷을 입어 이(虱)가 생겨날 정도로 삼동(三冬)을 지나며 잠잘 겨를이 없었다.

순초군관(巡哨軍官) 이석범(李錫範)
적고 나약한 군사들을 지휘하여 홀로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직접 크고 작은 싸움에 참가하여 자주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교(譏校) 김석교(金錫敎)
기찰을 매우 은밀히 하여 사정을 알아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어렵고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법망에서 빠진 우두머리를 결박하였다.

수성감관(修城監官) 최동훈(崔東薰) 등 12명
판삽(版鍤)을 가지고 일을 끝냈다. 3리(里)의 성(城)과 7리의 곽(郭), 그리고 자물쇠를 단단히 하여 재난에 대비하였다. 1명이 10,000명을 감당하여 성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선계감관(繕械監官) 이응로(李應老)
도검(韜鈐)을 다루는 데에 뛰어나 요속(僚屬), 동료이 모두 연달(鍊達), 장인로 추대하여 공야(工冶)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그 기계가 정밀하고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호장(戶長) 김관섭(金寬燮)
7효(孝) 집안의 가훈을 이어받아 30일 동안 싸움터에 나가 힘을 다해 충성으로 직접 앞장을 섰다.

기관(記官) 이종응(李鍾應)
사악한 술법(術法)을 배척하여 미약할 때에 막았다. 수리(首吏)로서의 책임을 자임하여 군무를 도와 변고에 대비하여 실제로 병사를 만족시키는 계책이 많았다.

형리(刑吏) 최학연(崔學淵)
공이(公移), 공문를 다루는 데에 민첩하여 혼자 감당하며 고생을 하였다. 포로의 사송(詞訟)에 조리가 있었고 반드시 적의 실정을 찾아내었다.

홍주(洪州) 도회장(都會長) 정헌조(鄭憲朝)
태평성대의 연로한 관리로서 많은 선비들의 영수(領袖)였고 3가지를 갖춘 달존(達尊)으로 사람들의 신망이 일찍이 있었다. 소속한 유회를 이끌어 일향(一鄕)의 사기(士氣)가 그것에 의지하여 비로소 진작되었다.

유회장(儒會長) 김세희(金世熙) 등 35명
공황(龔黃)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바른 가르침을 오랫동안 닦아 집에 거처하면서도 벼슬하는 것처럼 하여 늘 나라를 걱정하며 공(公)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한 기운과 한 목소리로 일어나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거사를 하였다.

김복동(金福東)
70세의 늙은이가 어찌 구하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충임을 알 뿐이다. 천만 명을 내가 가게 할 수 있다. 먼저 유생을 일으켜서 싸움터에 나갔다. 덕산德山·면천沔川· 당진唐津의 홍관후洪寬厚와 해미海美·서산瑞山·태안泰安의 윤선직尹善稷. 6개 고을에 관이 비게 되어 어지러움이 끝내 진정되기가 어려웠다. 2명의 선비를 얻어 백성을 이끄니 완악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비로소 향배向背를 알게 되었다.

농보장(農堡長) 민기호(閔岐鎬) 등 4명.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요새에 자리잡아 그것에 의지하여 밖으로부터의 구원부대로 삼았다. 4개의 방패를 동여매고 4개의 갑옷을 수선하여 급보를 들으면 떨쳐 일어나서 반드시 먼저 달려갔다.

소모관(召募官) 이장규(李章珪)
실제로 공로가 많아 상을 베풀어야 한다. 의병의 깃발을 달고 병사를 모집하여 모두 소모의 직분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서첩(書帖)을 거두었다가 다시 주니 출처에 명분이 없는 것이 애석하다.

의병장(義兵長) 이시우(李時宇)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으고 집안의 재물을 쏟아 그 군량을 끊이지 않게 하여 주둔한 병사들이 감복하여 따랐다. 극악한 적을 잡으면 반드시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하였고 흩어진 백성들이 그를 믿고 안정되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병돈(金秉暾)
마음으로 책략을 다하여 먼저 전공(戰功)을 이루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따라 죽음에 나아가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담략을 미루어 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끝내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창욱(李昌旭)
부고(桴鼓)를 잡고 병사들과 거의 고생을 함께 했고 중군의 소임을 오랫동안 하며 무기와 갑옷을 깔고 잤다. 그래서 적에 나아가 죽는 것을 서로 다투게 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주홍섭(朱弘燮)형제
한번 죽는 것을 가볍게 여겨 칼날을 밟고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두 혼령을 불러 위로하니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기가 어렵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한기경(韓基慶)
뜻이 숙성하여 진실로 공융(孔融)과 같았고 옥에 나갈 만한 어린 나이(就獄)에 용기있게 떨쳐 일어나서 왕기(汪踦)처럼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이름을 얻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홍경후(洪敬厚)
적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므로 용기 1,000만의 적이라도 반드시 갔을 것이다. 사람의 힘을 얻어 12명과 함께 죽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이종국(李鍾國)
유군(儒軍)을 통솔하여 용감하게 100부夫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게 적진에 나아갔고 한번 죽겠다는 뜻이 결연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신태봉(申泰鳳)
저 사람은 아이가 아닌가? 남은 용기를 사고 싶다. 서로 맞붙어 싸워 힘이 다 빠졌다. 흉도도 그 의를 추앙하여 시신을 거두어 묻고 표지(標識)를 하였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김계련(金啓連) 등 4명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구제하였다. 같은 마을에서 남전(藍田)의 규약(規約)을 강구하여 목숨을 바치고 수양성(睢陽城)의 위험이 몰려오는 외로운 성(城)을 떠나지 않았다.

절의(節義) 유기석(劉基錫)
악(惡)을 미워하는 것을 마치 원수처럼 여겨서 오랫동안 추악한 무리들의 반감을 샀다. 재난에 직면하여 구차함이 없이 먼저 흉악한 적의 칼날에 죽음을 당했다.

절의 황종원(黃鍾元)과 김상엽(金商燁)
유장(儒長)으로서 저들의 분노를 사서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다. 적괴에 대항하여 자신의 혀를 보이며 크게 꾸짖어 성망이 있었다.

절의 김명황(金命璜) 부자(父子)
한번 죽는 것을 이루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두 개의 절개를 빛냈으니 가상하고 충효라고 할 만하다.

절의 송봉훈(宋鳳勳) 부부
사생을 함께 하며 그 임소(任所)를 떠나지 않고 아전으로서 충성을 다하였다. 시신을 잘 거두어 집에 안치하였다. 아내도 현명하였다.

절의 오경근(吳景根) 등 6명
광진(狂塵), 동학교도이 성묘(聖廟), 향교의 공자사당를 침범하였을 때에 6명이 죽음으로 지켜 재복(齋服)이 피로 더럽혀졌고 한꺼번에 죽었다.

열녀(烈女) 이씨(李氏)·정씨(鄭氏)
시부모의 종양(終養)을 하는 데 믿을 곳이 없음을 걱정하여 3년을 견디다가 성(城)이 무너지는 치욕과 광포한 적의 패악(悖惡)을 듣고 일생을 죽음으로 맹세한 뜻을 정하였다.

주석
부탕도화(赴湯蹈火)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을 밟는다는 뜻으로 어려움과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호경지탄(呼庚之歎) 군량을 빌리는 괴로움을 뜻한다. 춘추(春秋)시대에 오(吳)의 대부 신숙의(申叔儀)가 노(魯)의 대부에게 군량을 꾸어 달라고 했더니, ‘수산(首山)에 올라 경계(庚癸)라고 외치면 승낙하겠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판삽(版鍤) 성을 쌓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말한다.
도검(韜鈐) 병서(兵書)인 6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을 말한다.
공황(龔黃) 한(漢)나라 때의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인 공수(龔遂)와 황패(黃覇)를 말한다.
남전(藍田)의 규약(規約) 남전지약(藍田之約):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말한다. 송(宋)의 여대균(呂大鈞)이 자신의 고향인 남전에서 실시한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수양성(睢陽城)의 위험 수양지위(睢陽之危): 당(唐)나라 때의 장순(張巡)이 안녹산(安祿山)과의 싸움에서 수양성(睢陽城)에 웅거한데서 연유하여 위태로움을 뜻한다.
종양(終養) 죽을 때까지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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