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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갑오동란록
일러두기

영남에는 일찍이 최국술(崔國戌), 호는 해월(海月, 水雲의 오기)인 자가 있었다. 요술을 잘하였으며, 항상 남의 처를 탐냈으며, 일이 발각되어 조정에 알려져서, 법에 따라 그를 죽였다. 그 후에 또 최법헌(崔法軒)이란 자가 있었으니, 그는 곧 최국술이 죽고 남긴 자식이었다.
최시형은 일찍이 보은 지역에 몸을 숨겨 왔으나, 갑오년(甲午年, 1894)에 간사한 도(道)를 드러내어 미친 듯이 사납게 날뛰어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이름은 동학(東學)이라 하였고, 책(경전)은 동경대전(東經大典)이라 하였다. 주문을 외웠는데, “지기금지원위대강(地氣今至願爲大降, 땅의 기운이 이제 이르렀으니 원컨대 크게 강림하소서)”라고 하였다. 혹세무민하는 것이 마치 한나라 말기에 장각(張角)이 행한 것과 비슷하였다.
처음에는 즐겨 따르는 자들을 모아서 무리를 만들었고, 점차 번성해진 후에는 무리들의 힘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들였다. 1년이 되지 않아 거의 전국에 두루 퍼졌으며, 그들이 모인 곳을 ‘포중(包中)’ 혹은 ‘접중(接中)’이라 하였다. 접중에서 주장하는 자를 ‘접주(接主)’라고 하였으며, 그 다음을 ‘접사(接司)’라고 하였다. 그들이 부리는 자를 ‘성찰(省察)’이라 하였다. 대개 함께 입도한 자들은 귀천이나 상하나 노와 주나 성년과 미성년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서로 접장이라 하였고 서로 만나면 반드시 서로 절하였고, 또 사람을 칭함에는 ‘도인(道人)’이라 하였으며, 큰 접(大接)은 1,000여 명이었고, 작은 접(小接)은 100여 명이었고, 곳곳에 접을 설치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이 해 7월에 내가 저산정사(苧山精舍)에 있을 때, 문약(文若)과 함께 선생을 자리에 모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과 먼지가 아무 것도 없는 땅에서 크게 일어났으며, 인근 마을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얼굴빛이 달라졌다. 갈대밭으로 도망하거나 혹은 다리 밑에 엎드려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행랑에서 일하던 사람이 급히 들어와 알리기를, “난리가 났는데 어찌 하여 편안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습니까? 원컨대 급히 피난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난리가 일어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모른다고 답하였으며, 그는 수풀 사이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이는 필시 지레짐작하여 놀래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 부녀들을 안정시켰으며, 행동을 가벼이 하지 말도록 하였다. 곧바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큰 소리를 지르면서 이야기하기를, “이 마을을 도륙한다는 말은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한 것이다. 놀라지 말라. 놀라지 말라”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놀라서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왔다.
한 여자가 급히 도망갈 때에 그가 포대기로 등에 업은 아이를 길에 떨어뜨렸다. 그 여자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야 비로소 아이를 찾았다. 우물 주변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울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동비(東匪)[동학(東學)으로 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동비라고 하였다.]들이 세력을 얻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많아졌으며, 평생 동안 작게나마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이러한 분위기를 타서 반드시 갚으려 하였다. 비도(匪徒) 중에는 본 마을에 오래된 원한을 가진 자가 있어서 “장차 아무 곳을 함몰시키고 싶다”고 하면서 선언하였는데, 그 말이 전파되었다. 이때에 갑자기 나타나 총을 거두어들이고 비도 30∼40명이 무리를 지어 마을 밖에서 들이닥침에 이와 같은 헛된 놀램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대왕동(大旺洞) 마을에도 1포(包)가 설치되었는데, 혹은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혹은 위협을 받아서 그 당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 당에 들어가지 않는 자에게 또한 화가 따랐는데, 문약(文若)의 집은 그가 평일에 인덕을 쌓은 까닭에 무사하였다. 나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으며, 집 또한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침탈과 욕을 당하지 않았다. 혹 두려워서 움직이며 나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서 “그 도(道)에 들어가지 않으면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할까?”라고 하였다. 그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그 도(道)에 들어가서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은 곧 요행히 면한 것 뿐이다. 어찌 그렇게 하려는가? 다만, 마땅히 바른 것을 지켜야 하며, 삶과 죽음, 화와 복은 하늘에 맡길 뿐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대략 먼 곳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양호전운사(兩湖轉運使) 조필영(趙弼永)과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으로 취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요구한 것이 날마다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성이 특히 심하였다.
이에 고부에 사는 전봉준(田琫準, 全琫準의 오기), 전주에 사는 김개남(金介男, 金開南의 오기), 손하중(孫夏中, 孫化中의 오기)의 무리들은 처음에는 조필영과 조병갑 두 사람의 학정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소요를 일으켰고, 곧이어 동비(東匪)들에게 의탁하여 그 세력이 크게 불어났으며 끝내 동비 중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세력이 컸다. 8월, 9월 사이에 동비들이 수령을 쫓아내거나 관아를 빼앗아 머물렀고, 마음대로 국가의 재물과 병기를 사용하였으며, 부자들의 재물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았다. 조정에서 홍재희(洪在禧)에게 명하여 전주를 토벌하도록 하였으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니, 국가가 위험에 처하여 망할 지경에 이른 듯 하였다.
나는 10월 상순에 도산(道山)에 성묘를 하러 갔는데, 묘사제(墓祀齋)를 마치고 중호(中湖, 공주시 상황동 중동골)의 종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각처에서 동비들이 포(包)의 무리들을 일으켜 일본과 서양세력을 물리쳐서 쫓아낸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며 그들의 성세를 떨쳤는데, 실제는 궁궐을 침벌하려는 계획이었다.
손화중의 포는 청주를 향하여 갔고, 전봉준의 포는 공주를 향하였다. 이때에 전 참판 정숙조(鄭肅朝)가 금산(錦山)에서 유회(儒會)를 주모하여 성을 지켜 동비들을 막다가 홀로 김개남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끝내 싸움에서 사망하였다. 노성 사람 이유상(李有象)은 처음에 부여(扶餘) 건평(乾坪)에서 유회를 꾀하였는데, 나중에 동도에 들어가서 전봉준과 합세하였다.
판서 민영준(閔泳駿)은 외국전권공사(外國專權公使)로서 일본군사들이 와서 구원해줄 것을 청하였다. 좌선봉인 이규태(李圭泰)는 경군(京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와서 공주부내와 치소의 동쪽 월성(月城) 거봉(巨峰)에 있는 봉화대(烽火臺) 위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그들의 무리를 효포(孝浦)에 주둔하게 하였다. 효포는 봉화대와 더불어 상하로 서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효포에서 수월령(水越嶺)에 이르는 10여 리의 긴 골짜기였다. 산을 가득 채우고 들판을 가린 것은 모두가 동비들이었는데, 하얀 색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흰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들의 함성이 땅을 흔들었고, 화약연기가 타올라서 해질 무렵 해를 가렸다. 경군은 동비들과 하루 동안 전투를 벌였으며, 동비들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골짜기를 채웠고 산 자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부터 경군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동비들을 추격해 물리쳤으며, 팔도의 동비들은 차례로 평정되었다. 법헌(法軒)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또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형벌을 받아 죽었다. 중호에서 가까운 효포가 겪은 전란은 다른 곳보다 더 심하였다.

10월 15일부터 11월이 다할 때가 되어서야 난이 그쳤다. 당초에 전봉준이 논산에 머물렀던 것은 경군들이 중요한 곳을 파수하는 것이 매우 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 때문에 향원(鄕園, 공주 중호마을 종가집)에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날마다 총소리가 연속으로 크게 일어나서 온 동네가 놀랐으며, 스스로 자리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매양 안심하는 것으로 피난하는 방법을 삼도록 효유하였다. 나는 책을 읽거나 혹은 신발을 만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옆 사람이 매양 겁도 없다면서 비웃고 조롱하였으나, 이미 화가 일어날 기미가 날로 커져 위급함이 눈앞에 닥쳤고 병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부득이 사판(祠版)을 집 뒷담에 묻었으니,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전쟁이 발생하자, 총알이 여기저기 떨어지는 것이 마치 우박이 어지럽게 내리는 것과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몸에서 혼이 떠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방으로 여기저기 도망하였다. 나 또한 석탱산(石撑山)으로 총알을 피하였다. 날이 저물자 총소리가 멈추었고 비도들은 일제히 말려 갔기에, 밤을 타서 집으로 돌아갔다.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고, 며칠을 기다려도 다시 싸움이 일어날 기미가 없자, 다시 가묘에 사판을 봉안하였다. 앞뒤로 대략 수 10일 동안 신주를 넣어둔 함은 비록 땅의 습한 기운을 머금었으나, 썩어서 상하지 않았으니 매우 다행스러웠다.
길이 막힌 것 때문에 다음 해 정월에야 비로소 돌아가 살 수 있게 되었다. 이해 일본군은 그대로 도성에 남아서 자못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국모가 해를 입었으니, 이는 전에는 결코 없었던 변고였다. 슬프고 슬프다. 이보다 앞서 갑신년(甲申年, 1884)의 적괴인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도망하여 있으면서 몰래 국가의 기밀을 모두 일본에 알렸으며, 이에 다시 일본군에게 도움을 청하는 길을 이용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고, 일본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하여 오로지 정권을 할 수 있었다. 무릇 조정의 대관들은 그 아래에 머리를 굽히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한 세력을 도우면서 따랐다. 예컨대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등인데, 이미 나라 안에 머리털을 자르도록 영을 내렸으며, 방백과 수령들에게 강제로 이를 시행토록 하였다. 민심은 놀라워하면서 모두 따라야 했다.
이에 대해 나라 안의 의병들은 혈기를 내뿜고 서로 일어나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 억지로 머리털을 자르도록 한 난적들을 토벌하여 평정하려 하였다. 유인석(柳麟錫)과 같은 이는 동지들을 이끌고 춘천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으켰으며, 박영효(朴泳孝)가 보낸 일본병과 수차례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들 무리 중에서 관찰사와 수령이 된 자 중 각각 1명의 목을 베었는데, 그들이 폭력으로 머리털을 강제로 자르도록 한 것 때문이었다.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은 또한 선비들과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 의거를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에게 속아서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붙잡혀 갔는데, 의를 내세워 굽히지 않고 돌아왔다. 국가의 원수를 설령 갚지 못하였으나 머리털을 자르도록 하는 것을 한때 정지시킨 것은 실로 의거를 한 여러 선비들의 힘에 입은 바이다.
얼마 안 되어 박영효가 실세하게 되고 다시 일본으로 도망하여 들어갔으며, 김홍집 등은 모두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대개 이번의 변란은 실로 동비들 때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갑진년(甲辰年, 1904)에 미쳐서, 흉적인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의 무리들이 일본의 간사한 꾀를 듣고 남은 동비 무리들을 꾀어내어 일진회(一進會)라 개명하였다. 대개 많은 무리들을 모아서 우리 정부를 빼앗아 일본에 주려는 것이었다.
경술년(庚戌年, 1910)에 미쳐서, 나라가 망한 이후 또 소위 천도교(天道敎)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동비들 중에서 흩어진 남은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서울에 회소(會所)를 설립하였는데, 지금 그 무리가 십만에 이른다고 한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다만, 이들 천성이 같은 백성들이 한번 변하여 동학이 되어서 일본을 배척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왜구를 불러들였다. 이미 왜구를 불러들여서는 다시 변하여 일진회가 되어 일본의 못된 귀신이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나라를 망치자 세번째 변하여 천도교라 하니, 또 장차 천도(天道)를 기만하려 한다. 아아! 슬프다. 생각건대, 전하는 말에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것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지금 어진 백성들이 요사스러운 것으로 됨이 이와 같이 심한 경우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요사스러운 것이 생겨난 까닭을 찾아본다면, 오로지 요사스러운 것에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대개 외척이 권력을 부린 이후로 소위 여러 신하라는 자들이 자잘한 인척이 아니면, 모두 돈이 많은 비루한 자들이었다. 내직에 있게 되면 도둑질하는 신하가 되었고, 외임으로 나가게 되면 백성에게서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 들였다. 그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날로 어려워졌고, 백성들은 날로 피폐하게 된 것이다. 국가의 기강이 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백성들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더불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위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윗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그른 일이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반절 이하는 나중에 추기한 것이다.

주석
손화중의 포는 청주를 향하여 갔고, 청주로 향한 동학농민군부대를 이끄는 지도자는 김개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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