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甲午]
3월[三月]
21일
하루 내내 바람이 불고 구름이 낀 날씨였다. 윤동(允洞)에 가서 김시형(金時亨)을 만났다. 시형이 말하기를, “나는 이번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오늘은 당신도 동학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뒤에 마땅히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원산(院山)에 들어갔다가 왔다. 구름이 깔려 어두컴컴하였다.
22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매우 맑았다. 나는 곧 옷을 입고 행장을 꾸려서 집 식구와 작별하고, 집을 떠나 정산(定山)의 평촌(坪村)으로 향하였다. 달이 밝았으며, 밤이 되어 잠을 잤다.
23일
평촌에서 홍주(洪州)의 화전곡(花田谷)에 있는 황참판(黃參判) 집으로 향하였다. 청양(靑陽)의 미현(米峴)을 넘어서, 해가 질 무렵 화전곡에 있는 참판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러 잠을 잤다. 밤에 황기연(黃耆淵) 참판[이때에 양주 목사였다.]과 더불어 이야기 하였다. 우리 집안이 청아하고 한가하여 경암공(畊菴公)을 정려(旌閭)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참판이 말하기를, “오는 4월 13일에 능행(陵行)으로 임금의 거둥이 있을 때 네가 올라와서 상언(上言)하면, 난 그 뒤를 돌보아 주겠다.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더불어 이야기 했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화전곡으로 향하기에 앞서 신촌(新村)의 김감찰(金監察)의 집에 가서 이름을 받았다(受名). 저녁 무렵 어두컴컴해져서 비가 올 것 같았다.
24일
아침 일찍부터 바람이 불고 비가 부슬부슬 오다가 그쳤다. 황참판과 작별하고, 두리(斗里)에 들어가 두 사람에게 이름을 받아 곧바로 내 집으로 향하였다. 비가 그치고 해무리가 꼈으며 매우 밝았는데,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였다. 이날 홍산(鴻山) 판교(板橋) 앞 술집에서 잤다. 식대가 2전이었다.
25일
일찍 일어나서 판교점에서 홍산 관아 뒤에 이르러 이름을 받았고, 날이 밝자 다시 약현(藥峴)에 들어가서 이름을 받았다. 안양동(鴈陽洞)에 들어가서 이름을 받고, 겸하여 약현 김선비[金雅] 것을 받았다. 해가 이미 오시 방향에 이르렀는데 비로소 아침 식사를 하였다. 달이 매우 밝았으며, 곧 홍산 선동(船東)에 있는 처갓집에 이르러 잠을 잤다. 몸이 조금 아팠다.
26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매우 맑았다. 직접 선서(船西)로 가서 김맹립(金孟立)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바둑을 두었다. 오시에 왔는데 몸이 편안하지 못하여 병이 생길까 걱정하였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27일
아침 일찍 날이 밝자 나는 진곡(眞谷)에 있는 이참봉(李參奉)의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진곡에 이르러 참봉의 동생·어린 아이와 함께 진일포(眞日浦)로 갔다. 참봉을 만나서 낚시를 했는데, 명혁(名爀)이 하루 종일 낚시를 살폈다. 해질 무렵 나는 옷을 걷어 부치고 개(浦)에 들어가 개구리밥(萍)을 땄다. 해질 무렵 함께 간 자들이 진곡에 이르렀다. 참봉 집에 머물러 잠을 잤는데, 8촌 누이 집이었다.
28일
하루 종일 비가 왔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또한 친구와 더불어 놀러 다닌 이야기를 했다. 다시 진곡에서 잠을 잤다. 비가 왔기 때문에 떠나지 못한 것이다.
29일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햇살이 내리쬐어 밝은 대낮이 되었고, 또 널리 퍼지는 것을 보았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선동의 이도사(李都事)의 집에 이르러 김정행(金鼎行)을 만나 화기애애하게 즐겼다. 밤에 박의서(朴義瑞)의 집에 가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 아야기 했다. 그 때 처갓집의 장사꾼인 이정희(李正熙)가 나를 문밖에서 불러 말하기를, “야인리(野仁里)에 사는 최씨(崔氏)가 오셨다”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내려가서 보니 내 당숙이었다. 나는 해가 저문 밤에 도착한 것을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그 까닭을 묻기를, “무슨 일 때문에 늦은 밤에 이곳에 왔습니까?”라고 하였다.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아버지 성북(星北)께서 임천(林川) 관아에 갇혀 있는데, 지금까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즉 돈 50냥을 네 처갓집에서 빌리려고 이곳에 도착하였다”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이에 내실에 들어가 장인을 불러 그러한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더니 장인이 돈 50냥을 허락하여 곧바로 별작전(別作錢)을 구하였다. 이후 처조부께서 인근에 있는 집에서 놀다가 오셔서 또한 물었고, 나는 이에 자세히 말씀드렸다. 처조부가 말씀하시기를, “설령 돈이 여유가 있다고 해도 어찌 우리 집에 와서 빌리려 하는가? 이는 족속으로서 지나친 것이다. 우리가 죽을 지라도 내게서 돈을 빌릴 수 없다. 너는 네 집으로 가서 의논하는 것이 옳다. 어찌하여 네 집의 일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말하는가?”라고 하셨다. 나와 당숙은 크게 무안하여 다만 한마디도 못하였다. 나는 매우 화가 나서 밤에 잠을 자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