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四月]
초 1일
잠깐 눈을 붙였는데, 갑자기 동쪽에서 밝아왔다. 곧 당숙과 함께 갔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며, 겨우 집을 빠져 나왔다. 처조부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돈 50냥을 가지고 가게 되면 기뻐하면서 내게 가겠다는 말을 하고서 갔을 것이다. 내가 네게 돈 50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그래서 문 밖에 우두커니 서서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이게 무슨 버릇인가? 아버지께서 근심스럽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셨다. 나는 용서를 빌면서 말하기를, “두통이 심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어찌 이런 돈 몇 냥에 마음을 두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때 장인이 내게 돈 1냥을 주면서 말씀하시기를, “옥에 갇힌 어른께 드리는 담배 값일세”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부득이 받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생각하니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곧바로 당숙과 동행하여 임천 관아에 이르러 아버지를 뵈었다. 옥에 갇힌 것은 미납한 세금 때문이었다. 나는 이에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서 아버지와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윽고 맹동(孟洞)에서 『시전(詩傳)』을 매매하는 일로 원산 앞을 지나 야인리에 들러 잠시 점심을 먹었다. 이어 선동 장인에게 갔다가 또 도사(都事)의 집에 가서 만나 돈 20냥을 빌려달라고 말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밤에 처조부와 얼굴을 마주보고 다시 그 돈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처조부가 불쾌해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형편이 그렇지 않다. 네가 어찌 스스로 그렇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혼인을 잘하지 못한 일까지 언급하고 내게 예절을 잘 익히지 못하였다고 책망하였다. 또한 혼인할 때에 재물을 받지 않고 혼인한 일을 말하였다. 또 네가 강갈(江葛)의 악지(樂指)를 팔아서 그 세미(稅米)를 내고 앞으로 사돈간에 돈을 빌리는 일은 신중하게 하여 말도 꺼내지 말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말없이 저절로 한숨을 쉬었으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밤에 머물러 잠을 잤다.
초 2일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릴 것 같았으며, 푸른 하늘에 검은 구름이 잔뜩 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홍산의 선동에서 정산의 평촌에 들어갔을 때 마음으로 탄식함을 그칠 수 없었다. 평촌에 이르러 손아래 누이를 만나 이야기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평촌으로 향할 때 은산(殷山)의 묵현(墨峴)에서 비를 만났다. 잠깐 주점(酒店)에서 쉬었다가 평촌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비가 쏟아지는 듯이 내렸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초 3일
하루 종일 어두컴컴하였다. 비가 내렸으며, 구름은 하늘과 이어져 있었다. 평촌에서 하루 더 잠을 잤다.
초 4일
유진두(兪鎭斗)가 내게 돈 30냥을 주었다. 매달에 5푼(分 )이자로 빌렸다. 누이동생 또한 내게 돈 5냥을 주었다. 나는 모두 빚을 지고 왔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희미하였다. 저녁 무렵에야 날씨가 맑았다. 야인리에 도착하였다.
초 5일
돈 40냥을 따로 구하여 임천읍으로 가던 중 성북의 아버지를 장방(長房)에서 만났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먼저 가거라. 나는 마땅히 쌀과 돈을 납부하고 가겠다”라고 하였다. 이날 전라도의 동학이 크게 난리를 쳤다. 임천 또한 포수(鋪手, 鋪는 砲의 오식)를 모집하여 모여들었으므로 읍내가 시끄러웠다. 나는 곧 인리(仁里)에 도착하였다. 저녁 무렵에 성북의 아버지께서 임천읍에서 인리에 도착하였다.
초 6일
요곡(堯谷)을 떠나 저녁 무렵 소요곡(小堯谷) 주씨의 묘에서 정사동(靜士洞) 정은(靜隱)의 산소(山所)를 살펴보고 왔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희미하였다.
초 7일
하루 종일 날씨가 희미하였다. 집의 방을 다시 헐고 고쳤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희미하였다.
초 8일
일찍부터 날씨가 흐렸다. 마거(麻車)에 사는 김석사(金碩士)의 집에 가서 『공자통기(孔子通記)』 3권을 빌려 왔다. 저녁 무렵 날씨가 잠깐 맑았다.
초 9일
하루 종일 날씨가 희미하였다. 종이 2권을 다듬어 원산에 갔다 왔다. 저녁에 달이 높이 떴다.
초 10일
‘세계(世系, 조상의 계보)’를 쓰기 시작하였다. 윤동에 갔다가 왔다. 날씨가 맑았으나 순조롭지 않았다. 저녁에 달이 높이 떴다
11일
날씨가 맑았지만 오히려 순조롭지는 않았다.
12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매우 맑았다. 저녁 무렵 날씨가 조금은 좋지 않았으나, 뒷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밤에 오전리 이여옥(李汝玉)의 소상(小祥)에 조문하였다.
13일
날씨가 맑았다가 좋지 않았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나주 정씨 증조할머니 산소에서 풀을 뽑고, 옆에 있는 대추나무 뿌리를 없앴다. 이 일을 수일 동안 하였다. 날씨가 좋지 않은 것은 전라도 고부(古阜)와 정읍(井邑)의 경계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나 온 나라가 시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14일
하루 내내 날이 맑았으나, 혹 흐리기도 했다.
15일
아침 일찍 마지(馬池)에 갔으나 한덕언(韓德彦)을 만나지 못하였다. 설월(雪月)에 갔으나 감찰(監察) 최관일(崔貫一)을 만나지 못하였다. 서천(舒川) 냉정리(冷井里)에 갔으나 이화실(李化實)을 만나지 못하였다. 붕암(鵬岩)에 가서 퇴담(退潭)의 산소에 들리려 했으나 알지 못하여 왔다. 오후에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바람이 혹 불기도 했으나 날씨는 맑았다. 저녁에 하얀 무지개가 나왔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질렀다.
16일
아침 일찍 날이 맑았다. 바람이 간혹 불기도 했으나 오후에는 조금 흐렸다. 요곡에서 출발하여 저녁 이후에 집에 도착하였다.
17일
아침 일찍 허문(虛門)에 가서 염치명(廉致明)을 만났다. 요곡에 이르렀는데 비가 어지럽게 왔다. 오후에는 비를 무릅쓰고 집에 도착하였다.
18일
들판의 물을 살펴보았다. 날씨가 조금 맑았다. 저녁에 가장 맑았다. 이봉근(李鳳根)이 관례를 치르고 혼인하는 것을 보았다. 저녁 무렵 바람이 크게 불었다. 구름이 마치 연기처럼 흩어졌다. 밤에 또한 바람이 불었다.
19일
아침 일찍 바람이 불었으며 비가 조금 내렸다. 그런 다음에 구름이 흩어져 날씨가 맑았다. 아침 일찍 곡답(曲畓)을 살폈다. 요곡에서 왔다. 저녁 무렵 또 곡답을 살폈다.
20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맑았다.
21일
날씨가 맑았다. 오후에 성북의 아버지께서 회충 때문에 복통이 심했다. 내가 일신탕(一辛湯)을 지으려고 윤동의 운정(雲亭)에게 갔으나 의원을 만나지 못하고 왔다. 저녁 무렵에 다시 윤동에 가서 약을 지어 저물어서야 왔다.
22일
날씨가 맑았다. 오후에 윤동에 가서 고련근사당(苦練根沙磄)을 지어 왔다. 날씨가 맑았고 바람이 설설 불었다. 저녁 무렵에 요곡에 갔다가 왔다.
23일
날씨가 맑았다. 오후에 성북의 아버지가 아픈 것이 나았다. 요곡에 갔다가 왔다.
24일
날씨가 맑았다. 가뭄이 점차 다가 왔다. 마지에 가서 한덕언(韓德彦)을 만나고 왔다. 종전(宗錢) 30냥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25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매우 맑았다. 요곡에서 왔다가 간 것이 2∼3차례이다.
26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매우 맑았다. 양손으로 물을 움켜 떠서 곡답에 대었다. 가뭄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27일
아침 일찍 크게 안개가 끼었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이 날 오전 양손으로 물을 움켜 떠서 논에 대었다.
28일
아침 일찍 크게 안개가 끼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으며, 간혹 바람이 설설 불었다. 오후에 홍산 선동의 장인 댁으로 가서 장모의 병을 위문하였는데, 어제 땀을 흘려서 병이 나았다고 한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았다. 밤에 박성원(朴性元)의 집에서 머물러 잤다.
29일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선동에서 왔다. 그 때 지석리(砥石里) 앞에서 비를 무릅썼고, 또 가산(駕山)의 주점에서 조금 쉬었고, 옷자락을 들쳐 올리고 비를 무릅쓰고 왔다. 밤에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점을 쳤더니 풍년이 올 조짐이었다.
30일
아침 일찍 구름이 껴서 하늘에 잇닿았으며,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뒷 개천의 물이 조금 불났다. 나는 고추(枯椒)를 가라두(可羅斗)의 작은 밭으로 옮겼다. 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