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八月]
초 1일
집을 떠나 임천에 이르렀다. 비를 무릅쓰고 향교에 들어가서 재임(齋任, 재실의 임원 )2명의 명단을 받았다. 오후에 큰 비를 무릅쓰고 금지천(錦芝川)의 주점에 머물러 잤다.
초 2일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하여 임천 경계를 지나서 부여(扶餘)의 탄암(灘岩, 엿바외)에 이르렀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백마강(白馬江)을 건너 부여 향교에 들어갔다. 공의(公議)를 내어 13명의 명단을 받아 물러갔다. 백치(白峙)를 넘어 석성(石城)으로 들어가서 14명의 명단을 받아서 돌아왔다. 백치의 주점에서 잠을 잤다. 이 날 부여의 향교에 들어가니 여러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세상이 이와 같이 큰 난리가 일어났으니 무엇으로 공의를 일으켜서 행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날씨가 맑았으며, 밤에는 서늘하였다.
초 3일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하여 백마강을 건너 와서 정산의 평촌에 들어가서 머물러 잠을 잤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초 4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해질 무렵 도인 700명이 공주(公州)에서 와서 광암(廣岩)[정산(定山) 넙적바외]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서서 보았다. 포를 쏘자 사람의 그림자가 흩어졌다. 평촌에서 잠을 잤다.
초 5일
아침 일찍 날이 맑았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고 흩어져 있었다. 평촌에서 잤다.
초 6일
정산의 평촌에서 집으로 돌아와 임천 향교에 들러서 답통(答通) 1장을 찾았다. 이보다 앞서 임천에 들어가기 반시간 전에 행곡(杏谷) 주점 뒤에서 결성(結城) 양곡(陽谷)에 사는 한선각(韓善覺)을 만나서 금강(錦江)의 신양운(申陽雲)과 함께 주점에 들어가 10잔의 술을 샀다. 한생원이 말하기를, “나 역시 도인들의 난을 피해 집을 떠나 이처럼 유리(流離)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나와 함께 개탄하기를 마지않았고, 이윽고 작별하였다. 아침 일찍 날이 흐렸다. 오후에 날씨가 매우 맑았다.
초 7일
새벽. 날씨가 매우 맑았다.
초 8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밤에 가락암에 가서 쇠장의 경치를 즐겼다. 아침 일찍 사곡에 가서 윤상필을 만났다. 윤상필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세상이 어지러워서, 내가 네게 말했는데도 끝내 고치지 않은 것은 너무 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초 9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오후에 번두(番頭)인 이화윤(李花允)이 왔다. 해질 무렵 송산의 승수가 왔다. 땅거미가 질 무렵 성지동(聖地洞)에서 함께 배웅하고 왔다.
초 10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해질 무렵 날이 어두워졌다.
11일
아침 일찍 덕봉(德鳳)과 함께 오전에 있는 논에 가서 벼 50여 묶음을 베고 3짐(負)을 끌고 뒷산에 가서 펴서 말렸다.
12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유장(儒狀)을 가지고 베끼기 위해 맹동(孟洞)으로 갔다. 조하임(趙夏任)을 만나서 베끼고 왔다. 저녁에 사곡에 갔다. 달빛이 매우 밝았다. 그 때문에 머물러 잤다.
13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하루 내내 사곡에서 놀았다. 해질 무렵에 왔다.
14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오후에 맹동에 가서 유장을 베끼고 왔다.
15일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점차 따뜻해졌으며 맑았다. 근처의 산소를 살폈다. 명곡(明谷)의 □□이 그것이다. 오후에 성지(聖地)에 가서 현포공(玄圃公)의 산소를 살피고 왔다. 반곡(盤谷)에 들어가 정생원(鄭生員)과 함께 시대의 혼란에 대해 서로 이야기 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도착했다. 달빛이 밝았다.
16일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해질 무렵 맹동으로 가서 유장을 찾아서 왔다. 밤에 외조모 정씨(鄭氏)의 제사를 지냈다. 밤에 달빛이 밝았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었다.
17일
하루 내내 매우 흐렸으며 맑지 않았다. 혹 맑기도 했다. 밤에 달이 희미해서 맑지 않았다. 성북에서 ‘사문(辭文)’ 1건을 얻어서 왔다.
18일
하루 내내 매우 흐렸다. 가랑비가 왔고, 구름이 많이 끼었다. 이종구(李鍾龜)와 함께 놀았다.
19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매우 맑았다. 홍산의 친족이 와서 문앞에 서 있다가 곧바로 갔다. 음곡(蔭谷) 김치장(金致長)이 왔다가 물러갔다. 지호(芝湖) 정내원(鄭乃元)이 왔다가 해질 무렵에 갔다.
20일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임천 마생동(馬生洞) 뒤에 이르러 사곡에 사는 노인 권기문(權奇文)을 만나서 함께 갔다. 임천 읍내를 지나 백마강 탄암에 이르러 청풍정(淸風亭)에서 놀았다. 수북정(水北亭)에서 잠시 눈을 붙였고, 이윽고 동행하여 부여 신촌에 있는 유선비(兪雅)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러 잤다. 원래 유선비는 도인들에게 화를 당하여 형제들이 흩어졌다고 한다. 국사(菊史)의 시를 읊었다.
21일
신촌에서 구두진(鷗頭津)을 건너서 부여읍(扶餘邑)을 지났다. 또 공주 이인(二人, 利仁의 오기 )찰방을 지나 조금 가서 하얀 옷을 입은 상을 당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니, 나는 말하기를, “공주감영에 들어갑니다”라고 하였다. 하얀 옷을 입은 상을 당한 사람이 말하기를, “공주는 지금 큰 난리가 났습니다. 반송접(盤松接)과 서로 대치하여 크게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웅치(熊峙)에서 공주접(公州接) 사람들이 진을 머물게 하여 길을 막고 있습니다. 서둘러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때문에 몇 걸음을 지나다가 공주에 사는 박(朴)이란 사람을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무방합니다”라고 운운하였다. 이윽고 동행과 함께 웅치 아래에 이르러서 어린 아이 1명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지금 공주부내 4∼5곳에 진을 치고 있으며, 만일 행인이 부에 들어가면 잡아서 진중에 두고 있습니다. 원컨대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곧바로 그 아이와 함께 동행하여 돌아와서 이인( )낭억리(郞億里, 랑억이) 주막에 머물렀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었다. 해질 무렵 어떤 사람이 내게 성주(星州) 합천(陜川)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고, 이후 날이 저물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주·청주의 군대와 도인이 이인을 도륙하였는데, 오늘 밤에 와서 몰아내면 이 마을과 이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크게 동요되었으나, 이날 밤 무사하였다.
22일
아침 일찍 영남 합천으로 떠날 생각으로 발양(發陽) 주점을 떠났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또한 발양치(發陽峙)를 넘어 이끌고 가는 길에 1명을 만났다. 그가 말하기를, “봉명동(鳳鳴洞)에 사는 유경일(劉景一)이라고 합니다”라고 운운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봉명동에 유씨(劉氏)가 많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도정(都正) 유자덕(劉子德)은 밝고 옳은 아재비입니다. 또한 다른 족속들도 계십니다”라고 운운하였다. 곧 작별하고 봉명동에 들어갔다. 뒷산에 이르러 4∼5명을 만나서 말하기를, “유자(儒子)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영남으로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삼가 가지 마십시오. 영남에 일본인들이 크게 침범하니 길이 막혔고, 또한 이와 같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어찌 가시려고 합니까? 제발 가지 마십시오”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인하여 돌아와 발양치를 넘어서 주점에 이르렀다. 도인 수백 명이 호위하여 지나갔으며, 이인( )주점에 이르렀다. 남녀들이 피난을 갔다. 오후에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비가 잠시 뿌렸다가 곧바로 멈추었다. 새벽녘에 왕진(王津)을 건너서 땅거미가 질 무렵 작은 누이의 집에 도착하였다. 평촌에서 잠을 잤다. 아침 일찍 날이 매우 맑았다.
23일
아침 일찍 날이 매우 맑았다. 구름이 혹 흩어져 있었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또 평촌에서 잠을 잤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었다.
24일
아침 일찍 날씨가 흐려서 맑지 않았다. 평촌에서 은산(殷山)의 시장을 지나 홍산 송주동(松周洞)에 들어가서 정덕삼(鄭德三) 노인을 찾았다. 김기주(金箕周)를 만났는데, 자(字)는 경홍(景弘)으로 효행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으로 상(喪) 중에 홀로 있어서, 곧바로 정노인의 아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서 벼를 베는 곳에서 정노인을 만났다. 곧 피난할 곳을 물었다. 정노인이 답하기를, “울진(蔚珍)·삼척(三陟)·궁기(弓基)이다. 나는 3번이나 왕래한 적이 있다. 만일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라고 운운하였다. 또한 “오는 9월 말일 이전에 야인동(野仁洞)에서 당신을 찾아 가겠다”라고 약속하였다. 나는 그것에 응하였고 작별하였다. 해질 무렵 선동의 장인댁에 들어갔으며, 상중(喪中)에 있는 박의서와 함께 놀다가 머물러 잤다.
25일
하루 내내 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었다. 오후에 홍산 읍내에 있는 도사(都事)인 최규진(崔圭珍)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선조의 덕과 당시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또한 양주(楊州) 판동(板洞)의 선영(先塋)과 뛰어난 문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최규진이 말하기를, “보령(保寧)에 유혁연(柳赫然)의 후손이 있는데 미쳤다가 나중에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면서,
시(詩)를 지었다.
공연히 두렵다 하여 어디로 가리
끝내 난리가 나서 지금은 벗어나지 못하리
바로 두옹(杜翁)이 북녘으로 갈(北征) 때에
얼마나 고통이 뒤따랐던가
괴로운 이 세상 누가 평정하리
바람이 불듯이 훌쩍 떠나 더러운 세상 밖에 살고 싶네
바둑판 뒤집듯 귀신도 모르게
말도 않고 웃지도 말아 미치광이처럼 앉아 있으리
이윽고 도사와 작별하고 왔다. 이때 처의 생조모인 심씨(沈氏)의 빈소를 살폈다. 선동에 들어가서 친족인 최영환(崔榮煥)을 만나고 왔다. 처가 집에서 머물러 잤다. 밤에 구름이 많이 끼었다.
26일
아침 일찍 비가 왔다. 오후가 되자 가늘어 졌다. 날씨가 매우 어두웠다. 또한 선동에 머물러 잤다. 조재형(趙載亨)은 비인(庇仁)의 재임(齋任)인데, 밤에 더불어 놀았다.
27일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비인의 조선비(趙雅, 조재형)가 선동의 김세식(金世植)·박의서와 함께 유장(儒狀)을 보았는데, 조재형이 서명하였다. 비인의 선비 3명과 선동에서 오후에 작별하였다. 집으로 돌아올 때 고악리(古樂里)의 이영동(李永同)의 집에 들어갔다. 중명(重明)과 함께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함께 말했다. 오후에 날씨가 맑았다. 중명이 말하기를, “의복, 양반의 문벌(班閥) 등 수십 조목을 복고(復古)한다”라고 운운하였다. 그만두고는 떠나지 않고 또한 머물러 잤다.
28일
아침 일찍 이용근(李鎔根)의 이름을 받았다. 고악리에서 보애로 들어가 청사 선생을 만나고 왔다. 고음당(古音堂)에 들어가서 권병채(權丙采)를 만났다. 박선비(朴雅)를 만났다. 백모님의 산소를 살피고 왔다. 태봉(胎封)에 들어가서 조경(助敬)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가 3전(戔)에 해당하는 고기를 사서 말하기를, “야헌(野軒)의 노인이 드실 것이다”라고 운운하였다. 나는 인사하고 이를 받아 와서 집에 들어갔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29일
아침 일찍 구름이 많이 끼었다. 12시 무렵(午正 )날씨가 맑았다. 해질 무렵 구름이 가장 많이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