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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九月]

초 1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12시 무렵 날씨가 맑았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었다.

초 2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오후 해질 무렵 오전리에 가서 『독서록(讀書錄)』 1권, 『문음보(文蔭譜)』 1권을 윤주병(尹冑炳)의 집에 전달하였다. 요곡에 물러갔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초 3일

날씨가 맑았다. 오후에 새 장시(場市)에 가서 게 1접 40개, 장지(壯紙) 1장, 백지 30장, 창호지 3장을 사서 왔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밤 삼경(三更, 11∼1시)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움직여 농악을 치면서 말하기를, “모두 쇠몽둥이 1개를 들고서 가락암으로 가서 화적들을 막자”라고 운운하였는데, 이끌리어 가락암으로 달려갔다.

초 4일

어제 밤에 화적들이 가락암에 들어가서 재물과 돈을 빼앗아 갔다고 아침 일찍 들었다. 이는 가락암이 열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세상의 풍속이 말세에 이르렀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혹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기도 했다.

초 5일

하루 내내 맑았다. 또한 흐린 구름이 혹은 하늘에 끼어 참기름을 짠듯하다.

초 6일

새벽. 밤. 날씨가 맑았다. 오전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가, 구름이 걷혀서 마치 비가 올 것 같았다. 오후에 날이 매우 맑았다. 해질 무렵 붉은 감 2접을 따서 깎아서 말렸다.

초 7일

날씨가 맑았다. 아침 일찍 감 1접을 따서 깎아서 말렸다. 밤에 고조할머니의 제사에 참석했다.

초 8일

날씨가 맑았다. 혹 구름이 끼어 흐렸다. 아침 일찍 집 마당에서 벼를 타작했다.

초 9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방계 6대조 할아버지 3위(位)의 시제(時祭)에 참석했다. 아침 일찍 요곡에 갔다. □□하고 왔다.

초 10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11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밤에 큰어머니 제사에 참석했다.

12일

날이 매우 맑았다. 하루 내내 맑았다.

13일

날이 매우 맑았다. 오후에 석계원·이승하(李承夏)가 와서 나를 방문했다. 그래서 함께 사곡에 가서 머물러 잤다. 이임신(李任伸)과 함께 놀았다.

14일

아침 일찍 송산에 가서 유사(有司)를 만나지 못하고 단지 그의 아들을 만나서 아침밥을 먹고 왔다. 사곡에 들어가서 호운을 만났다. 오시에 석현(石峴)을 넘어서 홍산의 지관(地官)인 정덕삼(鄭德三)과 우연히 만나서 함께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점심 식사를 하고 정노인에게 술을 권했다. 우리 할아버지 야헌과 함께 직접 삼척·궁기에 들어갈 일을 이야기했다. 오후에 교항(橋項)으로 떠난다고 한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밤에 바람이 조금 불었다.

15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바람이 불었다. 사시에 홍산에 사는 어린아이가 와서 말하기를, 처할머니의 장례가 내일로 그래서 모시고 가려 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에 행장을 꾸렸다. 오후에 함께 홍산으로 갔다. 그때가 해질 무렵 고악리 이영동댁(李永同宅)에 들어가서 운천(雲川)의 장소(狀疏)를 전하고, 곧바로 선동에 들어가 머물러 잤다.

16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밤에 안동리(安洞里)로 가서 산기슭을 지나 토지신에게 축문을 한 후 묘터를 닦고 처할머니 심씨(沈氏)의 산에 장사를 지낼 준비를 했다. 이날 성북의 아버지께서 선동을 지나 정산에 가셨다.

17일

인시(寅時, 오전 3∼5시)에 청송 심씨를 하관했다. 밤이 되도록 산역을 살펴보았다. 달빛이 참으로 맑았다. 대개 어제 밤 달이 참으로 맑았다고 한다. 동쪽에 해가 아직 밝아오지 않았을 때 선동에 이르렀다. 이 날 매우 맑았다.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또한 잠을 잤다.

18일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아침 일찍 구름이 끼거나 혹은 많기도 했다. 전라도 도인에게 물으니, 전봉준(全鳳準, 鳳은 琫의 오기)과 함께 강을 건너 임천 굴앙포(屈仰浦)에 진을 치고 있다고 운운하였다. 인하여 일본을 물리쳤다고 운운하였으나 믿지 못하였다. 또한 잠을 잤다. 밤에 구름이 많이 끼었다. 달이 희미하게 밝았다.

19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아침 일찍 삼우제(三虞祭)를 지냈다. 이후 홍산 선동에서 집에 도착하였다. 야헌 할아버지와 훤당(萱堂, 남의 어머님의 경칭)에게 알렸다. 또한 완산(完山, 전주)과 전라(全羅)의 큰 난리에 대해 물었다. 운운.

20일

새벽. 밤.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맑지 않았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 오후에 원모촌(遠慕村)에 가서 이선비(李雅)를 만나서 『소학(小學)』을 얻어서 읽을 수 있는 지를 말하였다. 이선비가 말하기를, “우리 형님 집에 있는데 형이 오면 말을 한 다음에 빌릴 수 있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윽고 돌아와 집에 들어가니, 성북(星北) 아버지께서 말하기를, “전라도인 전봉준(全鳳準, 鳳은 琫의 오기)이 병사를 이끌고 여산(礪山)에 이르렀다”라고 운운하였다. 또한 “배우지 못한 무리 수천 명이 이를 틈타 화적질을 한즉 사람들이 살수 없다”라고 운운하였다. 밤에 부슬비가 내려 약간 습기가 있었다.

21일

아침 일찍 날씨가 흐리고 맑지 않았다. 월정(月亭)의 방(房)을 흙으로 발랐다.

22일

종이를 벽에 발랐는데 야헌·성북·월정 3개 방벽(旁壁)이었다. 날이 저물어 원모촌에 갔는데 이원식(李元植)을 만나지 못했다. 가락암에 이르러 황하조(黃河祖)를 모시고 왔다. 날씨가 조금 맑았다. 해질 무렵 매우 맑았다.

23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오후에 사곡에 가서 권만송(權晩松)을 만나 『논어(論語)』 제3권을 빌렸다. 대개 아침 일찍 원모촌에 갔으나 『소학』을 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24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아침 햇빛이 들 때 선미(仙楣)에 가서 박양래(朴陽來)를 만났다. 호는 석장(石庄)이다. 서당(書堂)의 호를 지으려고 장지(壯紙) 24조각을 두었다. 몸을 이끌고 정원흠(鄭元欽)을 만났다. 오후에 집에 도착하였다. 해질 무렵에 성북의 아버지께서 마거에 가셨다가 와서 말씀하기를, “임천 도인(道人) 수천 명이 모여서 읍내 뒤쪽 성우산(聖禹山)에 성을 쌓으려고 한다”고 운운하였다. 세상이 크게 어지러움을 알 수 있다.

25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매우 맑았다. 아침 일찍 임천의 윤동에 갔으나 희만(熙萬)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김사윤(金思胤)을 만났다. 황호(黃湖)로 갔으나 난곡(蘭谷)을 만나지 못하였다. 오후에 원당리(元堂里)에 들어가 이청일(李淸一)을 만나서 유장을 초록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해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성북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호남접에 정협(鄭協)이라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라고 운운하였다. 또한 윤음(綸音)의 내용에, “일본 군사들은 큰 규모의 군대로 호남도접(湖南道接)을 치려고 하며, 세미(稅米)를 독촉한다”라고 운운하였다.

26일

날씨가 매우 맑았다. 오후에 이낙서(李洛瑞)를 만났다. 해질 무렵에 함께 반산(盤山)에 올라 서쪽 들판을 보았다. 바람이 미세하게 불었다.

27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맑았다. 집에서 늦은 벼를 벴다. 해질 무렵 구름이 많이 끼었다. 성북의 아버지께서 초저녁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호남도인이 지호(芝湖)에 들어온다” 라고 운운하였다.

28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원당리 이재하(李載河)[자는 청일(淸一)이다.]의 집으로 가서 유장을 초록한 것을 보았다. 하루 내내 머물렀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구름이 가장 많이 끼었다. 유장을 초록한 것을 가지고 땅거미가 질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29일

날씨가 맑았다. 하루 내내 그러하였다.

30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오시에 조동옥(趙東玉)이 혼인하는 것을 보았다. 오후에 요곡에 가서 밤을 깎았는데, 내일 춘악와(春樂窩) 윤공(尹公)의 시제(時祭)를 위한 것이다. 이슥한 밤 당숙·삼종과 함께 가서 아로촌(珂路村) 안에 이르렀다. 총을 쏘는 소리를 내면서 마을 백성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오늘 밤 윤동접의 도회(都會)가 있으니,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윤동으로 가자”라고 운운하였다. 이날 밤 구름이 많이 끼었다.

주석
『문음보(文蔭譜)』 조선시대 훈신이나 공신의 후예에게 특별히 과거를 거치지 않고 문관 벼슬을 준 계보. 이를 음관(蔭官)이라 한다.
임천 굴앙포(屈仰浦)에 임천은 오늘날 부여군에 속하는 지역으로 금강의 연안에 있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삼례에 집결했다가 북상할 때 군산 여산 등지 농민군이 금강을 건너 서천 임천 등지 농민군과 합세해 활동하였다. 따라서 전봉준이 함께 왔다는 것은 낭설이다.
전라도인 전봉준(全鳳準, 鳳은 琫의 오기)이 병사를 이끌고 여산(礪山)에 이르렀다” 전봉준은 이해 9월 말경, 공주전투를 벌이기 위해 삼례를 출발해 여산 강경 은진을 거쳐 논산으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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